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때문에 2년 만에 돌아온 전주영화제. 전에는 며칠씩 짧게만 머물고 돌아왔지만, 이번에는 운 좋게 개막부터 폐막까지 열흘을 내내 머물게 됐다. 그렇게 팬데믹 시대의 영화제는 어떨까 하는 기대와 우려를 품고 다시 찾은 전주.
올해의 슬로건인 '영화는 계속된다'. 지난 1년간 가장 듣고 싶던 말이었다. 나는 내가 살면서 영화의 미래에 대해 걱정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볼게 너무 많아 고민인 미디어 홍수 시대에 태어난 내가 영화를 걱정하다니.
코로나19 이후 싸늘해진 극장가는 마치 디스토피아 영화에나 나올 법한 풍경이었다. 찾는 이도 없어 불만 켜진 채 털털 돌아가는 팝콘 기계와 괜히 열기만 뿜어내는 쓸쓸한 티켓 기계들이 줄줄이 서있는 풍경은 을씨년스럽기 그지없었다. 아무도 없는 상영관에 혼자 앉아 왕가위의 <해피투게더>를 보던 날이었을까. 돌아오지 않을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토해내는 이과수 폭포를 보고 있자니, 나도 언제일지 모를 그 옛날이 그리워졌다. 숨 막힐 정도로 다닥다닥 붙어 앉아 극장에서 영화를 보던 그 어느 날의 공기가 그리워질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영화는 계속된다는 그 말이 그래서 반가웠을까. 폭발 후의 잔해로 뒤덮인 멸망한 도시 위에 세워진 구호 깃발처럼 보이기라도 한 걸까. 가장 날이 맑았던 영화제의 첫날부터 난 그간의 그리움을 도시 곳곳에 덧바르고 있었다.
열흘 내내 본 영화는 총 17 작품. 먹은 것도, 구경한 곳도 많지만 영화 리뷰 위주로 적어보려 한다. 먹부림 하고 다닌 곳들과 다니며 찍은 사진들은 네이버 블로그에 따로 정리를 해두었다.
영화 리뷰
1. <아버지의 길> 슬로단 고르보비치 감독
올해 전주영화제의 개막작. 직관적인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말 그대로 가족을 지키려는 아버지의 이야기다. 양육권을 빼앗긴 아버지가 탄원서를 제출하기 위해 직접 발로 먼 길을 떠난다. 유사한 다른 작품들의 주인공과는 조금 다르게 이 영화의 주인공은 비교적 무기력해 보인다. 분노에 휩싸여 있지도, 간절함에 눈물을 뚝뚝 흘리지도 않는다. 말 그대로 지켜야'해서' 지키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 내내 음악이 한 번도 나오지 않았는데, 그래서 그런지 더 다큐멘터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최근 아카데미 작품 상을 받았던 영화<노매드랜드>와 얼핏 비슷해 보이기도 하지만 결은 전혀 다르다. 두 작품 모두 극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다큐멘터리처럼 느껴지는 하이브리드함이 있지만, <아버지의 길>이 <노매드랜드> 보다는 더 고발적인 성격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빈부격차와 관료주의에 대한 적나라한 비판과 동시에 이 영화는 사회 속의 인간 존재에 대한 질문을 하고 있기도 했다. 혼자서 병원에 실려간 주인공에게 의사가 그의 신분을 묻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의사는 주인공에게 "보험 카드 있습니까? 아내는 누굽니까?"라며 그의 존재를 증명하려 든다. 그저 나 자신의 이름만으로는 이 사회에서 나 자신으로 증명되기가 어려운 시대이다.
편집이나 음악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전체적으로 완성도가 높았던 영화. 특히나 마지막 장면의 연출이 계속 기억난다.
2. <아이> 김현탁 감독
일행이 예매해둔 영화를 내가 급하게 대신 보러 간 거라 아무런 정보도 없이 본 영화. 포스터만 대충 훑어보고 갔다가 생각보다 영화가 묵직해서 당황했다.
주인공 두 명이 처한 상황은 자칫 잘못하면 편협한 시선으로 그려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나름 신선한 시선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시도가 신선하다고 해서 좋은 영화가 되진 않는다. 중반까지는 재밌게 봤었는데 후반부는 실망스러웠다.
