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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훈느 Oct 12. 2021

기분을 업시키는 사치스럽고 아름다운 한 입 거리들

자존감을 무장하고 싶은 날엔 오마카세 코스를

 가끔 그런 날이 있다. 자존감이 떨어져 나 자신조차 내 편이 되지 못할 것 같은 때. 남들이 지나가며 하는 소리가 괜히 아프게 들리거나 -악의 없는 말이었지만- 괜히 찔려서 이기도 하고, 스스로에게 만족하지 못하는 나 자신 때문이기도 하지만 원인은 중요치 않다. 그런 날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기분이 반나절 이상 가지 못하게 만드는데 온 정성을 쏟는게 제일이다. 가장 쉬운 방법은 더이상 부정적인 생각이 들 여유가 없도록 몸을 바삐 움직이는 것이다. 오래도록 해온 취미인 수영이나 달리기, 웨이트 트레이닝을 아주 높은 강도로 하거나 쉴새 없이 웃기는 영상을 연달아 보며 사이클을 탄다. 그래도 기분이 덜 풀리면 집안일을 한다. 창문을 열고, 곰팡이 제거제를 타일 줄눈마다 뿌린 뒤 빨래를 돌리며 청소기를 돌린다. 냉장고 청소도 하고 목요일마다 청소 해 주는 아줌마가 방문하지만 재활용 쓰레기와 음식물 쓰레기도 비워버린다. 방청소와 빨래가 끝나면 건조기를 돌리며 화장실 줄 눈 마다 뿌려놓은 약에 물때와 곰팡이가 녹아나는데 샤워를 하며 오래도록 정성스럽게 화장실 청소도 한 뒤 편한 잠옷을 입고 소파에 앉아 머그 하나에 가득 내린 커피를 마신다. 보통 가벼운 우울감은 이정도 단계에서 금방 사라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라지지 않는 깊은 우울감이 있다. 나는 이 상태를 일명 '바닥을 치는' 또는 좋아하는 아티스트 아델의 노랫말을 빌어 'rolling in the deep' 단계라고 표현하는데 이때엔 앞선 기분 업 단계에 이어 약간의 현질이 필요한데 나의 경우엔 물욕은 생각보다 별로 없어 사고 싶던 물건을 '스스로에게 선물하는 것' 보다는 극진한 한 끼를 예약하거나 고급 스파에서의 90분 이상 마사지 코스를 예약해 다녀오는 편이 훨씬 더 효과적이다. 

상하이에서의 첫 오마카세

시간이 너무 늦어 식사를 하거나 마사지 하는게 부담스러울 때에는 바에 들러 비싼 위스키를 얼음 없이 시켜 코를 박고 입안에서 살살 굴리며 먹는것도 괜찮은데 그래도 근사한 레스토랑에 가서 긴 코스요리를 먹는게 제일 위력있다. 이런 때엔 친구들을 대동하지 않고, 평소보다 '과하게' 꾸민 뒤 혼자 가는 편인데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여러명이 시켜먹기 좋은 중국 요리는 제외하게 된다. 주로 이탈리안, 프렌치, 스페인 3가지로 나뉘는 양식도 잘 도전하지 않는다. 스페인 타파스는 양은 적당하지만 술을 많이 마시게 되어 제외, 이탈리안이나 프렌치는 밀가루, 튀김, 다량의 육류를 소화하는데 오랜 시간이 필요하고 기분이 나쁘면 소화 능력도 떨어지는 편이므로 제외한다. 나 자신에게 집중해 우울감을 떨쳐내기 위한 식사를 해야 하므로 삼삼오오 모여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나는 브런치 식당도 제외한다. 그러고 나면 남는 선택지가 정말 많이 줄어드는데 그때 주로 찾아나서는게 스시 바 이다. 날 것을 잘 먹지 않는 중국에서 스시라니. 처음엔 예약을 하면서도 믿음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5점 만점에 4.9점대인 높은 평점과 의외로 만석인 날이 많아 예약하기 어렵다는 점에 흥미가 생겨 스시 집들을 눈여겨 보고, 그 중에서도 오마카세 코스가 있는 집들 리스트를 추려 방문하기 시작했다. 위쇼우 (鱼狩) 도 그 중 하나인데 중국에서 도전한 첫 오마카세 라는 점에서 내게 의미가 있다. 


