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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랑 Mar 09. 2022

우주 이웃과 우리

    인류는 우주의 외톨이일까? 외계인의 존재는 오랫동안 인간의 상상력과 호기심을 자극했다. 아직 공식적으로 발견된 외계 생명체는 없지만, 이렇게나 넓은 우주에 인간만이 유일무이한 지성체라고 단언하기에는 정보가 부족하다. 우주 어딘가에 지적 외계 생명체가 진짜로 존재할까? 만약 그렇다면, 언젠가 그들과 만날 수도 있을까?


    미국의 천문학자 프랭크 드레이크는 이런 질문에 답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인류가 접촉할 만한 가능성이 있는 문명의 수를 구하는 방정식을 제시했다.

<드레이크 방정식. 출처: 위키피디아>

드레이크 방정식에서 N은 우리가 구하고자 하는 값, 즉 통신 가능한 문명의 수를 의미한다. R부터 L은 각각 적절한 항성이 탄생할 확률(R), 그 항성에 행성이 있을 비율(fp), 한 항성계에 평균적으로 존재하는 지구와 유사한 행성의 수(ne), 그 행성에 생명체가 있을 비율(fl), 그 생명체가 지성이 있을 비율(fi), 그들이 통신 기술을 가지고 있을 비율(fe), 그리고 통신 가능한 문명의 수명(L)을 나타낸다.


    각 변수에 어떤 수를 대입하느냐에 따라 N의 값은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문제는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적절한 값이 무엇인지 의견이 갈린다는 것이다. 특히 다른 변수들에 비해 L의 값을 예측하기는 더욱더 어렵다. 미국의 과학 비평가 마이클 셔머에 따르면 전문가들이 예측한 L의 값은 작게는 10년에서 크게는 1,000만 년까지로 그 범위가 매우 넓었다고 하니, 적당한 값을 대입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짐작이 간다.


    이 문제에 대한 한 가지 접근 방법은 인류 문명의 수명을 L에 대입하는 것이다. 인류는 유일하게 알려진 통신 가능한 문명이다. 만약 우리가 앞으로 수십만 년을 생존할 수 있다면 잠재적으로 만날 수 있는 우주 이웃의 숫자는 늘어나고, 이른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면 한없이 0에 가까워진다. 어느 쪽이든, 우주를 향한 우리의 호기심이 다시 인류 지속 가능성의 문제로 돌아온다는 것은 생각해 볼 만한 일이다.  




    인류는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한다. 비교 대상이 없는 한 우리가 진실로 어떤 점에서 특별한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인간은 한편으로 숭고하면서 다른 면에선 비열하고, 이기적이면서 이타적이고, 발전적이면서 답보하며, 배신을 일삼지만 신의가 있고, 평등하지만 차별적이다. 그러나 평균적인 문명에 비해 진실로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특별할까?  


    위의 질문에 정확하게 답하기 위해서 외부의 문명이 필요한다. 이는 타인과 비교하지 않고서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정확하게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내가 치킨을 좋아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보다 더 치킨을 좋아한다면 그것을 나의 개성이라고 할 수는 없다. 모든 특성은 상대적으로만 유효하다. 인류의 여러 면모도 다른 문명들과 비교했을 때 도드라지는 점이 아니라면 우리가 누구인지를 표현하는 특성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므로 지적인 외계 이웃의 발견은 과학뿐 아니라 철학적으로도 인류에게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이다. 우리가 가치 있다고 여긴 것들이 별것 아닌 것으로 판명될 수 있다. 우리가 아는 사회의 모습은 수없이 많은 가능성 중의 하나임이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어떤 식의 깨달음이 되었든, 이는 처음으로 인류가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기회가 될 것이다.   


    보이저 1호가 찍은 지구의 사진은 한없이 작은 창백한 푸른 점에 우리 모두를 담았다. 어쩌면 이 우주에서 인류는 무심한 자연법칙의 철저한 예외로 홀로 존재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진짜로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어떤 존재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답은 머나먼 이웃에 의해서만 확실해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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