요즘 한국 영화를 보며 가끔 드는 생각은, 인물들이 누가 누가 더 불행한지를 다투는 것 같다는 것이다. 취약계층의 이야기가 분명히 가져다주는 효과도 있겠지만, 그것이 정말 그들을 위한 일인가는 돌아봐야 할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도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부분이 몇몇 있었다. 인물들의 설정이 과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지만 이 영화를 통해 류현경이라는 배우를 알게 되었다. 내가 근래 본 배우 중에서 가장 매력적이다. 현실과 극의 경계를 모호하게 해주는 연기를 한다.
이번 전주영화제에서 새롭게 선보인 섹션 중 하나인 'J 프로그래머'가 바로 이 류현경 배우가 고른 영화들을 상영하는 것이었다. 영화가 끝나고 류현경 배우와 감독님의 gv도 볼 수 있었다. 아쉬운 영화이긴 했지만 감독님이 많은 고민을 하셨다는 것이 느껴졌다. 다음 작품도 극장에서 볼 수 있으면 좋겠다.
3. <빛과 철> 배종대 감독
전주에서 한국 영화를 여러 개 보긴 처음이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 세로로 뜨는 자막을 부랴부랴 챙겨 보는 게 굉장히 체력 소모가 심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영화는 자막도 안 봤는데 체력 소모가 심했다. 과한 음악과 느린 호흡이 나를 괴롭게 했다. 그런데 의외로 영화가 중반부를 넘어가며 속도가 붙더니 재밌어졌다. 그쯤부터 내 죽은 눈깔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영화가 진행되면 될수록 인물들의 입을 통해 숨겨진 진실이 하나씩 양파껍질처럼 까지는 영화다.
그리고 <벌새>의 박지후 배우가 나온다. 이건 반칙이다. 가슴 한편에 <벌새>를 품고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이러면 영화를 미워할 수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아무튼 '신선'까진 아니어도 오래간만에 집중해서 본 심리 드라마였다. 시간이 없어 gv는 못 보고 나와서 아쉬웠다. 그리고 이것도 역시 J 프로그래머 선정작이다.
4. <빅 히트> 엠마누엘 쿠르콜 감독
시놉시스를 보자마자 이건 재미없을 수가 없다, 하며 예매한 영화. 역시나가 역시나였다. 이번 영화제에서 본 영화 중 가장 만족스러웠던 영화들 중 하나다.
한 연극배우가 재소자들을 데리고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무대에 올리는 이야기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고 한다.
이 영화는 말 그대로 고도를 기다린다. 그들이 연기하는 희곡이 결국은 극 밖으로 나와 그들의 이야기가 된다. 마지막의 독백 장면은 내가 이야기를 사랑하는 이유를 다시금 깨닫게 해주기도 했다.
한 재소자가 마음대로 원작을 변주한 후 말한 "베케트는 죽었잖아요. 하지만 우린 살아 있다고요!"라는 대사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5. <휴먼 보이스>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
인기 감독의 신작답게 치열한 티켓팅 전쟁을 뚫고 예매에 성공한 영화. 극장에서 보길 잘했단 생각이 들었다. 30분 남짓의 짧은 영화가 끝난 후에는 알모도바르 감독과 주연인 틸다 스윈튼이 화상으로 진행한 인터뷰 영상도 틀어줬다.
장 콕토의 희곡을 각색한 영화다. 영화는 연극의 형태를 그대로 지니고 있다. 라스 폰 트리에의 <도그빌>을 떠올리면 될 듯싶다. 원작 희곡을 읽어보진 않았지만, 감독이 말한 각색 의도가 좋았다. 원작에서 나오는 기존의 순종적인 여성상을 현대에 걸맞게 독립적인 여성상으로 각색을 했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 장면이 강렬하게 인상에 남았다.
