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키미킴 Aug 27. 2021

휴식의 가치 발견

휴식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용기의 이야기

생채기에서 얻는 교훈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참 많은 파도들을 만나는데, 여기에는 무력감을 안겨주는 큰 파도도 있고, 조그마한 짜증과 스트레스를 안겨주는 작은 파도들도 있다. 이럴 때마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아직 죽으려면 족히 80년은 남았는데, 내가 과연 무사히 잘 늙어서 죽을 수 있을까? 나는 나 자신과 참 많이 싸웠다.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나 자신이 답답하기도 했고, 나는 유난히 빨리 지치고, 많은 시간을 작업해도 적은 양 밖에 못해내는 것 같았다. 이런 울퉁불퉁 서투른 나를 데리고 높은 이상향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밸런스가 중요하다는 걸 깨달은 지 몇 년 되지 않았다. 삶의 균형에 대해 나에게 큰 교훈을 준 사건이 있었는데, 나의 이 경험을 공유하며 휴식을 어려워하고 있는 독자에게 기꺼이 쉴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전해주고 싶다. 


    나는 참 나에게 관대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것이 나 자신이 싫었다는 말은 아니다. 나 자신은 사랑스럽고 멋있고 다 좋지만, 나에게는 내가 이뤄내고 싶은 모습이 있었고, 지친 마음을 일일이 헤아려줄 여유는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씩씩 대며 달리다가 보니 우울증이 찾아왔다. 우울증의 모습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우울증은 비련의 여주인공이 된 것처럼 처량한 눈물을 흘리고, 비극적인 인생을 헤쳐 나가며 고통받는 모습을 띄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더 무덤덤한 쪽이랄까. 어쩌다 보니 병원에서 상담을 받고 있었고 의사 선생님은 나에게 자꾸 ‘영현 씨는 우울증을 앓고 있어요. 그것도 심각한 우울증이요.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첫 번째 단계입니다’라는 말을 반복했다. 나는 ‘저는 정말 우울증이 아닙니다. 저는 성격도 밝고, 하고 싶은 것도 많고, 해야 할 일도 많아요’라는 대꾸만 앵무새처럼 늘어놓았다. 이렇게 똑같은 대화를 2주 동안 매일매일 하고 나서야 ‘그래. 이쯤 했으면 내가 우울증일 수도 있겠다’라고 생각했다. 


    우울증 이후에는 번아웃이 찾아왔다. 텅 빈 눈으로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기간이었다. 다니던 학교는 자퇴했다. 학교에서 배우는 수업은 재미없었고, 고리타분했다. 과제를 제출할 순 있어도 재미있게 해낼 자신은 없었다. 그렇게 내 안에 해소되지 못한 응어리가 생겼고, 이걸 풀어내고 싶은데 어떻게 풀어내야 할지 그 방법을 몰랐다. 내가 되고 싶은 모습은 뚜렷하게 남아 있었으나, 어떤 길을 통해서 거기에 도달할 수 있는지는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뚱딴지처럼 런던으로 가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비이성적인 외침과도 같은 런던