 여길 가는게 맞을까. 그냥 와이탄에 있는 프렌치 레스토랑에 갈걸 그랬나? 그래도 초밥 안먹은지 오래되었으니 그냥 가볼까 긴가 민가 해 하면서 찾아간 위쇼우는 예쁜 카페나 바가 가득한 헝샨루(衡山路) 근처 지엔궈시루(建国西路 건국서로) 에 있다. 번화가와 가깝지만 한 발 물러나 있는 작고 조용한 길이다. 지금이야 너무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이지만 그때만 해도 길이 눈에 익지 않아 건물 사이에 작게 숨겨진 집 간판을 찾지 못하고 한참을 헤맸는데 안그래도 자존감이 땅에 떨어져 있고 늦여름 더위에 땀을 뻘뻘 흘려 짜증까지 나 있던 터라 와 이제 지도를 눈앞에 놓고도 길 하나를 못찾는다며 절망했다. 왜 690길 다음이 692인지 모르겠다고, 나는 691번지를 가야 하는데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며 먼지 탄 건물 사이를 오가다가 예약시간을 꽉 채워 겨우 작은 입구를 찾아 들어가니 카운터 석에 내 이름인게 분명할 金小姐(Miss Kim) 으로 시작하는 카드 하나가 나를 반겼다. 

예약 손님 자리를 표시하는 간단한 카드

목덜미에 끈적한 땀과 헤어 라인을 타고 약간 녹은 화장을 물수건과 티슈로 닦아내며 주위를 둘러보니 정갈하기 짝이 없다. 여름에, 중국에서, 일식을 먹다가 노로 바이러스라도 걸리는 거 아닌지 걱정했던 내가 우스울만큼 깔끔하고 정돈된 조리대 앞에서 앳된 얼굴의 주방장이 가볍게 인사하며 알러지나 못먹는 식재료가 있는지 묻는다. 눈앞에 있던 빈 잔엔 어느새 소리도 없이 뜨거운 차가 채워져 있고 또 잠시 둘러보다 보니 소리도 없이 손을 닦은 물수건이 치워져있다. 최고의 서비스는 내가 생각할 틈 없이 모든걸 챙기면서도 부담을 주거나 눈에 띄지 않는 거라는데 이런게 바로 그런건가 싶다. 약간 저렴한 가격에 다른 요리 없이 초밥만 나오는 초밥 코스와 오마카세 코스 중 무엇을 택할건지 묻는 기모노 입은종업원의 질문에 나는 주저하지 않고 오마카세 코스와 맥주 한잔을 주문하고 앞접시에 와사비와 소금이 뿌려지는 모양을 구경한다. 살갗에 끈끈하던 땀은 어느새 식어 있고 서늘하게 서빙된 맥주도 상쾌하다. 호사스럽게 트러플과 금박을 얹은 계란찜, 흰살생선, 단새우, 기름진 참치, 등푸른 생선 조각들이 줄지어 나온다. 

섬세하게 조율된 사시미들

어떤 조각은 그냥 먹으라고 하기도 하고, 어떤 조각은 소금을 조금 찍어 먹으라고도 하고 생각보다 섬세한 지도에 이끌려보니 어느새 초밥이 서빙된다. 초밥 역시 잔칼질을 하거나, 큼직한 칼집을 비껴가며 넣거나 한것이 피스 하나하나마다 기교를 많이 부린 느낌이다. 어떤건 가볍게 토치질을 해 기름짐을 극대화 하기도 하고, 어떤건 청귤 껍질을 갈아 뿌리기도 하고 또 어떤건 내 앞접시에 있는것과 다른 종류의 소금을 뿌리기도 하고, 마끼엔 성게알과 연어알을 얹어 호화롭게 장식하기도 해 보는 재미가 상당했다. 위쇼우(鱼狩)의 초밥들은 하나 하나가 극도로 장식적이고 아름다우며 화려했다. 적지 않은 돈인 1,380 위안을 쓰고 온게 아깝지 않은 사치스러운 한입들이었다.  


 covid-19가 한풀 꺾여 야외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아도 되지만 하늘길은 막혀 간간히 찾아오던 친구도, 가족도 전혀 만날 수 없던 때였다. 익숙해진 불편함이었지만 이 상황이 나아지지 않을 것 같다는 절망감에 매우 기분이 좋지 않았다. 집에 더 있으면 위태로울 것 같은 예감에 가고 싶던 식당들을 살펴보다가 눈길이 머문 곳은 쇼우스샤오포(寿司小波, 스시 샤오포). 小波, 작은 파도 라는 뜻이다. 마음에 파도를 일으켜 볼까 하는 단순한 생각으로 이곳에 가보자고 한다. 당일 예약도 되는지, 자리가 있는지 전화로 물어보니 한자리 남은 자리가 있다고, 30분안에 도착할 수 있는지 묻는 말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문을 박차고 나선다.

