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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할수 Nov 10. 2024

44 년 만의 외출

버려진 강아지처럼

태수양복점 박스는 내가 결혼할 때 남편의 맞춤양복이 들어있던 상자다. 남편과 나의 추억이 담긴 상자이기도 하고 오랫동안 시어머님이 소중한 물건을 보관해 온 상자이기도 하다. 시어머님이 돌아가신 지 몇 년이 지났지만, 이 상자를 버리지 못했다. 며칠 전에 큰맘 먹고 버리기로 했다. 그래서 사진을 찍으면서, 44년이나 살아온 상자의 입장이 되어보았다.



난 맞춤양복 종이상자야. 태수양복점은 결혼을 앞둔 신랑들과 직장인들이 양복을 맞러 오는, 그 당시엔 꽤  잘 나가던 양복점이었어.  종이 상자에 불과한 나였지만, 자부심이 있었어. 두 달 후면 이 집에 온 지 44년이나 돼. 평생을 이 집 안방 반닫이 위에서 살았어. 바깥나들이 한 번 해보고 싶어. 이 집 맏아들이 결혼할 때 맞춘 고급 모직양복을 처음 안았을 때 얼마나 기뻤던지! 상자로 태어나서 한 첫 경험이자 최고의 경험이었어.

  

새신랑이었던 이 집 맏아들은 머리카락이 허연 할아버지가 됐어. 주인 할머니는 어디 먼 여행을  떠나갔는지 몇 년째 보이질 않아. 그때 일이 생각이 나. 할머니가 며칠 보이지  않아. 어디 갔나 궁금해하고 있을 때였어. 맏아들과 그의  아내가 장롱 속 할머니 옷과 이부자리를 꺼내 커다란 비닐봉지에  담아  나갔지. 반닫이 속 물건도 내가 품고 있던 할머니  한복도

     

이 집으로 올 때 노란 보자기 사이로 보았던 푸른 하늘이  보고 싶어. 살랑거리던 바람도 느끼고 싶어. 바람은 안아주고 싶은 게 있는데, 수 백개의 팔을 벌려 안아도 금방 흘러내린다는 거야. 양복에 뭐가 묻을 새라 구겨질 새라 품어 줄 수 있는 가슴이 있는 내가 부럽다며. 살랑살랑 나를 쫓아 이 집까지 왔는데. "언젠가는 다시 만날 날이 있겠지."라며 쓸쓸히 돌아갔는데.     


내가 상자로 태어난 기쁨을 알게 해 준 그 모직양복은 어디 있을까?  안아보고 싶어. 그 양복이 아니라도 좋아. 그게 무엇이든 안아 줄 수 있는 게 있다면! 이집 아들 부부는 한복을 꺼내 간 것이 아니라 내 삶을 송두리째 앗아간 거야.


새신랑 양복과 할머니 한복 이외에도 책과 서류 뭉지를 품고 있을 때도 있었어. 할머니 손자녀를 안고 있을 땐 사는 것 같았어. 이 아이들이 꼭 내가 낳은 자식 같았거든. 아무것도 품고 있지 않으면 상자라고 할 수 있겠어. 상자로 태어나서, 빈 상자로 살아가는 것은 말이야. 사람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며 얻어먹고 사는 것과 다르지 않아.  


새 신랑의  아내, 얼굴에 주름진 여자가 방으로 들어와. 나를 쳐다봐. 오금이 저려. 이런 눈빛, 처음 봐. 섬찟한  기분이  들어.  여자가 나를 두 손으로 집어  들어. 나를 방바닥에 내려놓아. 앞치마 주머니에서 네모난 물건을 꺼내. 여자를 힐끗 바라봐. 처음 보는 물건이라. 찰칵! 찰칵! 찰칵! 깜짝 놀라 심장이 쿵 내려앉아. 불길한 예감이 나를 휩싸.


내 얼굴을 쓰다듬으며, 나를 바라보는 여자의 눈길이 나를 바라보고 있지 않아. 결혼할 때 맞춤양복을 입었던, 도깨비 김수현 저리 가라던 남자를 떠올리는 걸까? 먼 여행을 떠난 뒤 돌아오지 않는 주인 할머니를 생각하는 걸까? 내 소원을 들어주려는 걸까?  조마조마한 속내를 들키고 싶지 않아 온몸에 각을 잡고 버티고 있는데. 여자가 나를  들고나가.  

   

햇살에 눈이 부셔. 바람이 내 몸을 어루만져. 반가워서 미소를 지으려는 찰나, 유리창 속에 내가 비쳐 보여. 얼굴이 꾀죄죄해. “에이, 이만하면 됐지. 비라도 맞는 날엔 그 길로 저세상행 기차를 타야 하는데. 평생  동안 세수나 목욕을 할 수 없는 종이 종족인데. 태어나자마자 듣는 소리가 물을 멀리 하라는 말인데. 나무에서  갈라져  나와  진화한 종족인데  왜 물을 가까이하면 안 될까? 나무는 물이 없으면 못 사는데. 내가 넋두리를  늘어놓고 있네." "44년 만에 외출을  했잖아! 이 얼마나 좋은 날이야!”    

 

나와 같은 종족인 택배박스가 마당 한가운데 널브러져 있어. 고개를 돌려. 푸른 하늘을 바라봐. 눈물이 날 것 같아. 갑자기 툭 소리가 나더니, 등뼈가 부러진 것같이 아파. 잠시 정신을 잃었나 봐. 눈을 뜨니 푸른 하늘이 보이고 나는 침대인 듯, 조금 전에 본 택배박스 위에 누워 있어. 여기가 어딜까? 고개를 돌리니 노랗게 퇴색한 신문지들, 전화번호가 적힌 닳아빠진 공책, 모서리가 너덜거리는 책들이 붉은 비닐 노끈에 묶여 있어. 모두 나와 같은 종족들인데, 오들오들 떨고 있어. 주인과 외출했다가 버려진 강아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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