    런던에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기 전의 나날들은 뚱뚱한 버터 한 뭉텅이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 순간도 있고, 매달, 심지어는 매년이 잘 구분이 되지 않는다. 그냥 ‘방황을 했었다’라는 여섯 글자로 밖에 잘 설명이 되지 않는 미끈하고 허여언 뭉텅이로 뭉쳐져 있는 모양새랄까. 그러나 ‘런던에 가야겠어’라는 말을 하고, 준비를 시작한 후부터는 기억들이 선명하다. 런던에서 공부하기 위해서 포트폴리오를 만들어야 했는데 그러려면 작업할 수 있는 스튜디오와 조언을 해줄 수 있는 튜터가 있는 학원에 다니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스튜디오에서 작업하는 동안은 매일매일이 행복했다. 스튜디오 이외에 다른 스케줄이 없으니 일단 마음이 여유로웠다. 스튜디오를 안 나가는 주말은 온전히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며 보낼 수 있는 날이었다. 혼자 내가 보고 싶은 전시도 보러 가고, 비 오는 날 카페에 책 한 권 들고 가서 멍 때리다가 책 읽다가 멍 때리다가 책 읽기를 반복했다. 밥 먹는 데에 15분 이상을 쓰기 싫어했던 내가 두 시간 동안 스튜를 끓여 대기도 했다. 그동안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몰랐던 응어리는 매일 스튜디오에 나가서 풀었고, 그때 디자이너 혹은 아티스트로서 이 세상에 물어 마땅한 질문을 묻겠다는 뜨거운 가슴도 얻었다. 그렇게 9월, 런던으로 출국했다. 엄마, 아빠와 나는 내가 그렇게 빨리 런던에 갈 것이라고 생각 못했다. 아빠는 ‘해외에 혼자 나가서 더 잘 사는 애들도 있다더라. 그게 우리 딸이면 좋겠다.’라는 말을 농담처럼 했다.


    왜 굳이 런던이었을까? 그리고 런던은 이때의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그때의 나는 할 줄 외국어가 영어밖에 없었고, 디자인으로 유명한 나라, 미국과 영국 중에 미국은 영국에 비해 학교 등록금이 두배이길래 고른 것이 이유라면 이유였다. 내 동생은 길을 걷다가 문득 소리를 크게 지르고 싶은 것과 같은 충동을 느끼곤 한다는데, 그만의 사회에 대한 소심한 반항이 라고 했다. 도보를 따라서 정해진 길로 얌전히 걷기 싫다는 것이 이유였다. 나의 런던행도 이와 같은 비이성적이고 충동적인 외침이었다. 나의 좁은 상식과 일상에서의 구원의 외침. 나의 이러한 선택에 대해 서울대에서 공부할 적 만난 한 학우가 해준 말이 있다. 무언가 중요한 결정을 내렸을 때, 그 의미는 바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많은 시간이 지나, 서서히 인생의 의미를 파악할 나이가 되면 그 의미는 자연스레 찾아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는 아마 수많은 경험을 해서, 인생을 자신만의 각도로, 하지만 한 가지 방향이 아닌 다양한 방향으로 볼 수 있을 때일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것이 어떠한 효과나 결과를 가져올지 모른 채, 그것의 진정한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채 인생의 중요한 선택을 한다는 것은 얼마나 구축주의적인 삶의 방식인가! 그때 나의 선택의 이유는 전혀 합리적이지 못했지만, 낯선 곳에서 홀로 살아가기라는 위기는 나로 하여금 스스로를 돌보게 했고, 낯선 곳은 우울한 삶과의 단절의 공간이 되어 주었다. 런던행을 준비하며 처음 경험해보았던 죄책감 없는 휴식은 일의 여백에서 성장하는 나의 모습을 발견하게 해 주었다. 런던에서도 이러한 균형 잡힌 삶을 유지하여 잘 지내기 위해서는 내가 무리하지 못하도록 관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지친 나를 잘 달래 가며 생활하기 위해 작성하기 시작한 것이 글의 후반부에 언급될 휴식 체크리스트이다.


