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이 넘치는 시대이다.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어떤 직업이 유망한지, 어느 지역에 부동산을 사놓는 것이 이득일지를 궁리한다. 대단한 성공과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진 일화를 들으며 저마다 부러움과 두려움을 누른다. 수많은 정보 중에 진짜와 가짜를 가려내는 작업 또한 여간 골치가 아픈 게 아니다.
사람들의 고민은 지금보다 나은 삶을 살고 싶다는 소망에서 출발한다. 누구나 더 잘 먹고, 잘살기 위해서 노력할 자유가 있으며 그러기 위해 진학을 하고, 직업을 가지고, 투자한다. 그 결과로 개인과 사회가 근시안적이고 얄팍해진다고 하더라도 멈출 수는 없다. 우리의 소원이 한없이 즉물적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미 그렇게 만들어진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속물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당신은 그런 식의 삶에 염증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생활 수준을 향상하겠다는 의지에는 어떠한 반론도 제기할 구석이 없지만, 그렇다고 의문이 생기지 않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얼마나 더 잘살아야만 만족할 수 있을까? 애초에 왜 우리는 조금이라도 편하고 윤택하게 사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게 되었나? 삶과 죽음의 본질은 무엇일까? 삶의 이유를 찾는 것은 무의미한 시간 낭비일까?
아무도 당신이 이런 질문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하지는 않는다. 나름의 멋진 답을 찾는다고 하더라도 아마 당신의 절친한 친구 한둘이 귀 기울여 들어주는 것이 고작일 것이다. 그러나 그 무용한 질문의 답을 구하기 위해 나는 기꺼이 시간을 투자한다. 마침내 나를 괴롭히는 의문들을 해소하고 더 이상 얄팍한 위안에 기대지 않아도 괜찮은 상태로 나아가는 과정은 개인적으로 성장이라 칭하기에는 부족했다. 그건 개인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혁명적인 변화이다.
속세를 등지지 않고서야 어떤 깨달음은 얻는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생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차이는 내면에서, 가장 심원한 곳에서 생긴다. 그건 세상의 거대함과 견고함을 너머 만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자아라는 감옥에서 스스로를 자유롭게 풀어주는 것이다. 진실은 백 년 남짓의 짧은 생에도 불변하여 붙들고 있을 구석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부러워하고, 또 무엇을 두려워할까?
자책과 걱정 없이 하루하루를 맞이하는 삶도 있다. 그건 세상의 다른 모든 것처럼 부자나 권력자에게 저절로 주어지는 보물도 아니고, 엄청난 역경과 고난을 뛰어넘어 위인의 반열에 든 사람만이 거머쥐는 영예도 아니다. 다만 사람들이 뒤로 미뤄둔 중요하지 않은 질문들을 붙잡고 끝까지 답을 구하려 헤매는 길에서 찾을 수 있는 안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