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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세곡 Dec 06. 2024

드라마 '트렁크'가 던진 우리 시대의결혼에 대하여

넷플릭스 드라마 - '트렁크' 스포일러 리뷰

          ▲서명하는 순간, 1년 짜리 결혼 계약이 성사된다.넷플릭스



(* 이 글은 드라마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드라마 <트렁크>가 공개됐다. 총 8회로 구성된 이 드라마는 멜로의 장인 공유와 로코의 여왕 서현진이 호흡을 맞춰 공개 전부터 화제가 됐다.


'기간제 결혼'이라는 다소 생소하고 황당한 소재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스토리는 낯설면서도 흥미로웠다. 김려령 작가가 쓴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지만 드라마로 제작되면서 전체적인 톤과 스토리 일부가 수정됐다고 알려졌다.


작품의 장르를 굳이 따지자면 로맨스 스릴러 정도라고 말할 수 있겠다. 달콤한 사랑 이야기가 아닌 씁쓸하고 냉소적이며 잔인한 사랑이다. 결혼과 이혼 그리고 출산에 관련된 현실적인 문제들을 담아냈다.



         ▲가짜 결혼 생활이 점점 진짜처럼 변해갈 수록 두 인물 모두 혼란스럽다.넷플릭스



<트렁크>에는 기간제 결혼이 등장하는데 이는 일종의 계약 결혼이다. 극 중 'NM'(New marriage)이라고 불리는 결혼정보 회사는 비밀스러운 고가의 서비스로 이를 제공한다. 신청자들 중 어울리는 사람끼리만 매칭한다는 점에서 기존 결혼정보회사의 서비스와 비슷해 보이지만 실상은 좀 다르다.


서비스를 신청한 이들 중 대부분은 남성이다. 이 때문에 NM사에는남자 직원보다 여직원이 많다. 그렇게 남 고객과 회사의 여직원을 매칭해 결혼을 성사시킨다. 이 회사에 소속된 남자 직원들은 '키퍼'로 불리는데, 계약 결혼 중인 여직원을 케어 혹은 감시하는 역할을 맡는다.


<트렁크>는 호숫가에 한 개의 트렁크가 떠 오르며 시작한다. 이에 따라 밝혀지기 시작한 비밀스러운 결혼 서비스와 그 안에 놓인 두 남녀의 이상한 결혼과 갈등이 주요 내용이다.


영화 음악 감독인 한정원(공유)은 심리적 트라우마와 아픔을 가진 인물로 묘사된다. 그는 이서연(정윤하)과 결혼 했는데, 히스테리적이기도 하고 하나로 정의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둘의 결혼 생활은 모종의 이유로 위기를 맞고, 서연은 강제로 자신의 남편인 한정원을 NM서비스에 가입시켜 (다른 여자와) 강제로 결혼을 시킨다.


정원은 필사적으로 거부하지만 서연이 원하기에 억지로 계약 결혼을 한다. 이때 매칭된 배우자가 바로 노인지(서현진 배우)다. 그녀는 NM사의 차장이면서 해당 서비스를 4번이나 성공적으로 마친 이른바 계약 결혼 경력자다.


노인지는 결혼에 대해 부정적인 인물이다. 자신의 실제 결혼이 결혼식을 며칠 앞두고 없던 일이 됐기 때문이다. 원래 결혼하기로 했던 남자 서도하(이기우 배우)는 사실 양성애자였고 이를 알게 된 노인지의 엄마가 이를 서도하의 회사 게시판에 공개한다. 이후 서도하는 아무 말 없이 노인지를 떠난다.


당시 충격 받은 노인지는 방황하다가 우연히 NM의 대표 이선(엄지원 배우)을 만나 일을 시작한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가진 결혼 실패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인지 계약 결혼 서비스를 말 그대로 업무로 인식하며 잘 해나간다. 그녀에게 결혼은 사랑이 아닌 1년짜리 비즈니스에 불과하다.