인생 완주하기

    과거에 멈출 줄 모르고 계속 달리기만 하다가 다쳤던 경험은 내가 삶의 밸런스를 챙기게 된 것에 큰 영향을 주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내가 힘들어하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알았지만 멈추지 않았을 뿐이다. 대학 입시를 장기전이라고 하지만, 큰 인생의 관점에서 보면 그렇지도 않다. 대개 3년 혹은 길게는 4,5년이라는 시간 동안 대학 입학을 성공하는 것은 굉장히 직선적이고, 단기적인 목표이다. 성인이 된 후의 이야기는 다르다. 인성도 함양해야 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세상에 대한 감각도 키워야 하고, 전공과목을 공부함은 물론, 다양한 교양을 익힘에 이어, 독립하는 법도 터득해야 한다. 더 나아가, 내가 어떠한 형식의 일을 할 것 인지, 어느 나라에서 살 것인지, 내 주변은 어떤 사람으로 채울 것인지 등등 많은 자유가 우리에게 주어진다. 이렇게 자유도가 높은 장기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나의 선택이 ‘지속 가능한지’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당장 몇 년을 버틴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지치지 않고 무사히 어른으로 성장해 즐거운 인생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죽기 전까지 재미있게 인생을 살아낼 수 있을까? 밸런스를 챙기며 지속 가능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스스로가 힘들 때 알아차리는 것, 둘째, 알아차린 후 속도를 조절하는 것. 첫째는 비교적 쉽다. 작업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심해, 시간을 들인 것 대비 효율이 낮을 때, 주변 사람들이 나에게 서운함을 느끼는 빈도가 잦아질 때, 내가 건강을 잃어갈 때가 힘들 때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을 알아차리고 속도를 조절하는 것이 조금 더 까다롭다. 머리로는 알아도 마음이, 특히 현실적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마음이, 이것을 참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100점 아니면 안 해’라는 마음을 내려놓고 ‘50점도 좋아’라는 마음을 가져볼 필요가 있다. 매번 100점만 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위에서 말했던 다른 배움을 소홀히 할 수밖에 없다. 학교 안에서의 공부도 중요하지만, 학교 밖에서의 공부도 내가 건강한 어른으로 성장하는 데 있어 꼭 필요한 공부이기 때문에, 넓은 관점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나의 예를 들어보자면, 학교에서 하는 디자인 전공 공부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 외에 개인 프로젝트를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스스로 진행해 보는 경험, 좋은 공간에서 좋은 요리를 먹으며 행복을 느껴보는 경험, 나의 진정한 영화나 책의 취향을 알아가 보는 경험, 유명한 작가의 작품을 미술사 책에서 텍스트로만 공부하는 것이 아닌, 실제로 가서 보는 경험, 모임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 산뜻한 대화를 하는 경험들도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러한 요소들이 같은 전공을 공부하는 학생 사이에서 나의 개성을 만들어 주고, 이를 통해서 같은 주제를 보고도 남들과 다르게 접근하고, 다른 해석을 내놓게 되기 때문이다.


    이 관점에서 조금 더 이야기해 보자면, 인간은 다양한 인풋들이 아카이브 된 지적 존재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같은 학과 친구들과 듣는 수업에서 오는 공통의 인풋이 있고, 그 이외에 내가 추가로 공부하여 받아들인 지식, 넷플릭스에서 흥미롭게 본 다큐멘터리, 내가 우연히 읽게 된 책 등 고유의 인풋도 있다. 이러한 다양한 인풋들이 아카이브 되어 나의 고유성이 되고, 이러한 고유성은 창의성으로 읽히기도 한다. 창의성, 독창성은 비단 미술 분야뿐만 아니라 어느 학과에서나 요구하는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참신한 아이디어, 색다른 접근과 해석은 (이번 인문학 글쓰기 시간에서도 언급되었지만) 다른 분야에서도 빈번하게 언급된다. 가령 회사에서 미팅 중 ‘이런 것들 말고, 좀 새로운 거 없어요? 젊은 사람의 시각으로 본 색다른 접근법이요’라고 묻는 팀장님의 얼굴이 자연스럽게 그려지기도 한다. 다른 사람과 나의 차이점을 만들어 주는 것, 같은 정보와 기술을 가지고도 다른 아웃풋을 내는 것은 삶의 여백에서 성장한 나 고유의 모습에 있다. 이처럼 휴식은 지속 가능한 삶을 위해, 다양한 배움을 총체적으로 경험하기 위해 그리고 나만의 독창성을 위해서 꼭 필요하다.


