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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 Dec 22. 2023

이별



아무리 빠져나오려 해도 힘없는 날개는 늪으로 빠져 들어갔다.

그렇게 무거워하던 짐 내려놓고 언니가 이사를 갔다.

활짝 편 날개로 날아 하나님 나라에.


머리카락이 자꾸 빠진다고 울던 언니가

어찌하든지 먹고 힘을 내보려던 언니가

다리 힘이 없어도 사천 보 오천 보를 걸으면서 좋아하던 언니였는데

어느 날 자식도, 돈도, 명예도 다 놓아 버리고 훨훨 날아갔다.


부고 소식을 듣고 달려가본들, 영정 사진으로 만난 언니 모습은 허무하고 속상했다. 아프면서부터 매일 안부를 묻고, 목소리를 들려주던 언니를 이젠 볼 수 없다. 암이란 놈은 죽음을 안고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농락하고 있는 것 같아서 개인의 감정 같아선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지만 그게 가능한 것도 아니라서.


영정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언니에게 “그동안 힘든 치료 받느라 너무 고생했어, 언니.”라고 인사했다.

장례를 치르는 동안 눈물도 많이 흐르지 않았다. 언니를 볼 수 없다는 건 슬프지만 하나님의 자녀로 천국에 갔으니까, 이별은 슬퍼도 고통이 없는 곳에서 편안하실 거니까.




췌장암이 완치가 어려운 이유는 말기가 되어서야 증상이 나타나 치료 시기를 놓쳐 버리기 때문이란다. 췌장 꼬리 쪽이면 수술도 가능하지만 언니는 머리 쪽에 암이 생겨서 더 힘들었던 것 같다. 6차 항암치료를 받고 나니 암세포가 1/3 정도 줄었다. 온 가족이 좋아했고 희망이 보였다.


그러던 중 넘어지는 바람에 팔다리가 골절되어 치료받지 못하고, 코로나에 걸려 또 치료받지 못했다. 3주마다 한 번씩 받던 항암을 3~4번을 못 받게 되니 암세포가 처음 상태로 커져 모두가 실망스러웠지만 언니의 슬픔에 어찌 비교할 수 있을까. 그러나 언니는 가족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애썼다. 병원에서는 지금까지 쓰던 약은 내성이 생겼으니 치료방법을 달리한다며 3~4일 동안 천천히 투여하던 주사액을 짧은 시간 (4~5시간)에 투여하는 방법을 택했다.  


의사가 지시하면 따를 수밖에 없는 환자들. 독한 항암주사를 3~4일에 한 번씩 반복해 몸속에 넣으니 언니가 얼마나 힘들었을 것이며 고통은 또 얼마나 컸을까. 힘든 만큼 누워 있는 시간이 많아졌고 식사량도 줄었다. 그 결과로 몸은 힘이 점점 떨어지고 쇠약해져 갔다. 팔십 노인인 형부가 감당하기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힘든 수위가 되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환우들은 의사의 처방이 아니어도 암에 좋다는 민간요법에 귀를 활짝 열 수밖에 없지만 언니는 다행히 의사의 지시만 따랐었다. 때로는 아침을, 때로는 점심을 먹지 않았다며 속상해하는 형부 음성이 수화기를 타고 들려올 때마다 영심이도 나도 속상했다. 


음식을 만들어 냉동실에 넣어두고, 이렇게 저렇게 데워서 드시라고 알려주고 왔었는데 항암 치료로 입맛이 달아날 대로 달아난 언니. 냉동된 음식을 주방일도 어설픈 형부가 다시 조리해 준들 무슨 입맛이 살아나 먹겠는가.

속상했다. 한 달 만이라도 언니 곁에 머물며 따뜻한 음식을 만들어주고 싶은데, 마음뿐 결정하기에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아 너무 속상했다. 다행히 오빠와 올케가 주변에 살고 있어서 병원에 모시고 다녀오기를 계속했고 보양식도 자주 만들어 드리며, 면역을 올리기 위해 얼마나 수고 많았는지 정말 감사하다. 그럼에도 동생들 누구 하나 내색하지 않았지만 희망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는 걸 알았다. 의사도 알고, 언니도 알고, 가족들도 아는 그날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못 살 것 같아."

“언니, 사람은 누구나 죽어, 나도 죽고.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께 있어.”

조금씩 무너지는 언니를 보면서 어느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죽음에 담담해지기를 기도한다.


언니는 걷는 것조차 힘들어했다. 휠체어를 타야만 화장실도 가고 바깥바람도 쐴 수 있다. 음식 먹는 것도 괴로워했다. 가벼운 식사에도 좀 많다 싶으면 토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병원에서는 병원 치료가 불필요하며 집이나 요양병원에서 편하게 간호받으라는 진단이 나왔다. 치료는 멈췄고 병원에서 처방해 준 진통제로 견디어냈다. 형부 혼자 간호하느라 형부까지 쓰러질 것만 같아서 요양병원에 입원시키기로 결정했다. 가족들에게서 버려졌다는 오해를 주지 않기 위해 왜 요양병원에 가야 하는지를 언니에게 설명하고 동의를 구해야만 했다. 