인터뷰에서 틸다 스윈튼은 이 영화를 '막다른 길에 다다른 여성들을 위한 돌파구'라고 말했다. 이 영화를 다시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몇 번이고 다시 보고 싶다. 무엇보다 30분 내내 펼쳐지는 틸다 스윈튼의 독백 연기만으로도 볼 가치는 충분하다. 그리고 이 영화 보고 나면 에어팟 사고 싶어진다. 내가 가진 건 이전 모델인 그냥 에어팟인데, 에어팟 프로를 사고 싶어졌다. 알모도바르와 애플이 손잡고 만든 광고일까? 그렇다면 대성공이다.
6. <크립토주> 대쉬 쇼 감독
미드나잇 시네마 섹션 상영작. 미드나잇 섹션치곤 그렇게 무섭진 않다. 실사 영화가 아닌 애니메이션 영화. 흔히 보는 애니메이션 영화에 익숙하다면 낯설게 느껴지는 영화다. 마치 스톱모션처럼 프레임이 뚝뚝 끊기기 때문이다. 그 효과로 영화의 기괴함이 더 잘 다가왔다.
스토리는 엑스맨과도 얼추 비슷하다. 일반적인 미국 히어로 영화의 문법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크립티드라는 기이한 동물들을 미국 정부에서 포획하려 들고, 주인공은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사투를 벌인다. <신비한 동물 사전> 시리즈의 더 절망적인 버전 같기도 하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여러 생물들은 모두 역사와 신화 속에 등장하는 생물들을 모티프로 하고 있다. 내가 신화에 그렇게 조예가 깊진 않아서 다 알아보긴 힘들었다.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과 크립티드들을 모두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감독의 부인인 제인 샘보스키가 했다고 한다. 감독 또한 미국에서 꽤 유명한 그래픽 노블 작가던데, 두 사람의 상상력이 결합해서 일으키는 시너지가 대단하고도 부러웠다.
화상 통화를 통해 진행된 GV 분위기도 매우 화기애애했다. 이들이 영화와 인물 하나하나에 가진 애착이 영화를 더 사랑하게끔 만들어주기도 했다. 마지막에 이렇게 실시간으로 인사를 나누었는데, 이런 순간이 영화제를 사랑하는 이유다. 창작자와 직접 이야길 나누고, 그들에게 작품에 대한 찬사를 보내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시간이다.
하트
7. <완다> 바바라 로든 감독
인디펜던트 우먼 섹션 상영작. 주연 배우가 직접 감독한 영화다. 사실 앞부분에 졸아서 내용을 완벽하게 이해하진 못했지만 그래도 내 취향이 아닌 영화다. 누가 나한테 돈 주고 다시 보라고 해도 안 보고 싶다.
아녜스 바르다 감독의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를 연상시키기도 했지만, 클레오는 그래도 자기 삶을 살지만 이 영화 속의 완다는 그러지 못한다. 내용이고 뭐고 다시 떠올리기 힘든 영화다. 아무튼 힘들게 복원한 영화를 극장에서 칼라로 보았다는 것에 의미를 두고 싶다.
8. <미스 마르크스> 수잔나 니키아렐리 감독
우리가 잘 아는 칼 마르크스의 딸인 엘레너 마르크스의 전기 영화다. 어린 시절의 장면은 교차편집으로 중간중간만 나오고, 이야기는 그가 결혼을 하는 시점부터 시작된다. 스토리도 그의 결혼 생활과 그 안에서 겪는 심리적인 갈등 위주이다.
이 영화는 특이하게도 19세기를 배경으로 하지만, Downtown Boys 등의 록 밴드 노래가 중간중간 삽입되어 있다. 음악의 힘이 굉장히 큰 영화다. 장면과 모순적으로 대치되는 음악을 좋아하는 편인데, 이 영화도 그런 면이 만족스러웠다.
영화의 편집이 굉장히 투박한 편이다. 그런 면이 되려 엘레너 마르크스의 이야기와 어울리기도 했다.
끝나고 화상으로 진행된 감독님과의 대화. 아마 감독님이 계신 곳은 이른 아침이었을 텐데, 피곤해 보이신다. 그렇지만 우리도 밤 11시라 만만치 않게 피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질문에 좋은 답변들을 해주셨다.
