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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 May 19. 2024

0519


Vanishing Empire Season III_03 / For Klimt / Whale & Typhoon



밤은 본질적이고 

나는 또 멍에를 말하련다 


간헐적으로 흐르는 비프음은 도시의 악습이다.

겨울에서 진전이 없는 이계의 고요한 소동

멈춘 화면 속으로 천둥이 친다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은 

동사의 품에 이르러 비로소 숨이 멎고     


아껴둔 절망을 주우러 다니던 너는 

연역의 고리에 손가락이 꺾였지


꽃은 피고 

비가 왔고 

고양이는 중성화되었으므로

우리는 5분 이상 착해졌어요


지구가 육중한 몸을 비틀어 계절을 살필 때,

나무는 몸을 털고 

나신을 우주로 뻗는다

그리운 모든 기억을 향해 






한 연 또는 몇 행을 생략해버린 시를 쓰는 이유는 그것을 드러낼 용기가 없어서일 것이다. 작고 가볍고 일상적인 것은 무척 소중한데, 묘사를 하다 보면 뭔가 견딜 수 없는 감정이 들고 호흡이 가빠질 때가 있다. 


자신의 진짜 이야기를 하기엔, 시간이 너무 이르다고 나는 생각한다. 사람들은 그걸 참지 못하고 섣불리 이야기를 시작하지만, 그건 훌륭한 방식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쩌면 이야기를 영원히 못할지도 모른다. 슬픔에 형식을 부여하는 것은 지나친 가식이고, 그것은 진실 또는 치유와는 하등 관계없는 또 다른 유형의 페르소나로 존재할 뿐이다. 카타르시스를 주는 모든 장르엔 기계적 설정이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은, 진리와 진리를 표현함에 있어 그것을 관장하는 존재와는 무척 모순적인 가치를 지닌다.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지?'





그리하여 사진을 찍을 때에도 미필적 고의의 방식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나의 책임을 셔터를 누르는 손가락의 순간에 살짝 양보하는 것이다. 순간을 움켜쥐면, 그것이 시간이 흘러 빛을 발할 때까지 묵혀두는 방식은 꽤나 효과적이다. 감정 또한 묵히고 묵힐수록 그것의 진면목을 볼 수 있으므로. 트리거 없는 서사는 너무 시시하지 않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약한 자들에겐 보호장치가 필요하다. 일단 그것에 눈길을 뺏긴 사람들 앞에서는 발가벗은 모습이 숨어있는 몇몇 장면쯤 자연스럽게 연출할 수 있다. 그것으로 몰래 안도한다. 들킬까 걱정하면서 동시에 들키길 바라면서. 



 


묻어버린 사진이 생각나는 밤이다. 

촉촉이 내린 비의 감상에 젖어 10여 년 전의 추억을 들추어 보다가 그날의 기분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사진을 찍은 후 물이 튀어 소매를 적셨던 일이라던가, 뷰파인더 속으로 재빠른 속도로 지나가던 비둘기라던가, 생일노래를 부른 후 케익을 4등분으로 할지 8등분으로 할지 고민하던 일이라던가. 무수히 많은 사진 밖의 일들이 사진 안에서 흔적을 드러내고 있다. 사람의 기억이란 어쩌면 손으로 쥐면 한 움큼도 되지 않을 것이다. 전쟁이라던가 대통령 당선, 연예인의 결혼 등 기록된 역사적인 수많은 사건사고에 대한 기억이 나에 대한 사소한 기억보다 더 방대하지 않은가. 국가적 차원의 수억 달러 원조를 받았던 기억보다 내 손에 작은 사탕을 쥐여주던 어린아이의 눈빛을 상기할 때 나는 좀 더 따스한 위안을 받는다. 공유하지 않은 기억. 피부로 느낀 기억. 그날의 날씨, 그날의 대화, 웃음소리, 커피향기, 시선을 돌렸을 때 마주쳤던 고양이의 눈빛.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의 역사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프랑스 혁명, 코소보 사태, 위화도 회군만큼이나 중요한 '나'라는 사건을 기록할 필요가 있다. 외부를 향한 시선이 흔들리는 동안 나를 굳건히 지켜주는 것은 내부에 쌓인 기억이 아니던가. 자신을 기억하는 자가 단단하다. 무심코 펼친 사진첩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들어갔다가 나왔을 때, 아까완 달라진 나를 발견하게 된다. 내가 무엇이었는지 내가 누군지 기억하고 떠올리게 된다. 망각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나를 떠올리기 위해, 망각의 블랙홀에 함몰되지 않고 사건의 지평선에 머물기 위해, 그리하여 온전한 나로 남기 위해 시시한 사진들을 계속 찍어나가야 한다.      





속성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 지점이 관점과 분리되는 순간을 맞이한다. 