 안푸루(安福路) 초입 큰길에서 자세히 벽을 훑어보다 보면 자그마한 나무 팻말이 보이는데 누렇게 바래진 종이가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던 것 같다. 당일 예약에, 예약시간이 임박해 방문한건데도 자리는 말끔하고 단정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자리에 앉자 마자 뜨거운 차를 내오며 왼쪽 눈 밑에 하트 모양 비즈를 붙인 귀염성 있는 얼굴의 종업원이 술을 마실지 묻는다. 반병씩 주문할 수 있는 사케를 시키니 뜨겁게 마실지, 차갑게 마실지 물어 온다. 반병을 차갑게 해서 먹겠다고 하자 잔 얼음이 가득 찬 유리 볼이 세팅된다. 얼음이 녹으면 다시 새 얼음으로 채워 가져오는데 민첩하고 빈틈 없진 않지만 적당히 인간적이고 친절하다. 

가운데 새우를 마지막으로 먹는다

 그냥 점심 특선, 초밥 특선, 오마카세 3가지 메뉴가 있는데 초밥의 피스 수와 초밥 외 요리의 갯수 차이라고 한다. 1,000위안 미만으로 점심시간에 방문하면 비교적 합리적인 가격에 오마카세 코스를 즐길 수 있다. 물론 싼 편은 아니지만 그냥 다른 집에 비해 그렇다는 뜻이다. 스시 샤오포의 초밥은 생선 살 한점 한점 정성스레 칼집을 넣고 기교를 부리기보다 정직하고 푸짐한 편이다. 두툼하게 썰린 생선살과 간이 강한 초밥은 약간 투박한 느낌까지 들 지경이다. 하지만 초밥이 서빙 되기 전 입맛을 돋우는 용으로 나오는 요리 하나만은 섬세하게 배열된 접시에 담겨 한 상으로 나온다. 재료와 요리법 설명 뿐 아니라 어디서부터 시작해 어느 방향으로 순서를 맞추어 먹을지까지 안내해주는데 집반찬 같은 간단한 해초 무침, 채소 무침들인데도 감칠맛이 상당하다.           


다음은 가장 기대 없이 갔다가 찐찐찐 단골이 되어 온 곳이다. 연말, 개고생 하며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고 생각했는데 눈에서 멀어져서 인지 직원 평가가 그저 그랬다. 나와 함께 일한 파견인 3명은 스스로들도 놀랄 과분한 평가를 받았는데 무리에서 가장 열일한걸로 여겨지는 내 평가는 실망스럽기 그지 없었다. 팀에 누구는 승진 대상자고, 누구는 작년 승진 누락이니 일단 이렇게 할 수 밖에 없었고, 고생한 건 잘 알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음 해엔 어떻게든 꼭 보상해줄게. 하는 팀장의 효력 없는 약속을 수화기 너머로 대강 흘려 듣는데 바보같게도 화가 치밀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높은 평점의 스시 시즈카

 대부분 일찍 퇴근한 빈 사무실을 둘러보니 나 홀로 보낼 연말 연시가 피부로 더욱 와 닿았다. 코막힌 목소리로 예약 전화를 힘들게 마치고, 오늘 기분도 꿀꿀한데 어디 맛있는거 먹으러 갈까요? 하며 묻는 동료들의 어색한 한마디를 뒤로 한 채 찬 공기를 가로지르며 자전거로 도착한 스시 카쿠레(鮨隐·笑鱼)는 구시가지인 大世界(대세계) 근처 云南南路(윈난난루, 운남남로) 에 위치해 있었다. 사방에 훠궈집과 노점, 아주 오래된 국수집들이 즐비하고 온 사방이 공사판인 곳이라 솔직히 이걸로 지금 이 기분을 충분히 업 시킬 수 있을지 우려되었다. 괜히 급한 마음에 그저 그런데를 예약해 온 것은 아닌지 돈만 쓰고 집에 가는건 아닌지 문을 열기 전까지 고민했었다. 그러나 자그마한 문을 열고 들어간 식당 내부는 밝은 히노키색과 산뜻한 녹색으로 꾸며져 따스했고, 그토록 시끄럽게 울리던 공사 소리도 문을 닫으니 등 뒤로 스러져 더이상 들리지 않았다. 

