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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훈느 Oct 06. 2021

오래된 이발소의 반전 비밀

미안하다 몰라봐서. 상해의 힙한 스피크 이지 바 BAR FLOW

베이글 샌드위치 집이나 그 근처 젤라또 가게, 만두가게를 지나칠때마다 신경쓰이는 가게가 유독 하나 있었다. 오밀조밀 소품샵이며 카페며 과일가게 같은 작은 상점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그 거리에 있는 듯 없는 듯 하던 그 가게가 갑자기 눈에 띈것은 어느날 밤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다 였다. 

헤어 살롱이란 레트로한 네온사인

낮에는 먼지 낀 낡은 초록 셔터가 내려져 문을 열었는지 공실인지도 알지 못할 가게 입구에 화려한 네온사인 간판이 켜진 걸 보고 그때서야 느낌이 왔다. '이거 뭔가 있구나.' 셔터 너머에 있는 이발소 간판과 의자, 삐뚜름하게 붙어 있는 장만옥 포스터마저 노멀해 보이지 않는다. 상해에 몇 있는 스피크 이지 바 중에 하나 일 것만 같은 생각에 모바일로 주소 검색을 재빨리 해 본다. '빙고!' 이 곳이 바인걸 알고 나니 기분이 들뜬다. 분위기 있고 인기 있어 보이는 엄청난 곳을 발견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흐뭇하게 간판을 다시 바라본다. 정신을 차려보니 과하게 화려한 울긋불긋한 HAIR SALON 이란 네온 위에는 이미 BAR FLOW 라는 글자가 당당히 적혀 있다. 이미 다 나와있는 정답을 가지고 난 그순간 대체 왜 대단한 것이라도 발견한 양 의기양양했던거지? 


겉모습은 술집같지 않지만 비밀스러운 통로나 출입문을 통해 들어가면 새로운 공간이 펼쳐지는 스피크 이지 바 (Speak Easy Bar) 에 매력을 느껴 프랑스 조계지로 통칭되는 상하이 헝샨루 (衡山路) 일대의 유명한 바들을 전전했던 나인데 집 근처에 이런 공간이 있었다니 횡재한 느낌이다. 

이발소 의자와 환영한단 메시지만 있는 휑한 입구(欢迎光临)

심지어 - 평일이라 그런 것 같지만 - 예약도 어렵지 않게 되다니 당장 동네 친구와 시간을 맞춰 약속을 잡았다. 지난번 갔던 바버 샵 이라는 바는 바버샵으로 꾸며진 안쪽 벽장이 출입문이었는데 여긴 어떨까, 안으로 들어가면 중후한 느낌일까 아니면 완전 다른 새로운 분위기일까 이런 저런 상상을 하다 보니 약속 날은 빠르게 다가왔고 어둑한 골목에서 초록, 빨강 불을 내뿜는 네온 간판 앞에 어느덧 친구와 함께 서 있었다. 너무 기대된다며, 완전 힙스터 공간일 것 같다며 언제나 '힙함' 을 부르짖는 친구의 목소리는 이미 들떠 있었다. 에이 너무 기대하지 말라고, 우리 그냥 재밌게 한잔 하고 오는걸 목표로 하자고 진정시키는 내 목소리 역시 만만치 않게 들떠있었다. 삐뚜스름한 장만옥 포스터 옆에 냉장고 문이 어쩐지 비밀 입구일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힘주어 밀어보니 벽 안으로 밀린다. 오예!!!


코로나 감염이 아니라는 건강 코드와 예약자 이름, 휴대폰 뒷자리를 확인하고 나니 응접실 같은 내부 공간에서 또 다른 안쪽 공간으로 직원이 안내한다. 그대로 쭉 올라가면 된다고 말하는 말을 등뒤로 대충 흘려 들으며벽 너머를 보니 세상에. 완전 딴세상이다. 

사진으로는 그 퇴폐적인 분위기를 다 담기 어렵다.

벽 너머의 어둡고 좁은 복도 하나가 붉은 네온사인으로 장식된 계단으로 가닥 차 있다. 출근하면 잠자고, 퇴근하면 술마시고 (上班睡觉 下班喝酒) 라는 글자가 계단 칸칸마다 쏟아져 내려오는데 글로 쓰는 지금이야 그냥 이렇게 멋있었다고 얘기하지만 그때 당시엔 계단 한 단을 가득 채운 글자들의 폭포에 정말 숨이 멎을 것 같았다. 디지털 아트 전시장에서 온 공간을 채운 레이저 아트를 본 느낌, 암막 속에서 갑자기 폭죽이 터진 것 같은 느낌. 분명 고급스럽고 세련된 분위기는 명백히 아니고 오히려 복고적이고 퇴폐적인 분위기. 옛 느낌, 디스코, 롤러장, 복고풍의 소품들에 큰 매력을 느끼는 나이기에 흔히 정육점 조명같다고 하는 붉은 글씨의 파도 속에서 아직 술은 한모금도 안마셨는데 샷 몇잔을 거푸 들이킨것처럼 이미 심장이 요동치며 뛰고 있었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 자리를 잡으니 투명한 플라스틱 비누곽에 마른 안주를 담아 바텐더가 내어준다. 워낙 어둡고 온통 채도 높은 빨간 조명이 흩뿌려진 탓에 사람과 사람, 물건과 물건의 색을 감별하기 어려웠다. 꽤 시끄러운 음악이 흐르고 있었고 쉐이커 흔드는 소리도 작지 않았지만 빨간 조명에 청각이나 후각같은 다른 감각이 기능을 잃은 느낌이었다. 무심하게 바 테이블에 놓인 마오타이와 분명 형광등 아래에서 보면 알록달록 총천연색이었을 빨대 더미 사이에서 한참만에 겨우 메뉴판을 찾는다. 끈적하고 퇴폐적인 업장 분위기와 달리 메뉴판 속엔 알록달록 만화 라벨이 붙은 소다병에 담긴 칵테일, 꽃무늬가 그려진 레트로 유리컵에 담긴 오렌지 주스 같은 칵테일, 클래식 유리병에 담긴 칵테일 같은 아기자기한 외관의 칵테일 사진이 가득하다. 몇가지 있는 안주 중 옛날 느낌의 끓인 라면이 하나 있어 궁금했는데 이런 분위기에서 그릇에 코를 박고 후루룩 거리며 국물을 들이키는게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스킵하고 그중 가장 특이해 보이는 굿모닝 칵테일(早上好) 과 만화 라벨이 붙은 소다병 칵테일을 주문한다.