게으름의 날과 휴식 체크리스트

    지금은 휴식의 중요성을 이렇게 글로 쓰고 있지만 과거에는 ‘게으름의 날’이라는 가상의 공휴일을 만들어 포스터(사진 1)로 홍보를 한적 있다. 11월 11일, 한국에서는 빼빼로 데이로 알려져 있지만, 11/11이 일시정지 버튼 두 개가 나란히 있는 모양새를 닮았다고 생각하여 이 날로 정했다. 게으름의 날을 홍보하는 포스터를 만들어 신사동 가로수길 일대에 약 50장 정도를 붙이고 다녔다. 사람들이 게으름과 휴식의 가치를 발견하고, 죄책감 없이 휴식을 즐겼으면 하는 마음에서 시작된 작업이었다. 포스터 하단의 오징어 다리에는 게으름 체크리스트도 만들어서 게으르기 위해 바삐 움직여야 한다는 모순도 만들어보았다.

사진 1. Get Lazy 한국어 버전 포스터 (2019)


    지금껏 쉬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해 보았다면, 마무리로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잘 쉴 수 있는지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휴식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로 인식하기보다는, 휴식도 내가 해야 하는 것 중 하나로 생각하면 조금 도움이 된다. (위 작업에서도 ‘바삐 게으르자!’를 실천한다.) 그래서 평소에 내가 하면 기분이 즉시 좋아지는 행동들로 체크리스트도 만들어 두었다가 쉬어야 할 때 마음이 내키는 것을 하나 골라 시도해보는 것이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휴식을 위한 물리적인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진행하고 있는 일의 양을 줄여보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겠지만, 그것이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술과 게임을 줄여보라고 권하고 싶다. 술은 마실 때에도 시간이 정말 빨리 가지만, 그다음 날도 영향을 받기 때문에 잡아먹는 시간이 많다. 게임은 하다 보면 유독 시간이 정말 빠르게 가는데, 영화 두 편을 연달아 보는 건 힘들면서도 게임하며 보내는 4시간은 정말 훌쩍 가버리고 만다. 그래서 게임과 술을 조금 줄이고 다른 방식으로 휴식을 취해보는 것을 조심스럽게 권해본다. 나의 휴식 체크리스트의 일부를 공유하며 글을 마칠까 한다. 이 글이 독자들에게 다채로운 휴식의 영감을 가져다주길 바란다.


*이 글은 서울대학교 인문학 글쓰기 수업에서 작성한 글입니다. 글에 언급된 최우성 학우를 포함한 다른 학우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휴식 체크리스트

#1 공원이나 초록색을 볼 수 있는 곳에서 산책하기

#2 요가-좋아하는 향을 피우고 자연의 소리나 종소리, 바닷가 소리를 차분히 들으며 요가하기

#3 햇빛 만끽하기- 조깅하거나 땀 흘리며 운동 안 해도 좋으니 돌아다니며 햇빛 받기. 돌아오고 싶을 때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는 거리까지만 나가기

#4 다양한 종류의 초콜릿 사서 조금씩 여러 개 맛보기

#5 어렸을 때 즐겨 읽던 동화책 영상 유튜브에서 찾아보기

#6 시트러스 향, 아로마 향, 바닐라 향 맡기

#7 바디 워시 제품을 러쉬나 조 말론의 다른 향으로 바꿔보기

#8 욕조 있는 방 잡고 혼자 (혹은 친구와) 놀러 가서 거품목욕하고 영화 보면서 치맥 하기

#9 감사할 일 찾아보기-오늘 하루는 짜증 나는 하루였을 수 있지만 내가 얼마나 멋진 인생, 멋진 환경에서 사는 멋진 사람인지 생각하기

#10 새로운 쿠키 레시피 시도해보기

#11 지점토나 아이클레이로 귀여운 것 만들기

#12 픽사 단편 애니메이션 몰아보기

#13 고구마 맛탕 만들기

#14 재미있는 그림이 잔뜩 들어간 어린이용 그림책이나 그래픽 노블 사서 읽기

#15 친구들과 줌을 통해 만나 같이 저녁 먹기

#16 하고 싶었던 DIY 도전하기

#17 봐야 하는 전시 말고, 보고 싶은 전시 보러 가기

#18 필독도서 말고, 서점에서 표지만 보고 고른 책 읽어 보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