▲전 배우자와 현 배우자가 함께 하는 기이한 저녁 식사넷플릭스 예고편 갈무리



한정원과 노인지는 매뉴얼에 따른 결혼 계약을 시작한다. 결혼과 서인지, 모든 것을 탐탁지 않아 하는 정원 때문에 초반부터 갈등의 연속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의 상처를 바라보며 조금씩 가까워진다. 이 과정에 예상치 못한 충격적인 반전이 몇 가지 나온다.


1년 계약이라 할 자리도 정원과 서연은 이미 각자가 재혼한 상태다. 그런데 서연은 위험하고 도발적인 행동을 이어간다.


노인지를 병적으로 스토킹하는 인물도 등장하는데 엄태성(김동원)이다. 그는 수년간 인지 근처를 맴돌며 스토킹과 위협을 가했다. 엄태성은 극 중 여러 반전 포인트의 중심에 선 인물이기도 하다.


사실상 가짜 결혼이라 할 수 있는 두 커플의 계약 결혼 생활은 시간이 흐르며 새로운 사랑의 가능성이 되기도 한다. 그 사이에서 이들의 관계를 알아챈 엄태성은 각 인물을 다른 방식으로 협박하며 이들을 서서히 파멸의 골짜기로 끌고 들어간다.


드라마 <트렁크>는 매회 크고 작은 반전을 통해 시청자들이 긴장감을 놓지 못하게 유도한다. 그래서 더더욱 멜로라기보다는 각 캐릭터의 내면을 깊게 들여다보는 심리 스릴러물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이 드라마 속에서 선역과 악역의 구분은 모호하다. 모두가 각자의 숨겨진 과거가 있고 그로 인해 괴로워한다. 현재도 그 내면의 상처로 인해 심리적으로 불안함을 떨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19금 시리즈답게 선정적인 장면과 잔인한 장면도 상당하다. 그럼에도 이 드라마는 자극적인 장면은 적절하게 사용하는 걸로 보인다. 시종일관 캐릭터들의 내적 갈등과 인간관계의 복잡성을 드러내는 연출 방식도 눈에 띈다.


개인적으로 서연이야말로 드라마 초반과 중반까지 가장 이해되지 않는 인물이었다. 자신이 강제로 남편과 이혼은 물론 계약 결혼을 시켜 놓고는 몰래 감시하면서 미련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에게도 사연이 있었다. 서연은 아기를 낳고 싶지 않아 했지만 남편 정원은 아이를 원했다. 임신 후에도 엄마가 되고 싶지 않았던 서연은 출산을 앞두고 자신을 위험한 상황에 노출 시킨다. 이때 정원의 태도는 두고두고 서연에게 큰 상처로 남았다. 정원을 사랑하면서도 증오할 수밖에 없는 복잡 미묘한 감정이 그녀 안에 가득 찼다.


제목처럼 드라마 속에는 여행용 캐리어, 고가의 트렁크가 나온다. 모든 이야기는 호수에서 시체와 의문의 트렁크가 발견되면서 시작된다. 그리고 마지막 회에서 사건의 실체와 트렁크의 정체가 밝혀지면서 마무리가 된다.


<트렁크>는 시청자에게 기존의 결혼제도와 관련해 질문을 던지는 드라마다. 이제는 말하기도 입이 아픈 높은 이혼율, 비혼 증가, 저출산과 육아의 어려움까지. 이 모든 현실의 문제가 세밀하게 녹아져 있다. 그렇다고 이 작품이 어떤 정해진 답이나 교훈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현대 사회에서 결혼이란 어떤 의미일까.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결혼제도의 종말이 왔다는 말처럼, 진지하게 결혼에 대한 많은 부분들을 새롭게 정리하고 정의해야 할 때가 온 것이 아닐까.


드라마에서는 사건 해결 후에도 인물들의 상처가 바로 회복되지는 않는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동시에 <트렁크>는 각 인물에게 희망의 빛을 선사한다. 우리 앞에 놓인 각자의 트렁크에는 어떤 은밀한 비밀들이 있을까. 그 트렁크를 과감하게 열고 정리할 때는 언제일까. 자신을 향한 질문을 이어가고 상처를 직면할 용기를 포기하지 않으면 우리도 마침내 웃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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