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큰하고 아련한 상하이 털게철 풍경
제철음식에 대한 사랑이 한국보다 뛰어난 곳이 있다면, 그곳은 단연 중국일것이다. 무슨 절기엔 뭘 먹어야 하고 무슨 계절엔 무슨 과일이 나고, 무슨 날엔 뭘 먹어야 하는지 줄줄 읊는 친구들을 보면 대단할 지경이다. 그러나 제철 음식을 챙기는건 불리함보단 이로움이 훨씬 많은 법이다. 일단 식재료 공수가 쉽고, 바가지 쓸 확률도 적으며, 어쨌든 가장 맛이 잘 드는 때이니 먹었을 때 실패할 확률이 적다. 그때 그때 먹고 싶은걸 골고루 먹자는 주의이지만 나도 상하이에서 요란하게 챙기는 제철 음식이 딱 두개 있었는데, 하나는 5-6월쯤 반짝 나타나는 양메이(杨梅), 그리고 또 하나는 10월 중순~11월까지가 제철이라는 상하이 털게 따자시에(大闸蟹) 다.
털게철이 되면 곳곳에서 먹음직스러운 게 그림, 게 요리 사진을 어렵잖게 볼 수 있다.
우선 유명한 음식점이나 호텔에 저마다 털게 메뉴를 시작한다는 포스터가 붙는다. 주로 찜기에 다소곳하게 놓여있는 게 사진이나 게의 누끼컷이 들어간 게 요리 사진이다. 계절감과 먹음직스러운을 살려 사진은 따뜻한 색감으로 보정된 경우가 대부분이고 붉은빛이나 황금빛 글씨로 홍보 문구가 써 있다. 마트나 시장에서도 끈으로 다소곳하게 묶인 털게를 잔뜩 볼 수 있다. 운이 좋으면 살아 움직이는 게를 가게 주인이 알록달록한 끈으로 묶는 장면을 볼 수 도 있다. 한 손에 게를 쥐고 이로 끈 한쪽을 문 뒤 이리 저리 돌리며 게를 묶는데 속도도 대단하고 매듭도 어찌나 단단한지. 봐도 봐도 신기하다. 기차역은 또 어떤가. 매주 항저우로 일박 이일이나 당일 출장을 가느라 상하이 홍차오 기차역을 밥먹듯 오갔는데, 기차역 매장에서도 털게가 그려진 선물세트가 잔뜩 쌓인다. 탄탄한 저 종이 박스 안에 설마 살아있는 게가 6마리, 9마리씩 들어있다는건가? 주문하면 급랭 털게를 배달해준다는건가 궁금했지만 굳이 사서 확인해보진 않아서 잘 모르겠다.
사실 처음 털게를 먹으러 유명하다는 음식점에 간 날 실망감을 숨길 수 없었다. 털게라는 말에 일본에서 먹어본 것 같은 - 저렵하지 않은 값의- 커다란 바다 게를 상상했었는데 실제로 본 털게는 너무나 아담한 사이즈라서 이게뭐야~ 싶었다. 이게 바다 게가 아니라 쑤저우 근처 무슨 호수에서 잡히는 민물 게라는 소리를 듣고나니 자그마한 사이즈가 조금 이해됐지만 그래도 손바닥만한 게를 뭔 이가격에 먹나, 하는 생각에 돈 아깝다는 생각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러나 사람은 언제나 간사한 법. 한번 입에 넣자마자 단단하고 차진 단맛이 입을 탁 치고 들어오는데 대체 내가 시킨 다른 요리는 언제 나오나 목을 빼고 기다릴 지경이었다.
요리에 '씨에펀(蟹粉)' 이란 단어가 붙으면 게 알, 내장, 발라낸 게 살이 들어간건데 달큰한 게살맛에 이미 눈이 돌아간(?) 나는 게살두부(蟹粉豆腐 씨에펀도우푸) 와 게살 소룡포 (蟹粉小笼包 씨에펀 샤오롱바오), 게살비빔면 (蟹粉拌面 씨에펀반미엔)을 차례로 격파한 뒤 '상하이 털게 만세!!' 를 외치며 이내 털게 팬이 되어버렸다. 특히 게살과 게 알을 연두부와 함께 볶아 나오는 게살두부(蟹粉豆腐) 는 이 없이도 먹을 수 있을만큼 부드러운데다 감칠맛이 그득한데도 짜지 않아 그냥 먹어도, 밥에 비벼 먹어도 어울리고, 향신료를 즐기지 않는 나의 한국에서 온 손님들(?) 도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는 맛이라 식당에 갈 때 마다 즐겨 먹었다. 게 알과 내장, 잘게 바른 게 살을 면과 비벼먹는 비빔면(蟹粉拌面) 은 꼭 게 요리 전문점이 아니어도 평범한 국수집에서 철이 되면 흔히 볼 수 있는 메뉴인데 가격은 다른 비빔면이나 간단한 고명의 국물 국수보다 좀 나가지만 녹진하고 진한 맛이 마치 짜장면을 먹는 것 같다. 두툼한 중면에 걸쭉한 고명을 비벼 한그릇 먹다 보면 몹시 배가 불러오지만 혀끝의 감칠맛을 좀 더 즐기고 싶어 자꾸만 입에 면을 밀어넣게 된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따자시에를 즐기는 가장 가성비 있고 좋은 방법은 게를 사와 집에서 직접 쪄 먹는 것이다. 원래 비린 냄새가 강하지 않라 마트에서 사서 쪄내도 근사한 식당에서 시켜 먹는 것 같은 맛이 제법 난다. 가격은 식당에서의 절반 정도면 충분하다. 털게는 시장에 가서 사와도 되고, 마트 배달 앱인 허마선생에서도 간단하게 주문이 가능하다.
주문한 게는 우선 칫솔로 이물질이 없도록 깔끔히 씻은 뒤 끈이 묶인 상태로, 배가 위를 향하게 놓고 쪄낸다. 나는 가지고 있는 것 중 가장 큰 사이즈인 26cm 지름의 주물 냄비를 이용했는데, 찜기를 얹을 수 있는 아무 냄비면 상관 없다. 물 대신 맥주와 생강 편을 썰어넣고 씻은 게를 차곡차곡 찜기에 얹은 뒤 8~10분 정도 쪄내면 거무튀튀하던 몸통에 발갛게 색이 올라온다. 너무 쪄내면 내장이 흘러나오고 살이 단단해져 맛이 없어진다. 게를 찔 때 넣은 생강 편이 남았다면 생강채를 썰어 중국식 흑식초와 함께 곁들여 먹는다. 술향, 생강향을 머금은 게살에 식초가 닿으며 감칠맛이 좀 더 극대화된다. 그닥 비싸지 않은 값으로도 살 수 있는 황주를 곁들이면 더욱 향이 좋아 한량이 된 느낌으로 식사를 즐길 수 있는데, 황주가 몸을 따뜻하게 해 음식 궁합으로도 잘 맞는 조합이라고 한다.
아무래도 좋은 제철 음식을 혼자 먹기는 아쉬워 간단한 한식을 해 집밥이 그리운 한국 친구들을 불러모은다. 이럴때 보면 난 꽤나 부산한 사람이다. 식탁에 둘러 앉아 찬 바람이 코끝을 스쳐 매캐하게 시려오는 창 밖 날씨를 구경하며 집밥 비슷한 음식들에 속을 덥히는 털게와 황주 한잔이면 남부러울게 없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