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부터 숨어들어온 모기 한 마리를 잡으며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오디오에서 ‘Darius Rucker의 Beers and Sunshine’이 흘러나왔다. 그날의 낮 최고온도는 28도. 자동차 에어컨을 약하게 틀고 있었다. 우리는 부모님과 동생이 있는 경남 함안으로 내려가는 중이었다.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마을로 가는 길에서 창문을 내리니 비를 기다리는 논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했는데, 얼마전 모내기를 한 논과 아직 말라있는 밭이 번갈아가며 있어서였다. 축축한 공기에는 풀냄새가 섞여있었다.
자동차가 캄캄한 마을 입구로 들어서자 불빛을 받은 노란 금계국 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마을교회와 고향집 담장에는 장미꽃이 피어있고 그 옆에는 앵두열매가 반쯤 빨개진 채로 가지에 달려있다. 시골에 가니 여름이 다가오는 게 온 감각으로 느껴졌다. 살짝 흥분이 되었다.
나는 여름이 좋다.
추운 걸 싫어하니 자연스럽게 여름에게로 마음이 기울 수밖에 없었다. 좋아하고 보니 여름의 매력은 끝이 없다. 파란 하늘과 초록으로 물든 산, 여름밤과 새소리, 샤워 후 맞는 바람의 상쾌함, 향긋한 복숭아와 스타벅스의 아이스라임패션티까지.
단점으로는 장마를 꼽을 수 있는데 그마저도 요즘엔 장점으로 바뀌고 있다. 공기 중이나 건물, 도로 위에 내려앉은 먼지를 물로 씻어내 주는 느낌이 좋기 때문이다. 또 따져보면 눈보다는 비가 훨씬 낫다. 이제 남은 단점을 굳이 찾자면 양볼의 주근깨가 진해진다는 것 정도다.
“니는 뱀띠라고 겨울에는 잠만 자나?”
엄마가 나를 보고 종종 하는 말이다. 원래가 잠이 많은 나는 밤이 긴 겨울에는 모든 의욕을 잃고 더욱 이불 속으로 파고든다. 워킹맘으로 주어진 역할이 많은 요즘은 어쩔 수 없이 많은 일들을 해내고 있지만, 여전히 부지런한 사람들의 활동량 절반에나 미칠까하고 생각한다.
봄비가 내려 새싹이 돋을 즈음 내 에너지는 조금씩 채워지기 시작한다. 낮시간이 길어 퇴근 후에도 해가 지지 않으면 이것저것 새로운 걸 해볼 궁리도 한다. 나는 낙엽수와 같은 바이오리듬을 가진 것이 아닐까하고 생각한다. 기온이 오를 때 새싹을 틔워 여름 내내 푸르다가, 다시 쌀쌀한 바람이 불어오면 마지막 에너지를 빨강잎, 노랑잎으로 모두 발산해버리고 말라비틀어지는 것이 내 모습과 꼭 닮았다. 물론 상록수처럼 사계절 내내 초록빛을 유지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다른 종의 인류처럼 느껴진다.
대학생의 마지막 여름방학,
고향집에 내려와 며칠을 보내고 학기 준비를 위해 고시원으로 돌아가기 전날이었다. 마지막 학기를 남기고 나도 친구들처럼 휴학을 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딱 네 살 차이 나는 동생의 대학입학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방학동안에도 학교 주변과 함안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죽어라 공부만 한 것도 아니었는데, 이렇게나 작은 일탈도 하지 않았던 게 후회가 됐다.
다음날 나는 함안에서 용인으로 가는 노선을 변경하여 보성역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첫번째 목적지는 녹차밭이었고 다음으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솔밭해수욕장에 들러 발을 담갔다. 시외버스를 타고 담양으로 가서는 불고기 맛집에서 혼자 쌈까지 싸며 맛있게 먹은 후 찜질방으로 갔다.
밤에 친구와 통화하는데 혼자서 무섭지도 않냐고 했다. 그제서야 ‘찜질방이라도 여자 혼자는 좀 무서우려나. 전날 위험하다고 말리던 엄마는 걱정 많이 하고 계시겠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무서움보다는 피곤함이 컸던지 예상보다 아늑한 수면실에서 푹 자고 일어났다.
혼자라서 어색했던 것은 오히려 목욕탕이었다. 온탕 안에 우두커니 혼자 앉아 있는 경험이 처음이었던 것이다. 머릿속으로 씻는 순서를 되짚었던 기억이 난다.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데 괜히 어색해보이지 않으려고 그랬던 거다.
이튿날 죽녹원에서 나처럼 혼자 여행 온 언니를 만났다. 공무원시험을 준비 중인 언니는 머리를 식힐 겸 왔다고 했다. 담양 관광 후 우리는 광주로 가는 버스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광주터미널에서 다시 혼자가 된 나는 용인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이것이 내가 혼자 했던 첫번째이자 마지막 여행이었다. 돌아간 대학 연구실에서 미래의 남편이 될 복학생 선배를 만난 덕분(?)에 더이상 혼자만의 여행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 선배가 남자친구가 된 후 해준 이야기인데, 처음 인사한 날 샌들자국으로 빨갛게 탄 내 발이 인상에 남았다고 했다. ‘재밌는 여행을 하고 왔구나.’라고 생각했다고.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다고 할 수 있는 여름은 2015년의 여름이었다. 그 때 나는 더위를 타는 사람이 얼마나 괴롭게 혼자만의 싸움을 하는지 알게 되었는데, 뱃속에 있던 열이 많은 아들 덕분이었다. 만삭 때도 아닌데 유난히 많이 나온 배로 몸도 무거운 데다 열은 왜 그렇게 오르는지. 추운 게 문제지 더운 건 잘 견딘다며 에어컨도 없던 신혼집의 거실 바닥에 널브러진 채로 밤을 보냈다.
좋아하는 여름의 기억을 떠올려보니
사소한 부분은 많이 잊혀져버렸다.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과 어떤 대화를 했는지. 학생으로서의 마지막 학기를 남기고 떠난 혼자만의 여행에서 나는 어떤 고민을 하고 있었는지. 열도 많고 땀도 많은 아이가 태어나 처음 맞은 여름을 어떻게 보냈는지. 사진만으로는 떠올릴 수 없는 기억들이 있다. 또 말이나 글을 통해 밖으로 꺼내지 않으면 스스로도 알 수 없는 내면의 마음상태 같은 것도 분명 있다. 어쩌다 그 선배와 결혼까지 하게 됐는지 당시의 상태 같은 것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올해 여름을 위한 준비는 잘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어떤 마음으로 뜨거운 날들을 보내고 있는지 글에 담겨질 예정이니까. 또 올해 겨울에는 이불 속의 내가 도대체 어떤 상상을 하며 밤을 보내는지도 알 수 있게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