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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렌디피티 Jun 29. 2023

아들이 다니는 수학학원에 전화를 걸자 생긴 일

"00 이는 나중에 사회생활은 잘할 거예요."

학원에는 명백한 서열이 존재한다. 우수반, 그보다 떨어지는 반. 얼마 전, 아들은 일명 우수반에서 쫓겨났다. 몇 년씩 앞서가는 선행학습을 따라가기 벅차하며 목줄을 한 채 질질 끌려가는 강아지의 모습으로 몇 달간 버티더니 끝내 그 모습을 보던 선생님들도 도저히 안 되겠다고 생각하셔서 내린 결정인 듯했다. 반이 바뀌었다는 전화를 받고 속이 부글부글 끓고 조바심도 났지만, 이제는 받아들였다. 그렇게 반이 바뀐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러있었다.

문득 궁금해졌다. 아이가 어떻게 학원에서 학습하고 생활하고 있는지.

용기 내어 통화버튼을 누르고, 곧이어 학원선생님과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30여분 간의 긴 통화가 끝났다.

선생님 말씀의 요지는 아이가 잘할 때와 못할 때의 폭이 너무 크다는 것이었다. 잘하려고 마음먹었을 때는 글씨체부터가 다르다고 했다. 풀어온 숙제도 거의 다 맞는다고 했다. 그러나 대충 해야지, 또는 하기 싫거나 힘들 때 해 온 숙제는 그 필체부터가 다르다고 했다. 필체에 힘이 하나도 없고 글씨가 흐리고 풀이과정도 생략되어 있어 찍었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라고 하셨다. 높은 오답률은 물론이고 말이다.

수긍이 되었다. 집에서도 아들의 그런 모습을 익히 봐왔던 터였다.

선생님께 여쭤보았다.

"제가 어떤 방식으로 집에서 지도를 해야 이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까요?"

"집에서 숙제를 다 했다고 하면 매번 검토해 보시고 글씨체가 엉망이거나 풀이과정 없이 문제의 답을 찍은 것 같다고 보이시면 다시 문제를 풀게 해 주세요."

선생님의 해답은 명쾌했다.

"우리, 00 이가 다른 건 몰라도 나중에 사회생활은 잘할 거예요, 선생님들 한테도 뭔가를 잘못했을 땐 바로 사과드리고 열심히 하겠다고 다짐도 하고, 아이들과도 원만하게 잘 지내고 인사성도 밝고 그래요."

아이들 눈빛만 봐도 이 아이가 공부를 잘할지 못할지 꿰뚫어 본다고 소문이 자자 했던 그 학원 선생님은, 아들이 공부를 앞으로 잘할 학생이 될 거라는 말씀은 한 마디도 안 하셨다. 그렇지만 최근에 아들의 친한 친구가 그 학원에 새로 들어왔는데 밖에선 장난꾸러기지만 학원에서 공부할 때만큼은 태도가 진지하다며 아들이 그 친구를 보며 느끼는 점이 있었으면 참 좋겠다고 하셨다.

부끄럽고 부러웠다. 아들을 이렇게 밖에 못 키운 것 같아 잠시 부끄러웠으며, 진지한 태도를 가르친 남의 집 엄마가 부러웠다.


전화를 끊고 나서 숨을 고르고 마음을 진정시켰다.

이럴 때 써먹으려고 메모해 둔 책의 한 구절을 가만히 떠올렸다.

바로, '상실상상'이다.

상실 상상이란, 내가 가진 것을 상실했다고 상상해 보는 것이다. 될 수 있는 대로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시각화하는 게 좋다. 아이의 학습능력이 더 떨어져 허구언 날 50점을 받아온 다면 어떨까 상상해 본다. 시험지나 성적표를 눈앞에 그려보는 것이다. 많지 않은 재산이 절반쯤 줄어든다고 상상할 수도 있다. 욕심병의 좋은 치유책은 이런 상실 상상이다. 상실을 상상하면 현재 가진 것에 감사하게 되고 마음에 평화가 깃든다. 우리 부부는 이 상상력의 렌즈를 최대한 줌 아웃해서 더  멀리에서 우리의 삶을 보려고 노력했다. 아이가 속을 썩이든 아니든 그 아이와 함께 보낼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걸 상상했다. 눈 깜빡하고 나면 아이는 어른이 될 테고 또 한 번 깜빡하면 우리도 생을 다 할 것이다. 그렇게 상실을 상상하면 지금의 아이가 그저 소중하고 고맙다.......(중략)
출처:내 아이 살리는 잔소리 죽이는 잔소리 - 아이의 그릇을 키우는 43가지 비결, 정재영 이서진 지음, 센시오 출판사)


이 얼마나 멋진 방법인가? 우리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에 둘러싸여 평온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 그 순간순간에도 더 많은 것을, 더 좋은 것을 탐닉한다. 영원히 만족은 느낄 수 없으며 항상 배가 고프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었음을, 정갈하게 돌아가는 톱니바퀴처럼 우리를 둘러싼 조건들이 딱딱 맞아줘야 그저 아무 일 없는 평범한 하루를 보낼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잊고 살아간다. 뭔가 특별한 일, 재미있는 일이 없이 평범하게 먹고, 자고, 의자에 앉아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는 것도 어찌 보면 그 자체로 매일매일 행운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상실상상을 하다 보니, 우리 아이의 장점이 떠오른다.

일단 사회성이 좋다고 하니 성격이 원만하겠고, 마음만 먹으면 공부도 잘할 수 있는 능력도 있다.

다만, 아이가 기분에 따라 자신이 할 일을 대하는 태도의 온도차가 너무 심하지 않도록 다듬어주면 된다고 생각하니 마음도 가뿐해졌다. 어차피 모든 아이들이 도착해야 할 결승선은 같다. 다만 누가 더 빨리 도달하냐의 문제이지만 조금 천천히 가도 좋다. 가다가 못 가겠다고 뻗어버리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누구보다 아이를 믿고 아이 옆에서 든든한 동반자가 되어주고 싶다.


오늘 하루도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열심히, 때론 대충 살았다고 해도 땀을 뻘뻘 흘리며 집에 온 아이를 일단, 아무 말 없이 꼭 안아주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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