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여행기를 쓰는 일은 참 피곤한 일이다. 여행을 다니는 동안에는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서 이 여행을 반드시 여행기로 쓰겠다고 마음먹곤 한다. 지금 이 소중한 시간, 소중한 추억, 색다른 느낌과 경험을 글로 남겨서 고이 보관해두고 싶어진다. 여행을 마치고 현실로 돌아와 시간이 흐르고 여행 기억이 흐릿해져갈 무렵 다시 여행기를 읽으며 그때 그 감정을 다시 느끼고 회상해보고 싶은 욕심이 넘쳐난다.
하지만 이런 감정은 여행에서 돌아와 여행기를 한 달 정도 쓰다 보면 싹 사라졌다. 항상 그랬다. 한 달 정도 계속 여행기를 쓰다 보면 스스로 여행기 쓰는 일에 '질려버린다'. 여행기는 정말 손이 많이 가는 글이고 시간도 상당히 오래 걸린다. 반면 글 쓰는 보람은 의외로 엄청나게 없다. 밀린 일기 몰아서 쓰는 것을 즐거워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밀린 일기는 정 안 되면 '나는 놀았다'로 적당히 도배하며 넘어갈 수라도 있지, 여행기는 그게 안 된다. 여행기에 나는 놀았다, 나는 놀았다, 나는 놀았다 - 이렇게 도배하면 여행기 쓰는 의미 자체가 없어져버린다.
더욱이 여행기는 일기와 달리 한 번 쓸 때 거쳐야 하는 작업이 꽤 많다. 여행기 쓰기 위해 촬영한 무수히 많은 사진을 일일이 다 보면서 고를 것 고르고 버릴 것 버려내는 작업만 해도 한참 걸린다. 여기에 온갖 영수증과 기록들도 하나씩 일일이 찾고 정리해야 한다. 이것만 해도 상당히 손이 많이 가고 시간도 오래 걸리는데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새로 정보를 찾아봐야 하는 경우도 많다. 여행 다닐 때는 모든 것을 다 알고 돌아다니지 않는다. 그렇지만 여행기는 과거에 대한 기록이자 동시에 복습과 새로운 공부의 과정이기도 하다. 이 과정이 또 엄청나게 걸린다. 이렇게 여행기를 쓸 준비가 대충 끝나면 이제 한 화에 얼마나 많은 사진과 글을 집어넣을지 정해야 한다. 이런 모든 과정이 끝나야 그제서야 여행기를 쓰기 시작한다. 이미 준비 과정에서 엄청나게 피곤해진 상태에서 글을 쓰기 시작하니 여행기는 한 번 쓸 때마다 다시는 쓰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된다.
여행기를 쓸 때 가장 중요한 점은 바로 과거 상황 속으로의 몰입이다. 여행기가 다른 글에 비해 쓰기 쉬운 점이 하나 있다면 그건 여행기는 줄거리, 개요가 전혀 필요 없다는 점이다. 이미 있었던 일을 줄줄 쓰는 것이니 줄거리는 일부러 만들지 않아도 완성되어 있는 상태다. 개요는 일부러 짤 필요가 없는 게, 사전에 각각의 포인트에 맞춰서 개요를 짜더라도 어떤 플랫폼에 여행기를 써서 올리는지에 따라 사진 갯수가 한정되어서 다시 짜야 하는 일이 종종 있다. 그래서 개요는 여행기 한 화를 쓸 때마다 바뀌곤 한다. 이렇게 줄거리, 개요가 정해져 있고 창작할 건덕지가 없기 때문에 오직 과거 상황 속으로의 몰입만 잘 된다면 매우 빠르고 쉽게 쓸 수 있다.
여행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서 여행기를 쓸 때는 모든 기억이 생생하기 때문에 몰입이 매우 잘 된다. 이때는 여행기 쓰는 것 자체가 매우 재미있고 신난다. 여행에서 돌아온 아쉬움을 새로운 여행으로 해소하는 기분이 든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고 2주일이 지나고 어느덧 한 달 정도 흘러가게 되면 상황이 바뀐다. 내가 머무르고 있는 현실에 다시 완벽히 적응하면서 여행의 기억은 급격히 뿌옇게 흐려져간다. 이때부터 정말 여행기를 쓰는 것이 고역인 상황에 빠지게 된다. 몰입이 안 되기 때문에 글이 잘 나오지 않고, 그때 어땠는지 머리를 쥐어짜내야만 한다. 그렇다고 진도가 쉽게 나가지도 않는다. 한 화를 쓸 때마다 위에서 말한 여행기 준비 과정을 일일이 다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행기를 하나 완성할 때마다 해방감을 느낀다. 엄청나게 밀린 일기 숙제를 간신히 다 해치웠을 때의 해방감보다 10배 더 강렬하게 속이 후련하다. 인생의 숙제 하나 끝냈다는 기분에 홀가분해진다.
글을 잘 쓰지도 못하고 사진을 잘 찍지도 못한다. 나도 안다. 어쩌다 내가 쓴 여행기를 다시 '보려고 한다'. 그때마다 조금 보다가 잠들어버린다. 내가 봐도 몇 편 못 보고 그대로 골아떨어져버리는데 내 여행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주시는 분들은 어떤 분들일까? 항상 너무 고맙다. 가끔 내 여행기 정말 잘 보았다는 메일을 받곤 한다. 그때마다 정말 몸둘 바를 모르겠다. 내 여행기를 좋아한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너무 기쁘고, 한편으로는 더 잘 써야 하는데 그렇게 끝내버려서 매우 아쉽다.
나는 퇴고를 하지 않는다. 한 번 쓰면 그것으로 영원히 끝이다. 지금까지 내가 써왔던 여행기에는 그래서 2개의 '나 자신'이 들어 있다. 여행을 다니던 나 자신과 여행기를 쓰던 나 자신.
여행을 다니던 나 자신, 그리고 여행기를 쓰던 나 자신과 만나는 경험. 두 개의 '나'를 만나는 시간. 지금까지 내가 쓴 여행기를 다시 읽으며 나 자신을 만나러 가는 여정. 전혀 새롭지 않지만 새로운 여행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