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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진우 Jun 16. 2021

안 철학적이고 싶은 철학 에세이 - 죽음

죽음

  1년 전 쯤에 재밌는 과학 유튜브 영상을 하나 보았다. 시간에 대한 영상이었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시간이란 ‘흘러가는 것’이기보다는 이미 ‘펼쳐진 것’일 수도 있다는 내용이었다. 우리는 3차원의 존재인데 우리가 사는 공간은 3차원에 시간이라는 축을 하나 더한 4차원의 공간이며 때문에 우리는 시공간을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다. 이는 2차원의 원이 3차원의 구를 파악하는 과정으로 대입해보면 이해가 쉽다. 3차원의 구에 물감을 발라서 2차원 종이에 찍으면 조그마한 동그라미가 하나 생길 것이다. 더 나아가 그 구가 종이를 통과한다고 생각해보면 조그마한 동그라미는 점점 커지다가 중간을 지났을 땐 다시 작아질 것이다. 재밌는 점은 이 과정이 2차원의 원에게는 시간이 '흐르며' 동그라미가 커지다가 작아지는 것으로 보이지 않을까 하는 물음이다.

  자세한 설명은 글 끝에 남길 영상 출처로 확인하기로 하고, 아무튼 만약 시공간이란 이미 펼쳐진 것이라면 죽음의 의미도 새삼 새로워진다. 죽음이란 말 그대로 '시공간의 초월'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죽음 이후로 4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든, AI의 시대가 도래하든, 외계인 침공이 있든 그 모든 사건사고들은 죽음이라는 초월로 모두 한 순간이 된다(누구는 이 한 순간을 무의미하다고까지 말하겠지만 필자는 그러한 가치 평가는 하지 않겠다). 쉽게 말해 우리가 죽더라도 물론 인류는, 지구는, 우주는 몇 천 억 년이든 몇 억 광년이든 살아갈 수 있겠지만 그것이 마치 게임에서 'skip'버튼을 누른 것처럼 지나간다는 의미이다(부끄럽지만 개인적으로 필자는 이 생각에 미쳤을 때 소름이 살짝 돋기도 했다!).

  사실 보통 이러한 죽음의 초월성을 얘기한 후에는 으레 '그렇기 때문에 값진 우리의 삶', '이 순간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 '살고 싶은 대로 살아라' 등과 같은 주제를 꺼내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건 아니다. 단순히 지적 호기심으로 비롯한 글이고 그것만을 다룰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앞서 말한 죽음의 초월과 빅뱅이론이 만난다면 어떻게 될까? 빅뱅으로 인한 확장은 3가지 가능성을 담고 있다는 말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첫째, 계속 확장하다가 끝에 다다라 멈춘다. 둘째, 계속 확장하다가 끝에 다다라 도로 작아져서 원래 상태로 돌아간다. 셋째, 확장과 축소를 무한 반복한다.


  이중 세번째 가능성과 죽음이 만나는 것을 생각하면 슬슬 정신이 아득해진다. 수천억광년도 넘을 확장과 축소의 무한 반복의 역사 또한 내 죽음으로 초월되는 것일까? 아니면 그 반복 속에서 이번 시차와 같은 조건으로 우주가 다시 펼쳐지면 지금과 똑같은 역사를 시작하는 것일까?(이때부터는 자유의지의 영역에도 발을 걸치기 때문에 글에서는 주절거리지 않겠다.)

  물론 이런 생각을 어떤 태도로 받아들일지는 개인에게 달려있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누군가는 죽음의 초월성과 그 이후의 덧없음을 통해 삶에 대한 애착을 높일 수도 있고, 용기를 얻을 수도 있다. 이는 특히나 우리가 관계로서 이뤄진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의 삶을 주체로서 살기보다는 객체로서 산다고 평가할 것이다. 그러나 관계편에서도 말했듯이 이것은 당연하고 또 인간으로서 필수적인 것이다. 물론 정도의 차이가 중요하겠지만, 사실 우리가 말하는 주체, 객체가 과연 어디 있으며 어느 것이 중점적인지 어떻게 판단할 수 있겠는가. 주체라고는 하지만 나라는 사람도 탄생과 동시에 선택하지 않은 환경에 놓여 길러진다. 유전 또한 엄밀히 말하면 내 부모와 조상에게서 내려온 것이다.

  하이데거는 죽음이란 초월이며 이때의 초월은 관계에서의 그것이라 말했다. 그리고 인간은 자신의 죽음에 대해 사고해볼 수 있고 이를 통해 관계에서오는 규정을 잠시 끊고 진정한 자신을 바라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 말은 굉장히 그럴듯 해 보이고 실제로 부분적으로 맞기도 하다. 하지만 '진정한 나'라는 것은 없다. 만약 그것이 어떠한 외부적 요인을 배제한 순수히 내제적인 것을 의미한다면 말이다. '나'를 만드는 것은 순수히 외부적인(유전 포함) 것들의 짬뽕이다. 셀 수 없이 많은 요인들이 엮이며 생기는 무수한 가짓수들이란 의미이다. 그렇지만 우린 때때로 그것들을 분리하려 한다.

  내가 하는 모든 선택은 엄밀히 말하면 모두 '내 선택'이다(물론 극단적인 상황의 경우, 생명이나 생계와 같은 것이 위협받는 경우엔 예외가 있을 수도 있다). 거절을 잘 못하는 사람은 주체적으로 살지 못하는 걸까? 냉정하게 말하면 그것 또한 그 사람의 성격이자 나름의 장점을 갖고 있는 메커니즘이다. 그러니 나의 선택인데도 불구하고 내 선택이 아니었다는 생각에 스트레스 받지 말자. 조금 더 나 다움을 표출하기 위해 긴장해있지 말자는 것이다. 스트레스 받고 긴장해있는 나도 나 아니냐고? 맞다.

  그래서 죽음 주제로 한 마지막 에세이에서 나는 입을 다문다. 에세이의 서문에서 했던 말도 결국 "건방 떨지말고 알아서들 그냥 살자."였다. <안 철학적이고 싶은 철학 에세이>라는 것은 굳이 뭐라뭐라 말하기 싫다는 것이다. 그런 것 치고는 여러 주제로 열심히 떠들었지만 말이다. 다만 균형만 잘 맞추면 좋겠다.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인식하지 못하더라도 자연스레 균형을 맞추려 계속 움직이겠지만 그래도 인식하고 조금 덜 비틀대며 하는 게 더 좋지 않겠는가. 아무쪼록 여기까지 읽어주신 사람이 있다면 감사하다. 에세이는 여기서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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