이 영화가 실존했던 여성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감독님의 두 번째 영화였다. 다음 영화 또한 실제 여성 인물의 이야기라고 한다. 극장에서 볼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
"<미스 마르크스>는 마땅히 알아야 함에도 우리가 알지 못했던 인물에 관한 영화이다. 엘레너 마르크스는 칼 마르크스의 딸이 아닌, 사회주의와 페미니즘을 처음으로 접목시킨 중요한 역사적 인물이다."라는 감독님의 말.
중간에 엘레너와 남편이 헨릭 입센의 <인형의 집>을 연극하는 장면이 나온다. 연기가 아니라 실제 상황처럼 느껴지도록 트릭적으로 연출된 장면이다. 이 장면이 인상적이어서 내가 질문을 보냈다. 감독님은 그 장면을 통해 엘레너와 남편의 관계, 그리고 엘레너가 자신의 내면을 깨닫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하셨다.
또한 엘레너 마르크스는 실제로 헨릭 입센의 작품을 번역했다고 한다. 그녀가 그 시절 번역을 했던 이유가 여러 독자를 위함도 있지만, 입센의 작품을 자기 자신에게도 가져오기 위함도 있었을 거라는 감독님의 말은 영화를 보면 알 수 있다.
9. <워터멜론 우먼> 쉐릴 더니 감독
최초의 흑인 여성 레즈비언 감독의 영화이다. 영화감독을 꿈꾸는 비디오 가게 점원인 주인공이 '워터멜론 우먼'이라는 인물의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모큐멘터리 형식의 영화다. 감독은 흑인, 여성, 레즈비언, 이 모든 키워드들을 굉장히 자연스럽게 조명한다.
1996년도 작품이지만 올해 제작한 영화라고 해도 손색없을 만큼 영화가 세련됐다. 힙한 음악도 내내 나온다. 극장에서 안 봤으면 후회했을 영화다.
소수자를 주인공으로 하는 이야기를 보다 보면, 가끔 그들의 '소수자성'만을 과하게 강조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런 이야기보다는 다른 사람들과 다름없이 살아가는 소수자들의 이야기가 좋다. 이 영화가 그래서 좋았다. 주인공은 영화를 찍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저 흑인이고, 여성이고, 레즈비언일 뿐이다. 단순히 영화의 의미를 떠나서도 잘 만든 영화다. 일반 상영을 했어도 인기를 얻었을 법하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역사를 만들어야 한다는 마지막 말이 가슴을 쿡쿡 쑤신다.
10. <완벽한 축사를 준비하는 방법> 로랑 티라르 감독
말 그대로 누나의 결혼식 축사를 부탁받은 남자의 이야기. 전형적인 찌질한 백인 남자의 염세적인 유머로 가득하다. 그렇지만 마냥 미운 스타일은 아니다. 등장하는 인물들의 관계와 에피소드들이 전체적으로 사랑스럽다. 그리고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처럼 주인공이 제4의 벽을 깨고 자꾸 스크린 너머를 향해 말을 건다. (왜 자꾸 저한테 말 거세요..)
아마 이번 전주에서 본 영화 중 가장 가볍게 볼만한 영화인 듯하다. 그리고 자막도 일반 극장 영화처럼 가로로 나오길래 혹시 정식 개봉을 하는 영화인가? 했는데 찾아보니 어디선가 수입을 했다고 하더라. 정식 개봉을 한다면 다들 재밌게 볼만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주인공이 매형에게 축사 부탁을 받은 후 망한 축사 시뮬레이션을 상상하는 장면들이 너무 웃기다. 나는 무대 공포증이 전혀 없어서 모르겠지만, 주인공처럼 소심한 사람들은 저런 상상을 하는 건가 싶어서 신기하기도 했다.
관계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갈등들에 대한 표현이 매우 섬세하다. 접시를 포크로 긁는 소리, 매번 하는 똑같은 농담, 국물을 떠먹을 때 내는 후루룩 소리. 가장 사소하고도 가장 영화적인 순간이다. 그런 요소들로 발생하는 관계의 균열을 감독이 매우 세밀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래도 결국은 어찌저찌 굴러간다는 것.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져도 된다는 것. 넘어진다고 끝은 아니라는 것. 뭐 그런 영화다.
