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결국, 함께 걷는 산행입니다
그 시절, 계곡집 너른 마당엔 자주 텐트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흙냄새를 맡으며 텐트 속에서 스르르 잠들곤 했지요.
산바람, 계곡물소리, 홍매화, 라일락, 조팝나무, 화살나무...
계절 따라 물들며 그렇게 일곱 해를 살았습니다.
자연을 닮아가는 아이들을 바라보다가
어느새 나도 그 풍경 속에 스며들고 있었습니다.
산길을 오르기 시작한 건, 어쩌면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었지요.
그 무렵, 마음 맞는 학부모들과 가끔 산을 올랐습니다.
마을 뒷산에서부터 도시 근교의 제법 높은 산까지.
다양한 코스를 함께 걸었습니다.
약속이 잡히면 배낭에 간식을 챙기고,
산 아래 주차장에서 설렘 가득한 얼굴로 마주했지요.
등산시작과 함께 처음엔 가볍던 발걸음도
십 분이 채 지나지 않아 금세 무거워졌습니다.
손발은 붓고, 심장은 터질 듯 뛰었지요.
앞서가는 이들의 발뒤꿈치만 쫓으며 헉헉거리던 그 길은
내게 작고도 고된 순례길 같았습니다.
날다람쥐처럼 산을 타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뒤처진 채 느릿하게 발을 옮겼지요.
마치 집 잃은 민달팽이처럼요.
어느 순간, 시야에서 일행들이 사라지면 ‘아, 쉼터가 가까워졌구나’ 를 느낍니다.
먼저 도착한 이들은 배낭을 풀고 간식을 꺼내며
여유로운 미소로 저를 기다려줍니다.
'에고, 살았다.'
숨을 고르는 사이, 따뜻한 커피 한 잔과 달콤한 과일이 손에 들려옵니다.
허겁지겁 입에 한입 넣고 나서야
비로소 눈이 떠지고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나는 늘 몇 걸음쯤 뒤에서 숨을 고르던 사람이었습니다.
둘레길조차도 제게는 그리 만만하지 않았지요.
그럼에도 함께 걷는 즐거움에 이끌려 어느새 산길을 오르게 되었고,
중턱 어딘가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잠시 멈춰 바라본 풍경은 나름의 깊이와 위로를 안겨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순간도 잠시였습니다.
나는 여전히 '등산이 언제쯤 끝날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지요.
지친 몸과 마음은 눈앞의 아름다움조차 온전히 담아내지 못했습니다.
그 시절 나는, 아직 산의 참맛을 모르는 초보 등산객이었습니다.
이제야 겨우 중턱쯤, 쉼터에 닿은 기분입니다.
돌아보면 꼭대기만을 향해 오르느라
무엇이 소중한지도 모른 채 정신없이 걷던 날들이었지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올라온 나 자신이
문득 대견하게 느껴집니다.
쉼터에 앉아 땀을 식히다 보면
자연스레 기지개가 켜지고, 등이 펴집니다.
그제야 풍경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그동안 스쳐 지나던 풍경이 선명해지고,
놓쳤던 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옵니다.
잠시 멈추었을 뿐인데,
세상이 새롭게 열리는 기분입니다.
쉼은 나를 더 깊고 풍요롭게 만들어줍니다.
꼭 앞서 가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도, 이제야 알겠습니다.
결국 우리는 모두,
같은 쉼터에서 한 번쯤은 마주치게 되어 있으니까요.
같은 길을 걷더라도,
눈에 담기는 풍경은 저마다 다릅니다.
사람은 마음의 깊이만큼 세상을 보고,
자신이 지닌 색으로 자연을 받아들이지요.
그래서 쉼터에서 오가는 짧은 말에도 각자의 삶이 묻어납니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가
내 안의 닫힌 창을 열고,
그 틈으로 보지 못했던 세계가 스며들기도 하지요.
나는 그렇게,
말에 담긴 기운을 건네받고,
그 힘으로 다시 길을 걸어갑니다.
그렇게 건네받은 말 한마디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습니다.
시간이 흘러도 잊히지 않고,
어떤 날엔 불쑥 떠올라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웠지요.
그럴 때마다 조용히 되묻게 됩니다.
“나는 지금,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가끔은 스스로에게조차 의미 없다고 말하고,
아무것도 해낼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밀려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말은 산길에 흔히 마주치는 돌부리처럼,
슬쩍 뛰어넘으면 그만입니다.
누구에게나 자기 생의 고유한 빛깔이 있습니다.
그 안에는 오직 자신만이 만들어낼 무언가가 담겨 있지요.
아직 모르겠다고요?
어쩌면, 이미 찾았는지도 모릅니다.
의심은 황금도 돌멩이로 바꿔버리는 고얀 심술입니다.
믿어보세요.
당신 안의 가능성을.
정상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습니다.
이제는 서두르지 않으려 합니다.
걷다 보니, 산을 타는 요령도 조금은 익숙해졌고,
보폭이 맞는 사람들도 곁에 생겼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함께 배우고 천천히 나아가는 걸음이면 충분합니다.
지금까지 스쳐 간 고마운 얼굴들이 떠오릅니다.
알든 모르든, 당신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습니다.
이제는 나도
힘들 때 손 내밀어 줄 수 있는
그런 괜찮은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
그렇게 걷다 보면,
언젠가 정상에서 함께 웃게 될 날도 오겠지요.
인생은 알고 보면
보물 같은 인연들과 함께 걷는 긴 산행입니다.
정상에서 만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