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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훈느 Nov 09. 2021

처량하지 않은 혼술인이 되기까지

퇴근길, 느긋하게 혼술을 즐기는 어른이 되기까지 시행착오 

 성인이 되고 술은 언제나 나에게 강점보단 약점, 즐거움보단 발목잡힐 흑역사를 생성하는 대상에 가까웠다. 주종에 관계 없이 서너잔이 고작이고, 그것마저 한잔만 마셔도 얼굴이 벌개져 드라마나 영화에서처럼 느긋하고 여유롭게 '폼잡고' 술을 마시기엔 영 그림이 안나왔기 때문이다. 그래도 십여년의 직장 생활을 하며 다회의 회식을 거치며 나 자신을 조금 파악하고 나니 어느 시점까지 분위기를 타며 마시고, 어느 시점에 물을 마실지, 또 어느 시점에 잠시 자리를 피해 도망갔다 올지를 판단하며 비교적 오랜 시간 술자리에 남아있을 수 있는 자기 방어 겸 스킬을 갖추게 되었다. 아마도 이때부터였던것 같다. 내가 혼술에 대해 관심 가지기 시작한게. 

 합법적으로 술을 마실 수 있게 된 애송이 성인 시절부터 나에겐 혼술에 대한 막연하고 단순한 일종의 환상이 있었다. 혼술은 나에게 경제적인 자유를 가진 자의 은밀한 취미, 근사한 장소에서 완벽한 고독을 느끼며 즐기는 것, 말 없이 자기 자신에게 몰입할 시간을 가지는 것, 요란하지 않게 스스로를 축하하거나 위로하는 것, 그리고 절대 지나치게 즐기지 않는 것을 의미했다. 요약하면 성공한 느낌에 젖어 나 홀로 스스로에게 몰입하는 의식 정도가 되겠다. 이런 혼술 환상의 필요 충분 조건을 충족하기 위해 나 혼자 정한 몇가지 룰도 있었으니 나는 정말로 그저 혼자 한잔하는 이 행위에 엄청난 기대와 동경을 담았던게 틀림없다. 지금 생각해보면 헛웃음이 쿡쿡 나올만큼 우습지만 어쨌든 나 홀로 정한 이 그라운드 룰은 지금까지도 나의 혼술 루틴에 강하게 작용하고 있으니 계획 성공, 계획 실현이다. 사실 별로 대단한 것은 아니다. 


북적이는 스포츠 펍이나 시끄러운 음악이 흐르는 클럽은 피할 것. 가능한 조용한 바에서 마실 것. 

배부른 술, 한잔에 홀랑 털어넣을 술을 피할 것. 오래도록 시간을 들여 천천히 즐길 술을 마실 것.

보틀로 주문해 마시지 말고 1~2잔으로 끝낼 것. 아무리 많이 마시고 싶어도 3잔을 넘기지 말 것. 

반주는 혼술이 아닌 식사로 칠 것. 안주는 가능한 먹지 않되 필요하더라도 간단한것으로 끝낼 것.    


 나의 부모님은 술이라곤 입에 대지도 않으신다. 형편없는 주량을 가져 술자리가 또래보다 매우 적은데도 술 마시고 들어오는 날이면 몸에 좋지도 않은 걸 뭐 그리 많이 마시냐는 핀잔을 들으며 귀가하기 일쑤였다. 나는 많이 먹는 축에도 안든다고 항변해도 그럼 뭐 술독에 빠져 살거냐는 더 큰 핀잔을 들을 뿐이었다. 금주인인 부모님의 눈에 나는 말술을 마시고 다니는 망나니 쯤으로 보였을까? 그러다 난생 처음 완벽한 독립을 경험하게 된 해외 파견 시절 나는 약간의 홀가분함을 느끼며 마음 속으로만 간직해오던 혼술 환상을 조금씩 실현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칵테일로 유명한 바를 찾아다니며 색이 예쁘고 장식적인 칵테일을 홀짝이다가 이내 좀 더 프라이빗하고 조용하며 위스키 라인 업이 좋은 곳을 찾아다니기 시작하고 나중엔 접근성이 좋으면서 예약이 가능한 작은 규모의 바들을 찾아 한잔씩 했던 것 같다. 

