brunch

죽도 밥도 안 된다면

by 재홍


일상이 주는 편안함이 있습니다. 해 왔던 것을 계속하는 것에 순조로움과 안정감을 느낍니다. 출근해서 정해져 있는 업무를 하고, 맛을 아는 점심을 먹고, 했던 얘기를 하고...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머리를 탁 치게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무언가 시들고 무겁고 사라지고 죽는 느낌이 있습니다.


이렇게 살아도 되나?라고 묻는 순간이 있습니다. 이 자리에 머물러 있어도 되나? 쳇바퀴 굴리듯이 돌리는 삶, 반복적인 일상이 무섭게 다가옵니다. 어디로 걷고 있는지를 모르는 삶입니다. 앞으로 걷고 있는 것은 맞을까요? 제자리 걷기에 불과할지도 모르죠. 옆으로 돌아서 뛰어야 할지도요. 다른 사람들도 걷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뛰어야 그들을 따돌릴 수 있으니까요. 지름길을 찾아 목적지에 빨리 도착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IMG%EF%BC%BF2309.JPG?type=w773

어릴 때 바둑을 배웠는데요, 처음 바둑을 배우면 포석을 연습합니다. 포석이라는 것은 바둑판의 모서리에서 일어나는 흑과 백 둘 다 '이 정도면 타협할 수 있다' 같은 수들의 연속인데요, 화점의 날 일자 포석, 소목에 걸치기 포석 등등이 있습니다. 바둑은 많은 집을 가진 쪽이 이기는 게임입니다. 그런 면에서 바둑에서 포석을 선택하는 것은 삶에서 길을 선택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최대한 많은 집을 지을거야! 라는 포석이 있는 반면에, 최대한 상대의 집을 부술거야! 같은 방식도 있습니다.


저는 이상하게 두는 재주가 있었습니다. 포석을 두다 갑자기 상대방에 돌에 갖다 붙여 싸움을 유도한다든지, 갑자기 손을 빼서 다른 곳에 뒀던 것이죠. 마구잡이로 싸우다 보면 결판이 나 있었습니다. 지기도 하고 이기기도 했죠. 이 재주를 상대방을 교란하는 작전이라고 혼자 포장했지만... 실상은 정석을 잘 외우지 못해 생기는 해프닝이었습니다. 바둑 학원 원장님은 제 바둑을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싸우는 바둑'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뒤에 '근데 결국 죽도 안 되고 밥도 안 되는 경우가 많다'라고도 덧붙이시긴 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많은 일들은 죽도 안되고 밥도 안 되는 일을 행하면서 이루어집니다. 뜻하지 않게 만든 군용 천은 청바지가 되고, 접착력이 약한 접착제는 포스트잇이 되는 것처럼요. '에라 모르겠다'를 내뱉으며 어떻게든 수습하는 일. 물 조절을 잘못해서 진 밥을 만들어버렸다면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누룽지를 만들어 보는 것이죠. 밥과 달리 누룽지는 바삭바삭 또 다른 매력이 있으니까요.

keyword
작가의 이전글요즘은 은근 복고로 다시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