11. <서핑하는 여자들> 크리스 넬리우스 감독
1980년대에 주로 활동했던 여성 서퍼들의 다큐멘터리다. 과거에 했던 그들의 인터뷰 자료와 지금의 인터뷰가 섞여있다. 과거에 했던 남성 서퍼들의 인터뷰가 아주 인상적이다. 여성 서퍼들이 더 낮은 임금과 대우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당당하게 이야기한다. 그런 차별적 대우가 당연시되던 시기에서도 월드 챔피언을 이뤄내고 입지를 높인 여성들의 이야기다.
이 영화는 서핑하는 여자들만을 위한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여성을 위한 이야기다. 어떤 자리에 있던, 어떤 꿈을 꾸든지 간에 나아가라고 엄지를 세워준다. 그러니까 다들 운동도 하고, 넘어져도 보고, 잘들 살자.
이 영화를 보기 전에 포스터 전시회에서 그냥 예뻐서 포스터부터 덥석 샀는데, 그러길 잘했다. 벽에 붙여놓고 운동 가기 싫을때마다 자극 받는 중이다.
12. <모든 곳에, 가득한 빛> 테오 안소니 감독
시선에 대한 다큐멘터리. 제목과 포스터만 보고 사진이나 시각예술에 대한 영화인 줄로만 알았다. 난해할 줄 알았던 예상과 달리 이 영화는 감시카메라, 경찰의 바디캠 등 여러 이야기를 통해 시선의 한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상공에서 찍는 감시 카메라를 두고 사람들이 벌이는 설전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이것은 엄연한 사생활 침해라고 반대 주장을 펼치는 사람과, 이 동네에서 죽은 사람들을 생각하라면서 찬성 주장을 펼치는 사람의 대립이 팽팽하다. 쉽게 타협되지 않을 주제에 대해서 이 영화는 단순히 어느 한쪽의 편을 들기보다는, 카메라라는 시선을 통해 생겨난 감시체계를 돌아본다.
카메라는 경험을 축소하고 역사를 구경거리로 변질시킨다. 사진은 연민을 자아내는 것만큼 연민을 없애고 감정을 떼어낸다. 사진의 리얼리즘은 무엇이 현실인지 혼란스럽게 만들기 때문에 (장기적으로든 단기적으로든) 우리의 감각을 자극하고, (장기적으로) 도덕적 불감증을 가져올 수도 있다. - 수전 손택 <사진에 관하여>
<사진에 관하여>에서 좋아하는 구절. 이 영화는 손택이 제시하는 시선의 타자화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보다는 다른 곳을 향한 시선에 대한 가능성을 얘기한다. '이 실패한 프레임 밖에 존재하는 모든 가능성을 위해 기도한다'. 영화의 마지막 문구다.
13. <파편> 나탈리야 가라얄데 감독
1995년에 아르헨티나에서 일어났던 군수품 공장 폭발 사건 당시를 비디오 캠으로 찍은 다큐멘터리. 감독이 어린아이였던 시절 찍었던 테이프를 발견해 만들었다고 한다.
당시의 현장을 거칠고 솔직한 시선으로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평화롭던 마을 곳곳에서 폭탄이 터지는 모습은 등골이 서늘해진다. 어떤 극영화보다도 더 현실감 없게 느껴지는 영상의 연속이다.
자연스레 <사마에게>가 떠올랐다. 두 영화는 늘상 몇 줄짜리 글로 표현되고 끝나는 사건들을 가장 개인적인 시선에서 보여준다. 전쟁이나 재난은 개인을 쉽게 지워버린다. 그러나 과거를 기억하는 가장 명징한 방법은 그곳에 개개인의 삶이 있었음을 아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가 주는 기록으로서의 힘이 이 영화에 담겨있다.
영화 내내 감독이 직접 녹음한 내레이션이 흘러나온다. 담담한 그녀의 목소리는 마지막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마지막 시퀀스에서 들려오는 내용은 담담하지 않다. 이 폭발사건이 아직 끝난 게 아님을 가장 사적인 이야기로 들려준다.
