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정가악회 <탈춤은 탈춤>
“애도, 신명이 이른 또하나의 길”
탈춤이 콘서트 무대에 올랐다. 고성오광대 전과장을 정가악회가 지은 음악에 실어 춤도 가꾸고 이야기도 새롭게 꾸민 작품이다.
정가악회는 이 공연을 위해 고성으로 전수를 다녀왔다고 한다. 아무리 좋은 것도 직접 경험해 보지 않으면 제대로 알기 어려운 법. 몸으로 겪어 춤을 만났으니 음악이 그려지고 담아낼 이야기들이 떠올랐을 것이다. 몸각이 지어낸 소리와 이야기라면 듣고 싶은 이유가 충분하다.
상여소리로 콘서트가 시작됐다. 고성오광대 탈놀이는 제5과장에서 큰어미가 죽고 사람들이 상여를 매고 나가면서 끝이 난다. 그 마지막의 마지막에 들려오는 소리가 상여소리다. 작은어미가 아들을 낳고 큰어미가 죽는 생의 시작과 끝이 공존하며 서로 엇섞이는 찰나에 부르는 노래라고 할 수 있다. 슬프다 기쁘다 어느 한편으로 규정할 수 없는 소리일텐데 정가악회는 밝았다. 지평선에 걸린 해를 지는 해가 아닌 뜨는 해로 볼 수 있는 밝음. 그 해맑음으로 인사하고 무대를 정화한다.
역병퇴치를 위한 액풀이(황봉사와 큰어미, 마당쇠)와 나부끼는 존재를 부여잡는 관계맺음(비비와 사자), 하늘에 닿을 듯 힘찬 기상으로 날아오르는 세 말뚝이의 다채로움과 응원가, 형형색색 화려한 군무로 양반의 기치를 드높인 춤, 그림자로 드러난 장삼의 투명한 떨침, 음악과 춤이 보여주는 그 모두를 가로질러 마음이 멈춰선 곳은 바로 ‘문둥이’ 였다.
탈춤의 압권은 병신춤이라고 하신 어느 스승의 말씀에 깊이 공감한다. 뜻하는 바가 넓고 깊다. 들여다 볼수록 뜻 밖이다. 아직 다 못 본 듯하고 이해하지 못한 듯하고 누리지 못한 듯하다. 내 안에 많은 것들이 전율하고 안도하고 희망한다. 균열과 탈주, 유랑을 일으킨다. 그래서였을까 문둥이가 마음에 걸렸다.
그 시절 문둥이는 오늘날 누구일까 많이 생각했다. 단순히 몸의 질곡을 가진 이라기보다 사회적 약자, 소수자, 마음병 앓는 이들일수도 있겠다 생각한 적은 있다. 하지만 약자를 특정하는 경계와 구도를 만드는 건 탈춤이 아니기에 그 시절 문둥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놀고 살 수 있었던 ‘하나됨’이란 공동의 신념, 가치토대를 놓치지 말아야겠다 생각했다
질곡은 사회구조의 문제이고 불치병은 어떤 힘의 문제일 것이다. ‘생명됨’에 주목하지 않으면 그 감수성을 일깨우지 않으면 누구에게나 언제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다.
“불로초로 술을 빚어…”
문둥이는 19살 노동자다. 지하철 안전문을 수리하다 숨진, 가방에 컵라면을 넣어다니며 끼니를 때우던 젊은이다. 불로초라니, 죽는 건 되지만 늙는 건 안된다는 말 같아 쓰라리다. 값싸고 부리기 좋은 젊음을 강요하는 것 같아 쓰라리다. 그가 뭉그러지고 떨리는 손으로 그토록 잡고 싶어했던 것은 술병에 꽂힌 국화꽃 한송이였다. 고단하고 척박한 삶을 버틸 수 있는 것은 누군가를 향한 애도이며 죽음을 기억하는 것이라고, 절름발을 끌고 다음을 내딛일 수 있도록 죽음이 삶으로 다시 피어날 수 있도록 간절한 국화꽃 한송이를 올리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렇다. 죽음이 삶을 일으킨다. 이것은 탈춤이 일관되게 증명해내고 있는 신비이자 진리다.
탈춤은 탈춤이고 역시는 역시다. 오랜 세월 춤으로 신명을 몸에 새긴 고성오광대 선생님들. 역병으로 지친 우리를 달래러 선물을 전해주셨다. 흥이 넘치고 넘친다. 이렇게 어우러져 한바탕 춤추고 나면 다시 살고 싶어진다. 신명이 바다를 덮고 온 땅 가득하길. 잇고 또 잇고 이어지길. 이미 충분하다.
사진 출처 / 문화예술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