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번째. 절망이 자살을 보류하게 한다
엄마의 죽음 직후에 기존의 나의 가치관이나 생각들은 많은 부분 바뀌었거나 일부 수정되었다. 몇 가지 나열해 보자면 이렇게 써볼 수 있을 듯하다.
삶과 죽음은 맞닿아 있다.
모든 인간은 나약하며, 이기적이므로 서로가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세상에서 ‘~한 일은 절대 있을 수 없어’ 란 없다.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
인생은 고통의 연속이다.
위에 적어둔 나의 바뀐 가치관에 한 가지 더 덧붙여보자면 나는 더 이상 죽음이 두렵지가 않다.
사람이 언제 어떻게 죽는다 해도 이상하지 않게 느껴진다.
나와 내 주변 사람, 또 이 세상 사람 모두가 말이다.
'아우슈비츠 수감자들은 첫 번째 단계에서 충격을 받은 나머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됐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면 가스실조차 더 이상 두렵지 않게 된다. 오히려 가스실이 있다는 사실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살을 보류하게 했다. '-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중에서
빅터 프랭클은 정신과 의사로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 잡혀 들어가 거의 모든 가족을 잃고, 또 살아남아 본인이 수용소 내에서(죽음의 문 앞에서) 느꼈던 것들을 담은 경험담을 책으로 썼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심지어는 가장 비참한 상황에서도 삶이 잠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구체적인 예를 통해 전달하려 이 책을 썼다고 했다.
절망이 자살을 보류하게 한다.
나는 이 문구를 읽고 마음속으로 공감했다. 그렇게 자살에 대한 나의 생각 또한 바뀐 것이다.
이전의 나는 ‘자살은 절대 해서는 안된다’라는 생각을 했었다면, 지금은 ‘삶의 의미를 찾아 자살을 하지 말자’로 바뀌었달까.
나에게 있어 더 이상 죽음이 두렵지 않은 것이었으니 절망은 이미 나에게 다가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갑작스럽게 사고를 당해 죽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런 일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사람은 인생에 감사함을 느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생각보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인해 고통스러워하거나 삶에 대한 허무를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삶과 죽음이 가까이 맞닿아있는 것을 직접 체험했기에 그럴 것이다.
사고의 생존자들이 느끼는 것이 "삶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라면, 주변인의 자살을 겪은 사람은 "삶은 언제든 놓아버리고 죽을 수도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사고 트라우마로 인한 인생의 불확실함 그것을 뛰어넘어 죽음에 대한 어떠한 확신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자살 유가족들의 자살률이 유가족이 아닌 사람들에 비해 높다는 것과 자살의 '전염'에 대한 이유도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본다.
아마도 가족의 자살은 수용소 가스실의 존재만큼이나 우리에게 큰 공포와 충격을 주는 일이었던 것 같다.
살아가는 것 자체에 대한 허망함과 공포를 안겨주는 그런 것 말이다. 더 무서운 것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선택지 하나를 더 내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친듯이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 나는 다시 한번 삶의 의미를 찾아 해맸다.
'글로 쓰고 말할 수 있는 아픔은 , 무엇이든 이겨낼 수 있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나는 내가, 또 나와 같은 일을 겪은 모든 사람들이 얼마나 큰 아픔을 겪고 있는지에 대해 말하고 싶다.
그것은 단순히 글을 쓰고 말을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누군가에게 나의 아픔을 공유하고 도와달라고 말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용기를 내었을 때 손을 잡아주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
결국엔 '사랑'만이 그 모든 아픔을 구원할 것이라는 것.
이것이 내가 찾은 삶의 의미이다. 삶의 의미는 일단 찾았으니, 이제는 '살' 차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