엄청난 사이즈의 굴찜

 죽상인 얼굴에 기어가는 목소리로 가리는건 없고 못먹는 것도 없다고 하니 우선 굴찜이라며 내어주는데 그 크기가 어마어마하다. 와 이렇게 큰 굴은 처음 봤다고 하니 무뚝뚝한 표정의 주먹코 주방장은 무슨 무슨 지역에서 나는 굴이라고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한다. 솔직히 무슨 지역인지는 잊었다. 이어서 나온 아귀 간도 크기가 상당하다. 으깨서 페이스트같이 만들지 않고 쪄내서 모양을 단단하게 유지하고 있는데 달큰함과 녹진함은 그대로 살아있다. 첫 두 접시를 먹고나니 죽상인 얼굴로 이 요리들을 먹기엔 너무 실례라는 생각이 들어 앉은 자세를 고치고 맛 하나하나에 집중해 젓가락을 놀린다. 이어져 나온 생선살도 잡내 없이 말끔하게 조리되었고, 구이도 훌륭하다. 이 집, 밑간이나 조리가 다양하건 아닌데 재료 자체의 퀄리티가 엄청나다. 재료가 좋으면 조리가 복잡할 필요가 없으니 찐 맛집이다.

혹시 사진 찍을건지 물어보며 보여준 참치 덩어리

 점심 때 너무 만족해 긴 텀을 두지 않고 저녁에 한번 더 예약해 방문했는데 주먹코 아저씨가 밝게 웃으며 반긴다. 크리스마스 날인지 12/31 인지 아무튼 극성스런 저녁 약속이 많던 어느 연말 저녁이었을것이다. 외국인 손님이 인상깊었던 모양인지 얼마전에 오지 않았냐고 아는척을 하는 주방장이 쩐지 싫지 않았다. 지난번에 점심을 너무 맛있게 먹었는데 점심만으로는 아쉽고 저녁은 어떤지 궁금해 왔다고 하니 주문하지도 않은 맥주를 한잔 따라주며 지난 번 엄청난 임팩트를 줬던 찐 굴을 내어 준다. 혹시 사진 찍고 싶으면 찍으라고 커다란 참치 덩어리를 눈 앞에 내어주기도 하고, 청어와 고등어를 맛있게 먹는 것 같았다고 이건 어떠냐고 전어 초밥도 내어 준다. 배가 빵빵하게 불러왔지만 오래간만에 혼자서도 웃고 떠들며 하는 식사 자리가 마음에 들어 재차 따라주다가 아예 새 캔으로 통 크게 내어 준 서비스 맥주를 거푸 비웠다. 이거도 먹어보라며 주방장이 성게소와 참치를 넣어 화려하게 말아낸 김초밥을 무심하게 접시에 내어준다. 지난 번엔 분명 김초밥 안에 박고지만 있었는데 서비스인지 저녁 메뉴엔 원래 참치까지 들어가는건지 알 수 없었지만 뭐 어떤가. 예상한대로 빈틈없이 맛있다. 자전거도 안되겠다 집까지 걸어서 한 40분 걸리지만 걸어가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교꾸며 멜론까지 꾸역꾸역 입에 집어넣는다. 초밥을 먹고싶다는 친구마다 추천을 하고 한국 들어갈 날이 정해진 뒤에도 일부러 두어 번 더 찾아갔을 지경이니 내 원픽중의 원픽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한번 다운된 기분엔 이자 붙듯 부정적인 감정이 딸려온다. 낮아진 자존감도 마찬가지다. 바닥을 칠 것 같다고 생각한 순간 이미 바닥을 치고 있고, 더 내려갈 곳이 없을 것 같은데도 어김없이 더 깊이 새로운 바닥을 친다. 누구 하나 나 하나만을 위로해줄 사람이 있다면 더없이 행운이겠으나 그럴 수 없다면 옷장에서 가장 예쁜 옷을 입고, 가장 도도한 표정으로 가고 싶던 식당을 예약해 찾아가 보자. 혹시 모른다. 호사스럽고 사치스러운, 아름다운 한점들이 어두운 감정들을 한땀한땀 지워 나갈 수 도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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