“언니가 먹지 못하니 병원에 입원해서 영양제를 맞아야 해.”

“엄마가 조금이라도 드시면 병원에서 붙잡아도 집으로 모실 거예요, 그러니 드셔야 해요.”

“음식이 들어가야 다리에 힘도 생기고 걸을 수 있어요.”

조카와 나는 언니 안색을 살피며 설득하고 설득했다. 


살다가 숨이 끊어지면 아무것도 모를 텐데도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이기에 죽음의 단어가 주는 압박은 두려움과 무서움 그리고 조여 오는 듯한 스트레스로 감당하기 힘든 일이다. 항암주사 맞을 때는 너무 고통스러워서 죽는 거 무섭지 않다던 언니가 “어떻게 죽나” 하며 두려워했다. 그러나 꾸준히 복음을 듣고 예배를 드리면서 얼굴이 밝아졌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한복음 11장 25~26절)


성경 말씀을 언니 귓가에 들려주면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천국에 입성할 거니까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다. 많은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말하는 것을 부정이라도 타는 듯이 꺼린다. 죽음을 말하면 죽음이 곧 뒤에 쫓아올 것만 같은 무서움 때문이리라. 예전에 나도 그런 마음이었으니까. 그래서 죽음이란 단어를 될 수 있으면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나려면 자신이 들을 수 있게 말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때부터 죽음이라는 단어를 흔한 언어처럼 말하기 시작했고 지금은 죽음!이라고 외쳐도 아무렇지 않다.


요양병원에 입원한 언니는 면회 갈 때마다 조금씩 쇠약해졌다. 음식을 삼키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 안에는 희망이 사라지고 있음을 느꼈다. 내 마음은 이미 언니와의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마음이 급했다. 계속 언니에게 천국 소망을 심어주며 주님께 모두 맡기면 담대함과 평안을 주신다고 전했고 그럴 때마다 고개를 끄덕여줘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서울에서 목사님을 모시고 큰딸과 함께 요양병원에 입원한 언니를 찾아갔다. 결국은 병원 침대에 누워 하나님의 자녀로 살겠노라 고백한 언니가 병상 세례를 받는 엄청난 일이 일어났다. 세례식과 목사님의 기도가 끝나자 나는 언니의 손을 꼭~잡아주며, 

”언니,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축하해."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정희야 너도 기도해 줘.” 

난 감사의 눈물로 기도했다.

“정민이도 기도해 줘.” 

은혜 받은 자의 감사가 기도 요청으로 이어졌다. 그 순간 그곳은 환자의 신음 소리가 아닌 감사의 기운이 운행하고 있었다. 면회시간 20분이지만 1시간을 머물며 찬양하고 기도해도 면회 끝났다고 말하는 직원이 없었다. 천하보다 귀한 한 생명이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받는 일을 체험하면서, 나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았다.


세례 받은 날 밤부터 언니가 통증에 시달렸다는 연락이 왔고, 응급실로 이동했단다. 순간 생각했다 ‘하나님께서 언니의 고통을 이제 멈추게 하시려나보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들이 감히 생각도 할 수 없을 만큼 크고 깊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병상 세례를 받고 심상치 않다는 연락을 주고받으며 6일 만에 우리는 또 강원도로 날아가야 했다. 응급실에는 가족 한 사람만 면회가 허용된다는 통보였지만 못 들어가도 일단 언니 가까이에 있어야겠다는 생각에 목사님을 다시 모시고 영심이와 동해로 갔다.


하나님은 이미 모든 상황을 우리에게 맞추어놓고 계셨다. 병원 측 허락으로 가족 모두 응급실로 들어갔지만 언니는 눈을 감고 있었다. 여기저기 언니 몸을 만지며 

"언니! 언니! 정희 왔어, 영심이 왔어."라며 큰 소리로 불러도 고요한 숨만 내쉬는 언니. 감긴 눈에서 작은 눈물이 반짝였다. 

“원장님 여기서 예배드려도 될까요? 작은 소리로 할게요.”

마음껏 예배드리라는 병원장의 허락이 떨어지고 목사님의 인도로 눈물의 찬양과 기도로 예배를 드렸다. 찬양과 기도소리가 들리는지 언니 얼굴이 편안하게 변했다. 목사님은 응급실에 누워 있는 모든 환우들을 위해서도 기도해 주셨다. 응급실에서의 예배가 언니 장례 예배가 되고 말았다. 왜냐면 그러고 나서 3일 만에 돌아가셨으니까. 


그렇게 언니는, 언제나 고향을 지키던 우리의 큰 나무는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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