우리는 어느 날 나무, 돌, 얼음, 구름 등에 눈길을 빼앗겨 예상치 못한 시공 속으로 의식이 빨려 들어갈 때가 있다.

익숙함과 낯섦이 원심분리되어 각각의 형태소로 올곧게 존재하는 시공간.

또는

나의 의식이 시선의 이형태로서 상보적 관계를 완성해나가는 과정.

또는

삶이 다 비슷하더라도 모든 너와 나는 '와'를 사이에 두고 마찰과 열이 발생한다는 진실.      





이재의 사진에 관하여, 사적인, 정밀하지 않지만 세부적이라는 희박한 자존심에 목매는, 부제가 긴, 꼬리가 길면 잡히는, 잡혀도 살아남기 위해 꼬리를 더욱 길게 늘어뜨리는, 먼 꼬리 끝에 달린 방울을 흔드는,


사진이 너무 많아서 글을 쓰기로 합니다. 무엇을 쓸까 하다가 사진을 쓸까 합니다. 저는 사진가...이고 싶어서요. 사진? 또 사진? 동어반복이 난무하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짧게 써야겠습니다. 반복을 타파할 수 있는 방법 또는 반복이더라도 흥미를 돋울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합니다.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을 인용할까. 윌 스티어시의 '찍지 못한 순간에 관하여'를 참고할까. 이젠 고전이 되어 어쩌면 누구도 찾지 않는 롤랑 바르트의 '카메라 루시다'를 얘기할까. 수전 손택의 '사진에 관하여'에서 힘을 빌릴까. 


내가 하는 많은 생각들이 이미 표현된 것이라는 생각은 수많은 예술가를 두려움에 떨게 합니다. 그리하여 예술가들은 복습과 예습을 합니다. 가능하면 철저히 합니다. 그것이 반복이 되더라도 동어 반복이 되지 않고 변주할 수 있도록 노력합니다. 흔히 예술은 현실의 모방이라고 할 때, 그 '모방'이 어쩌면 '모방의 모방'으로 어느 정도 부정적 해석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이, 그것이 모방에 그치지 않고 현실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믿는 사실보다 어렵지 않다는 걸 인정하기에, 예술이 가지는 안락함과 권력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우리-함부로 우리라고 해서 송구합니다만-는 그런 성향의 천재가 아니거든요.


미술관 측의 의뢰로 1억을 받은 후 빈 액자를 제공했다는 어느 개념미술가를 생각합니다. 그는 그 순간 할 수 있는 게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예술이 가능하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 그 자신의 예술혼을 태워 비루한 '금전적 인정'을 받는 것보다는 더 아름다울 거라고 여겼는지도 모릅니다. 논란이 예술을 아름답게 하는지, 논란이 예술을 더 예술답게 하는지 저는 모릅니다. 강력한 메시지에는 강력한 책임이 따르고 그것은 예술이라고 해서 예외가 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사회적 예술가이자 시대적 예술가입니다. 똥을 싸도 좋아하게 하기 위해서는, 똥을 싸도 좋아할 만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 이것이 고전적인 방식의 예술이었다면 현대의 예술은 똥 먼저 싸고 봅니다. 저이는 똥을 쌌으니 똥을 쌀만 한 인간이야라는 논리의 역전 현상은 비단 예술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겠습니다. 정답은 없지요.


사진가들은 표현하고 싶은 순간을 만났지만 셔터를 누를 수 없는 상황에 누구나 맞닥뜨립니다. 다양한 이유로 말이죠. '그 사진은 내 것이 아니야.'라는 자기극복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행착오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상기 나열된 책에도 나오고 역사 속에서도 되풀이됩니다. 생각이 작품 활동을 방해하고 작품 활동이 생각을 방해하는 지경에 이르러서 예술은 남루해지고 비루해지며 또한 숭고해집니다. 우리 일상은 사실 대단하지 않고 초라합니다. 점심으로 라면을 끓여먹고 앞서간 위대한 예술가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삶 또는 죽음이 나에게도 일말의 위안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작은 땀방울 속에 깃든 예술혼을 사랑합니다. 그 외에는 사족입니다. 


우리-우리라고 해서 송구합니다-는 조금 웃고, 또 걷지요. 





이미 썼던 것을 되풀이하는 과정과, 그 사이에 새로운 것을 살짝 섞어두는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하면서 새로운 것을 써나가는 과정을 되풀이한다. 두터운 기록이 될 수 있을까. 이 장면을 어디선가 본 듯한 데자뷔를 느낀다면, 나의 방식이 성공한 것. 





사진을 감상하는 다양한 시선을 생각합니다.

예술을 대하는 각양각색의 태도를 생각합니다.


표본으로서의 사진과, 상징으로서의 사진,

그리고 은유로서의 사진이 맞닿는 어느 지점에서

우리는 만날 거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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