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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미킴 Dec 15. 2023

덜 부끄러운 고백

서울대학교 설치 1 과목 교수님께

교수님 안녕하세요? 그동안 잘 지내셨는지 궁금합니다. 2021년 봄바람맞으면서 학교 캠퍼스를 걸어 다닐 때가 엊그제 같았는데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이제 따님은 유치원을 졸업했나요? 아니면 아직 한창 다니고 있으려 나요?


교수님과 설치 1 수업을 공부하고 나서 그동안 많은 고민을 하면서 작업을 했습니다. ‘정수’그리고 ‘성숙’ 이 두 가지 키워드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했는데요, 저 나름대로의 답을 찾은 것 같아 기쁜 마음으로 글을 씁니다.


저는 그동안 제 작업에서 할 말이 너무 많은 것이 고민이었는데요, 내가 하고 싶은 말들은 어떻게 추려내야 하는 것인지 그 기준을 세우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또한, 하고 싶은 말의 양이 많은 것도 문제지만 동시에 ‘내가 이런 말을 해도 되는 사람인가? 내가 감히?’라는 내가 하는 말의 질에 대한 것도 문제였습니다.


추려 내기는 시간성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4-4=0이라는 수식에서의 ‘0’과 8-8=0이라는 수식에서의 ‘0’은 같은 것 인지, 수학에는 시간성이 있는 것인지에 대해 혼자 고민해 봤는데요, 그렇게 자가 소거되는 것들을 제외하고 나면, 정말 중 요한, essence, 즉 정수만 남겠구나 하고 깨달았습니다. 그렇지만, 삶은 시간을 따라 흐릅니다. 저의 관심은 추상적인 개 념보다는 구체적인 사람들이 사는 삶에 있었으니 (저는 장애인 성매매, 연인사이에서 일어난 성폭력, 이런 것들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많은 시간들을 다루어야 했고, 그러니 할 말이 많은 것이었습니다. 지금 저는 삶과 시간, 내가 하는 말의 내 용과 양의 밸런스를 맞추는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 연습은 제가 고민해 왔던 두 번째 키워드 성숙으로 이어지는데요, 저는 ‘내 생각의 퀄리티가 작업의 퀄리티를 결정하는 것 같아 어떠한 의견을 가지기에도 겁이 나’는 상태를 로잘린드 크라우스의 reinventing the medium 논고를 중심으로 해답을 찾았습니다. (제 졸업 논문도 이 주제였습니다. 멋진 공부 경험이었어요!) 작업의 형식은 무시한 채, 주제와 메시지에만 열중하다 보니 이와 같은 고민에 봉착했던 것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아무런 미술 매체도 다룰 줄 몰랐었고, 그러다 보니 내용만 생각했었고, 결국 밸런스가 깨졌던 것이었어요. (헉. 그래서 저는 설치 수업을 듣고 싶었었고, 교수님 은 저에게 브리콜라주를 가르쳐 주셨던 것이었군요! 이미 중요한 것들은 다 나에게 있고, 그것을 잘 알아보고 포착하는 법을 향해 저를 이끌어주려고 하셨던 것이었어요.)


저는 교수님 수업을 듣기 전까지 저는 디자인하는 학생이라고 생각해 왔어요. 솔직히 교수님 수업 수강신청을 했을 때는 감히? 내가? 예술을?이라는 겁이 나기도 했습니다. 교수님 덕분에 제 불안과 긴장이 풀어졌습니다. 디자인에만 매달려 있지 않고, 파인 아트와 디자인에 선을 긋지 않고 유연하게 부드럽게 잘 넘어올 수 있었습니다. 잘 받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요즘 눈:카메라=거울:? 의 공식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거울을 통해서 보고 있는 이 이미지를 어떻게 거울 밖으로 가져가지? 그러한 장치를 만들 수 있나? 아니면 장치의 결과 값이라도?<< 히히.


저는 살기 위해서 예술을 한다고 생각해 왔고, 그래서 예술에게 늘 감사함을 느꼈는데, 살다 보니 삶이 예술이 되더군요. 저는 그렇게 소설을 읽어대다가 제가 좋아하던 소설 같은 삶을 살게 되었어요. 그 삶을 다시 소설로 쓰니까 사람들이 좋아합니다. 왜 인지 부끄러워서, 사실은 에세이/일기이지만 등장인물의 이름만 바꿔서 소설이라고 인스타그램에 올리고 있어 요. 작업도 마찬가지입니다. 괜스레 “작업입니다”라는 문구를 붙이게 되어요. 저를 아는 친구들은 제 소설이 실제 이야 기인 것을 아니까 더 재미있어서 잘 읽고 있다고 해주는데, “픽션과 논픽션의 구분은 사실이냐 사실이 아니냐 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내가 하는 말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인지를 알려고 하는 것보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들으려고 해야 할 것이다. 들으려고 한다고 들어지는 것은 아니지만.”이라고 답변을 해주었습니다.


교수님은 이미 제가 하는 말들을 다 아실 것이라 생각되고, 그러기에 저는 이 글을 쓸 필요도 없었겠지요. 시간과 함께 제가 하는 말도 없어지고, 일들은 일어나기 전부터 이미 끝나 있고, 과거와 미래는 현재를 기점으로 접혀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 편지를 쓰는 이유는 사랑인 것 같습니다. 예술에 대한 사랑이요. 그리고 교수님에 대한 고마움이요! 런 던도 이제 서울처럼 바람이 불지 않아도 매섭게 춥습니다. 교수님이 멋지고 따뜻한 겨울 그리고 연말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저도 그럴게요. 행복하세요. 감사합니다.


2023년 12월 7일 런던에서

김영현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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