14, 15. <입법회 점령사건> <붉은 벽돌벽 안에서> 홍콩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자
19년도에 일어났던 홍콩 민주화 운동의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 두 편. <입법회 점령사건>은 홍콩 입법회 점거 사건을, <붉은 벽돌 벽 안에서>는 홍콩이공대학 점거 사건을 다룬다. 두 영화 모두 시위대의 모습을 피부로 느껴질 정도로 옆에서 생생하게 담고 있다.
퍼런 최루액을 맞고 괴로워하는 시위대의 모습과 경찰이 그들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모습이 가감 없이 영상에 담겨있다. 현재 미얀마의 상황과 이전 정권 시절 한국의 상황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오버랩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단순히 홍콩 시위대와 경찰의 대립만을 보여주는 것만을 넘어서서, 이 다큐 안에는 시위대 내의 갈등 또한 담겨있다. 한뜻으로 모인 이들 안에서도 추구하는 방향이 각기 다르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16. <친구들과 이방인들> 제임스 본 감독
호주의 중상류층 청년들의 이야기. 그냥 뭐... 왜 예매했더라. 딱히 재밌진 않은데 그냥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멍하니 권태롭게 보고 있게 된다. 영화의 사건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돼있진 않고, 그냥 그때그때 벌어지는 일들이 꼬리의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인물 간의 사소한 갈등이 대화로 계속 이어지는데, 신경질적인 음악과 합쳐져서 그런지 스트레스 수치 높이기 딱 좋다.
영화를 볼 때 인테리어를 구경하는 걸 좋아해서 그런지 눈은 즐거웠다. 극 중 등장인물의 집이 바다가 보이는 저택인데, 집 안에 미술품도 빼곡하게 걸려 있다. 미술이 아름다워서 극장에서 보기 잘했다고 생각은 했다. 근데 재미는 없다.
17. <조셉> 아우렐 감독
이번 전주영화제의 폐막작. 1939년 당시 프랑코의 독재를 피해 프랑스로 탈출한 스페인 피난민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애니메이션이다. 조셉 바르톨리라는 실존했던 스페인 일러스트레이터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작화 또한 주인공의 그림처럼 거칠고 매력적이다.
프랑스가 피난민들을 수용소에 가두고, 조셉은 그곳에서 프랑스 헌병 한 명과 친구가 된다. 영화의 초반에 나오는 임종을 앞둔 노인이 손자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인데, 이 노인이 바로 프랑스 헌병이다. 제목은 조셉이지만 조셉의 시선이 아닌, 헌병이 조셉을 추억하는 시선이다. 두 사람의 우정은 다른 비슷한 영화들을 떠올리게도 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고 나니 이 영화제의 마지막을 장식하기에 적절했던 영화라고 생각한다.
사진으로 담은 2021 전주영화제
전주영화제의 상징 빨간 큐브. 반대쪽 면에는 FILM GOES ON이라는 문구가 쓰여있다. 전주돔이 없어져서 그런지 그 앞에 세워진 작은 큐브가 없어서 아쉽다.
영화 포스터 전시회. 영화의 거리와 조금 떨어진 팔복예술공장에서 열린다. 확실히 웹보다 직접 가까이서 보는 감흥이 남달랐다. 독특하고 해체적인 디자인 포스터들이 100개나 전시되어 있다. 영화제를 들리면 꼭 가봐야 하는 곳 같다.
바깥에는 해먹이 설치되어 있다. 천국을 옮겨다 놓은 곳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외에도 팔복예술공장에는 사진과 같은 여러 건물이 모여있다.
이렇게 무사히 열흘간의 영화제가 막을 내렸다. '영화는 계속된다'라는 올해의 문구처럼, 전주영화제 개막으로 인해 영화는 정말 계속될 것이란 희망을 얻었다. 어디로 갈진 몰라도 아무튼 가긴 간다는 것이 중요하다. 세상이 멈추지 않는 한 좋은 영화는 이렇게 계속 나올 것이다.
코로나 이전에는 아무런 걱정 없이 했던 미래에 대한 기약을 이젠 함부로 할 수 없어졌다. 내년에 다시 보자는 말을 하기가 불안해진 시대다. 당장 며칠 뒤도 어찌 될지 모르는 이런 상황에서 그래도 내년에 다시 보자는 기약 없는 약속을 해본다. 다시 만나자 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