영화 '소공녀' 의 주인공도 위스키 한잔을 낙으로 삼았다.

 내가 특히 혼술로 즐겨 마신건 위스키였는데 향이 좋아 오래 두고 천천히 마시기 좋으면서도, 도수가 높아 한잔으로도 취기가 적당히 오르고, 와인처럼 지역이나 브랜드별로 다른 향을 탐구하는 재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별 이유는 없지만 언제나 얼음 없이 한잔을 시켜 코로 한번, 입으로 한번, 눈으로 한번 아끼듯 마시곤 했다. 내가 가장 선호하는건 주로 피트 향이 강한 아일랜드 위스키였지만, 이것 저것 설명하는 직원이 앞에 있을 땐 그에게 맡기고 추천 메뉴를 마시기도 했는데 대부분 맛있게 즐겼으니 내가 별로 까다롭지 않은 고객이거나 그가 일을 잘했거나 둘 중 하나다. 


 언제나 사람이 마음먹은대로 살아낼 순 없는 법. 나의 혼술 원칙에 들어맞지 않는데 의외로 참새 방앗간 들리듯 많이 찾은 곳도 하나 있었으니, 스타벅스에서 운영하는 bar mixato 였다. 

난징시루 스타벅스 리저브

 지금이야 더 큰 스타벅스 매장도 많아졌지만 당시만 해도 세계에서 1~2번째 큰 규모로 유명했던 난징시루(南京西路) 의 스타벅스 리저브 매장이 사무실 바로 코앞, 정확히는 사무실건물과 연결되어 있어 접근성이 좋았던게 유효했다. 1층은 원두와 굿즈, 커피, 베이커리 판매대가 있고, 2층에선 커피 외에 차와 주류를 판매한다. bar mixato 라는 공간을 한국에서는 본적이 없어 신기했는데 어느 나라 어느 지역에 가도 꼭 같은 맛의 커피를 제공한다는 스타벅스의 서비스 원칙 상 칼같이 정량을 지킨 칵테일을 제공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호기심과 호감이 생겼었다. 야근하고 방문하면 사람이 별로 없었다는 점도 잦은 방문의 이유 중 하나였다. 코로나 이전이야 줄지어 들어서서 여기저기 사진을 찍어대는 관광객들이 가득했지만 코로나 이후의 매장은 그렇지 못했기에 여유롭게 창가나 바 자리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앉아 세월아 내월아 하며 술을 마셔도 기다리는 사람들 눈치를 보거나 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스타벅스 bar mixato 의 홍보컷. 자료 출처는 大众点评

생각보다 다양한 주류를 취급하고 있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스타벅스 이름을 달고 나오는 맥주부터 웬만한 칵테일은 다 보유하고 있었는데 커피향 가득한 공간에서 노트북 가방을 옆에 팽개치고 하는 한잔이 제법 신선했다. bar mixato 를 알고 다니기 시작할 무렵 스타벅스에서는 위스키 배럴 통에서 숙성시킨 원두로 만든 리저브용 커피 메뉴를 새로 선보였는데 어쩌면 커피와 술이라는 중독성 강한 물장사로 돈을 쓸어모으려는 스타벅스의 큰그림은 아니었을까. 

     


시간이 흘러 이제 규칙을 지키려, 루틴을 만들려 애를 쓰며 혼술 하지 않고 그저 자연스럽게 나에게 집중하며 한잔을 즐길 수 있는 젊은 늙은이가 (?) 된 나는 지금도 곧잘 생각한다. 이렇게 청승맞지 않은 혼술의 배경엔 상하이에서, 또는 중국의 다른 도시에서 시도한 이런 저런 한잔들이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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