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랑 Jun 07. 2022

사는 문제 앞에서

    근심 없이 사는 사람이 있을까. 아무것도 모른 채 뛰어노는 어린아이들과 대화를 해봐도 제 나름의 고민을 하며 살아간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다. 미뤄놓은 숙제가 됐든, 높아지는 대출 금리가 됐든 우리를 옥죄는 실존적인 문제들은 우리에게 끊임없는 고뇌를 선사한다.


    그런데 수십 년을 살아도 그 주제만 바뀔 뿐, 크고 작은 고민 앞에서 매번 노심초사하게 된다면 나의 마음을 바르게 살펴볼 필요는 있다. 정말로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일까? 끝내지 못한 숙제를 들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수업에 임하는 학생에게 엄밀히 말해 시간 내에 숙제를 끝내지 못한 것은 더 이상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이미 벌어진 일, 즉 과거의 일이기 때문이다. 과거는 자책의 원인이 될지언정 불안의 핵심은 아니다.


    걱정의 핵심은 우리가 앞으로 닥칠 일을 예측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어쩌면 숙제를 검사하는 것을 잊어버릴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 운이 나쁘면 이전의 수업 태도까지 더해 크게 혼날 수도 있다.' 상상력은 요행과 불운 사이를 줄다리기하며 감정을 마구 뒤흔든다. 마침내 어느 한쪽으로 결론이 나 버리면 그저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는데도 불필요한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다.


    쓸데없는 예측을 멈추고 차분히 결과를 맞이하기 힘든 이유는 우리가 다치는 것을, 손해 보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유쾌한 진실은 아니지만 모든 상황에서 매번 운 좋게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런 현실성이 없는 기대를 하는 마음과 실제의 간극이야말로 진정으로 우리를 괴롭게 하는 원인이다. 즉, 우리 안에 있는 헛된 희망을 인지하고 해체할 수만 있다면 공연한 괴로움은 줄어들 것이다.  


    모든 숙제를 백 퍼센트 시간 내에 척척 완성할 수 있다면 그것은 숙제 기계이지 사람은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살면서 피할 수 없는 수순으로 끝내지 못한 숙제가 생길 것이다. 걱정할 이유는 없다. 손바닥을 맞든, 벌점을 받든, 반성문을 쓰든 시간이 해결할 일이다. 그러나 여기서 새로운 의심이 마음에 자리한다. 정말 모두가 못다 한 숙제에 대해 동일한 벌을 받고 있는가?




    앞서 우리를 괴롭게 하는 일들로 후회와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을 꼽았지만, 사실 그 두 가지 보다도 사람을 더욱 감정적으로 휘두르는 것은 자격지심일 것이다. 내가 잘못하기는 했지만 다른 사람들도 비슷하게 잘못하고 있는 것 같은데 왜 나만이 이런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가? 아니, 나 정도면 괜찮은 사람인 거 같은데 왜 이런 결과를 받아들여야 하나?


    모든 상황이 공정할 수는 없다. 분명 운이나 형평성을 따지기 시작하면 동일한 원인이 동일한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 사례들이 존재할 것이다. 편애받는 학생은 숙제를 빼먹어도 혼나지 않고, 나에게만 유독 엄격한 잣대가 들이밀어질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정의로운 마음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내게는 왜 편의에 따라 관대한 기준이 적용되지 않는지를 억울해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범인의 사고방식이다.


    편애받는 학생들이 자신들이 누리는 이익을 만끽하고 있는지, 아니면 자신보다 더 편애받는 학생들에게 열등감과 질투심을 느끼고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도 나에게 최선의 이득이 되는 것은 내 몫의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이고, 손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고, 초연한 태도를 기르는 것이다. 그것만이 자신의 허물에만 관대하고 사사로운 손익에 일희일비하는 범부의 운명에서 나를 구원할 수 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는 끊임없이 먹고, 자고, 인간관계를 배우고, 지식을 습득하고, 생존하고 성장하기 위해 분투한다. 이따금 고민거리가 사라진 아름다운 순간들이 생길 수는 있겠지만 이는 기본적으로 예외이다. 살아있는 것은 그 자체로 숙제다. 귀천을 막론하고 그 누구도 모든 문제를 완벽하고 깔끔하게 처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승자는 시도하는 것을 멈추지 않고, 실패와 실수를 무던히 받아들이는 방법을 가능한 한 빨리 배우는 사람이다.  


    어린 시절에 했던 고민이 점점 기억에서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지금은 생각조차 하지 않는 문제들이 언젠가는 코앞에 놓일 것임을 이해한다. 오늘의 나의 몫은 오늘의 내가 질 테니, 그때의 나는 또 그때의 내가 해야 할 일들을 처리하면 된다. 어떤 요행에 대한 기대도, 억울함도 끼어들 자리는 없을 것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 우주 이웃과 우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