좁고 긴 공간 가득 붉은 조명만이 가득하다

 비율을 맞춰 재료를 담고 쉐이커를 흔드는 바텐더 너머엔 계단에서처럼 출근하면 잠자고, 퇴근하면 술마시고 (上班睡觉 下班喝酒) 라는 글씨가 거대하게 네온사인으로 박혀있다. 좁다란 계단에서부터 메인 바 테이블까지 모든 공간이 잠은 내일 자고 오늘은 그냥 마시면 된다고 끈적하게 유혹하며 귓속말 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좁고 긴 테이블에 손님은 우리 뿐이고 더 올 손님이 앉을 자리도 서너개 뿐이 없어 보인다. 이 멋진 공간에 우리 둘뿐이란 생각에 신이 나서 이리 저리 친구와 사진을 찍어봤지만 남은건 눈코입이 뭉개진 뻘건 우리 얼굴 뿐이라 이내 포기하고 비누곽에 담긴 마른 안주를 집어 먹는다. 짭잘한 볶은 잠두콩과 조미 완두콩, 찹쌀을 묻혀 튀긴 동글동글한 과자들이 입안에서 와사삭 바사삭 터진다.     


암바사나 밀키스가 생각나는 희뿌연 소다병 칵테일이 먼저 서빙된다. 나지막한 보틀과 함께 내어준 꽃무늬 유리잔에 따라 먹으면 된다고 한다. 유리잔 모양새가 어쩐지 익숙하다. 꽃무늬 반대편을 뒤집어보면 썬-키스트 나 서울우유 라고 옛스런 글씨체로 로고가 써있을 것만 같다. 따라보니 가볍게 보글보글 거품이 인다. 정말로 밀키 소다 같은 외관이다. 희뿌연 푸른색 액체인것 같지만 이 공간에서 정확한 색을 유추하는 것은 너무 어렵다. 그냥 그럴 것 같다고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알록달록 사선 무늬가 그려진 빨대로 가볍게 빨아먹어보니 아 뿔싸. 귀여운 외관에 그렇지 않은 강렬한 알콜 맛이 목젖을 탁 치고 들어온다. 

갑자기 블랙 핑크의 뚜두뚜두 가사가 머리속에 주르륵 떠오른다. '착한 얼굴에 그렇지 못한 태도 가녀린 몸매 속 가려진 볼륨은 두 배로.' 상큼한 소다 맛으로 시작해 식도와 내장 위치를 알 수 있을만치 강렬하고 뜨거운 술기운이 들어오는게 반전이 상당하다. 와 이거 생각보다 세다!! 하며 놀라던 차에 굿모닝 칵테일이 서빙된다. 양치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비주얼이 재미있어 시켰는데 메뉴판 속 그림과 꼭 같게 생긴 음료가 나오니 와 여기 음식으로 사기 안치네 하는 생각이 들며 인증샷을 찍는다. 유리잔 위에 무심하게 얹어진 치약 바른 칫솔. 치약으로 보이는건 크림이니 술과 함께 천천히 먹으면 된다고 바텐더가 속삭인다. 친구와 나누어 마셔보니 이 아이도 상큼한 외관에 그렇지 못하게 거의 폭력적인 알콜 맛이 확 올라온다. 반전 매력이 상당하다. 와 여기 생긴거랑 다르게 완전 매운맛, 마라맛 칵테일들이라고 하며 메뉴판을 자세히 읽으니 그제서야 베이스와 도수가 눈에 들어온다. 대부분이 백주나 보드카 같은 독한 술을 베이스로 만들어져 30-40도는 가볍게 넘는 칵테일들이다. 주량이 그닥 좋지 않은 친구와 내가 잔을 다 비우고 나니 목과 귀가 달아오르고 말이 느려진다. 호기심에 가득찼던 눈은 이미 아까전에 다 풀렸다. 빨간 방에서 나와 눅눅하지만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골목길 노점 국수집에 들어가 해장 훈툰을 주문하니 그제서야 벌개진 눈과 얼굴을 한 우리 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와 우습다. 홀홀 빨려 들어오는 훈툰을 호호 불어 먹으며 우리는 말한다. 오늘 너무 멋있었다고. 진짜 핫플을 발견했다고. 양념을 그득 얹어 고추기름이 둥둥 뜬 국물을 들이키며 묻는다. "다음엔 또 어디 가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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