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엣말, 이 중 한 두 가지는 참
속엣말, 이 중 한 두 가지는 참
“그래. 넌 마타이구나.”
거실 장판에 배를 깔고 숙제를 하다 살짝 받침이 헷갈렸을 뿐이다. '맏아이' 쓸 때 받침이 티읕 맞지? 손 닿을 거리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동생에게 물었다. 동생은 친절하고 간편한 대답 대신 대뜸 연음법칙을 써서 나를 마타이라고 부른다. 나쁜 년. 그냥 디귿이라고 알려주면 되지. 꼭 저렇게 쪽을 준다.
맏아이(o) -> [마다이]
맡아이(x) -> [마타이]
“넌 왜 제대로 기억하는 게 하나도 없어?”
동생은 잘 까먹지 않는다. 동생의 오늘에 내려앉은 과거의 잔상은 아프다. 살아있는 건 죄를 짓는 일. 나는 오늘 저지른 과오를 해결하기도 벅차 매일 더 많이 잊기 시작했다. 기억하는 것이 생각하는 것인 줄 모르고. 때로는 그 때문에 편히 잤다.
생각한다는 것은 빈 의자에 앉는 일
꽃잎들이 떠난 빈 꽃자리에 앉는 일
- 문태준, <꽃 진 자리에> 중에서
“살려니까 어쩔 수 없이 그랬지.”
욱했다. 들어주기 실패다. 그들에게 스스로의 가난한 삶, 보잘것없는 운은 언제나 내 것보다 더 큰 불행이었기에, 절대 내 것보다 더 큰 불행일 수 없었다. 같은 시기, 그들을 불쌍히 여기느라 혼자 인생의 고비를 넘는 동안, 그들은 변명이 늘었다.
화가 지나고 나면 나보다 가난했을, 나보다 보잘것없는 운을 가졌을 그들이 안쓰러워 가슴이 아팠고, 내내 나만 그들이 아픈 것 같아 억울했다. 왜 나는 받은 적도 없이 주기만 해야 하나 답답했다.
“큰 딸은 살림밑천이지.”
무슨 뜻인지 알았을까. 열 살도 안된 딸을 앉혀두고. 어쩐지 운명같이 느껴졌다. 서른 넘어까지, 이력서의 첫 문장은 '큰 딸은 살림밑천, 어릴 적부터 들어온 이 말은 저를 책임감 강한 어른으로 성장하게 만들었습니다'. 아빠는 내게 리드 문장을 주었다.
어느 날 어디선가 'K-장녀'라는 신조어를 들었을 때, 가슴이 철렁했다. 나만의 고통이라고 생각했던 날들이 부끄러웠으나, 내 고통에 비견할만한 것들이 그리 많을까 억울하기도 했다.
“너는 네가 뭘 해야 하는지도 모르잖아.”
왜 그에게 왜 헤어져야 하느냐고 묻고 있나. 의미 없는 관계가 된 지 오래됐는데. 하릴없는 물음이 또 다른 운명의 단초가 되길 거부하듯, 그가 말한다. 너는 네가 뭘 해야 하는지 모르는 게 문제라고. 이토록 똑똑한 남자라니. 역시 나보단 나은 사람을 만나야.
사랑이 없으면 일상이 조금은 건조해지는 것 같지만, 먹고사니즘이 바빠 이대로의 건조함을 선택한다. 이해하지 못했던 영화 <파이란>의 사랑이 어느덧 가슴에 들어온다. 공연(空然)한 믿음이 리얼한 삶을 버티게 하는 거다.
“우리 팀 에이습니다.”
거래처에게 나를 소개하는 팀장이 일처리를 두고 얘기한 거라 생각했다. 그가 빈말로 나를 칭찬했을까.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자꾸 마음에 걸린다. 밤마다 룸살롱에 들락거리던 그가 술이 덜 깨 한 말은 아닌지.
나이가 들어 만난 그는 전날의 술이 깨지 않은 걸까? 손을 떨고 있다. 그가 무슨 속으로 했는지는 몰라도 나는 안다. 지금도 그때도 그는 나에게 에이스가 아니다.
“나 예전에 정말 웃기지 않았냐?”
과거 세탁 중이다. 걸핏하면 주변 사람들에게 묻는다. 나 예전엔 정말 웃겼잖아? 백 번 농담하면 열 번 웃겼을까. 노력 대비 안 터진다. 그래도 나는 계속 묻는다. 나 예전엔 정말 웃겼잖아. 기억의 조작을 기대하며.
유머의 구사처럼 어려운 것이 없다. 그때의 맥락을 알아야 하고 청자의 상황도 고려해야 한다. 말의 목적을 가져야 한다면 그 첫 번째 목적은 웃음이면 좋겠다. 헛웃음처럼 인생과 잘 어울리는 것이 있나.
“저는 자빠지면 자빠진 대로 살아요.”
이따금씩 꺼내 씹는 말이다. 자빠진 대로 살았다는 그녀는 편안해 보였다. 자빠진 대로 살았다면 내 인생은 어땠을까. 아등바등하지 않았어도 비슷하게 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진흙더미에 나자빠져 온몸의 힘을 뺀 자신을 상상해 본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온라인 유머글. 왜 이런언냐들 있잖아. 생긴것도 반반허고 몸매도 S라인에 궁디역시 빵빵 하민서도팔자 만큼은 아주 드라운 팔자말여. 갤혼후 지금까지 자빠지면 코깨지고 고꾸라지면 뒷통수 깨지는 살자니 인생이요 뒤지자니 청춘인 그런팔자 말여.
“하루하루의 작은 성공을 기록하세요.”
아침 일찍 일어나 미라클 모닝 루틴을 했어요. 라테 대신 아아를 마셨어요. 평소보다 더 걸었어요. 보톡스 시술을 미루지 않고 한 나 자신 칭찬해요. 이 위기에서 빠져나오다니 러키비키잖아.
대의명분 없이도 소소한 목표를 세울 수 있다. 그게 문제인지도 모르고. 일단은 흘러가는 세월을 붙들기 위해 뭐라도 좋으니 써야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