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인문학 이야기꾼 Nov 20. 2023

외롭지 않게 사는 법

이재무, <겨울나무>

        겨울나무

                        -이재무     


    이파리 무성할 때는

    서로가 잘 뵈지 않더니

    하늘조차 스스로 가려

    발밑 어둡더니

    바람 매 맞으며

    숭숭 구멍 뚫린 한 세월

    줄기와 가지로만 견뎌보자니

    보이는구나, 저만큼 멀어진 친구

    이만큼 가까워진 이웃

    외로워서 더욱 단단한 겨울나무          


  이파리 무성하던 여름 나무는 스스로 하늘을 가려 하늘을 보지 못했습니다. 해와 달과 별이 얼마나 밝고 맑고 아름다운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모든 것을 다 가진 듯 풍성했으니까요. 여름 나무는 무성한 이파리 때문에 어두워진 발밑도 보지 못했습니다. 발밑에서 여름 한낮을 쉬어가는 나그네를 보지 못했고 개미에게도 자신의 그늘을 내줄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여름 나무는 스스로를 가려서 이웃에 있는 나무도 보지 못했습니다. 이웃 나무가 제대로 크고 있는지 이웃 나무에는 어떤 새들이 날아와 앉는지를 볼 생각을 못했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몸에 어떤 새들이 집을 짓고 사는지에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하늘에 닿을 듯 자신이 최고인 줄 알았고 자신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늦가을 스산한 바람 맞으며 무성했던 이파리 하나둘 떨어져 줄기와 가지만 남았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보입니다. 하늘도 보이고 해도 달도 별도 보입니다. 자신이 품고 있던 새의 보금자리도 보이고 이웃 나무의 허전함도 보입니다. 자신을 스치고 지나가는 겨울바람도 보입니다. 발밑을 지나다니는 나그네도 개미의 행렬도 이제 보입니다. 그들에게 이제는 나누어 줄 것이 없습니다. 여름 햇빛을 가려줄 이파리도 없고 바람에 펄럭이던 이파리의 노래도 들려줄 수 없습니다.   

   

  ‘갑을 관계’라는 말이 있습니다. 원래 순서를 지칭하는 용어였으나, 지금은 대부분 주종 관계나 상하 관계로 쓰입니다. 여름 나무는 ‘갑’의 위치에 있었으나 겨울이 된 이제는 ‘을’이 되었습니다. 을이 되고 보니 모든 을이 더 가깝게 느껴집니다. 겨울나무는 외롭지만 곁에 겨울 바람도 있고 외로운 이웃 나무도 있어서 외롭지 않습니다.      

  내년 이파리 무성해지는 여름에는 갑이 아닌 을의 위치에서 발밑을 지나다니는 길손에게 뜨거운 여름 햇빛 막아주고, 비바람도 막아주면서 여름부터 외롭지 않은 나무가 되길 다짐해 봅니다.

작가의 이전글 늙음이 삶의 자산이 되는 이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