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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리 May 29. 2024

결혼정보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이 세상에서 내 결혼을 가장 바라는 사람은 우리 엄마도 결혼 생활의 장점을 줄줄 늘어놓는 대학 동기도 아니다. 얼마 전, 내게 전화를 걸어온 모 결혼정보회사의 관계자다.


"안녕하세요. 이진리 고객님. 저는 xxxxx의 xxx 이사입니다."


그녀가 소개한 회사의 이름은 낯설었다. 프리미엄 서비스를 지향하고자 하는 의지가 찬란하게 뿜어져 나오는  회사는 도대체 무슨 회사인가, 생각하느라 잠시 머리를 굴리는 사이 그녀가 덧붙였다. 


"결혼정보회사인데요. 이전에 저희 쪽에 연락을 주신 적이 있죠?"


얼마 되지 않는 나의 전 재산을 걸고 말하건대 나는 그 어떤 결혼정보회사의 문을 두드려본 적 없다. 어디서 나의 개인정보를 빼간 걸까? 마음만 먹으면 나의 주민등록번호도 쉽게 빼낼 수 있는 시대다. 연락처쯤이야 확보하는 건 누워서 떡 먹기...라고 생각하는 순간 불현듯 스치는 기억이 있었다. 


나는 꽉 찬 메일함을 싫어한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메일에 들어가 광고, 스팸 메일을 다 지워야 직성이 풀리는 타입이다. 문구를 바꿀 생각조차 않는 타이어와 정수기 관련한 메일들 사이, 어느 순간부터 <A~F 나의 결혼 등급은?!>이라는 새 레퍼토리의 메일이 도착했다. 그것도 꾸준히.


흐린 눈으로 삭제 버튼을 누르곤 했는데 그날따라 호기심이 이동했다. MBTI처럼 나를 어디론가 분류해 보고 싶은 욕망이 들끓었다. 과연 나는 등급일까 궁금해하며, 이런 데 눈을 뺏기는 걸 보니 나도 30대긴 30대구나 싶은 생각을 하며 테스트를 했던 기억이 있다. 


당시 내게 매겨진 등급

등급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개인정보를 입력해야 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내 기억이 틀릴 수도 있다. 워낙 오래전의 일이라서.) 그때 나는 이름과 연락처를 기입했었다. 


이 결과를 확인하고 몇 주 뒤. 정말 결혼정보회사에서 전화가 온 것이다. 기억 복원에 성공한 내게 결혼정보회사 관계자는 이런저런 질문을 했다. 결혼할 생각이 있으시죠? 그나마 예쁠 때(이것이 그녀의 정확한 워딩이었다) 하셔야죠.


교리처럼 결혼을 권하던 그녀는 내게 이상형을 물었고 나는 또다시 머뭇거렸다. 누구에게나 각자의 사전이 있다. 이 사전의 순서와 용도는 순전히 내 멋대로 구성된다.  자주 사용하지 않는 언어는 사어가 되어 사전의 뒤쪽으로 밀려난다. 이 세상에서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치는 동안, 나는 이상형이라는 단어를 사전의 맨 뒤쪽으로 밀어버린 상태였다. 그런 나를 위해 그녀는 조금 더 세분화된 기준을 세워주었다. 일종의 가이드라인이었다. 


"고객님이랑 결혼할 사람이 어떤 직업군이었으면 좋겠어요?"

"전문직이 좋으세요?"

"연봉은 어느 정도였으면 좋겠다 싶은 기준이 있으세요?"

"고객님. 원하는 남성분의 키는요?"


웃음기 하나 없는 정중한 질문이 나를 더욱 수렁 속으로 이끌었다.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 따위의 기준보다 연봉과 키라는 수치가 그녀의 원활한 업무를 도와줄 테니, 그녀의 입장이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지만 나는 정말로 그에 대한 기준을 세워본 적이 없었다. 


더듬더듬 이야기하는 나를 향해 "고객님한테는 사업가 남자가 잘 어울리겠다, 그렇죠!"라는 갑작스러운 대답을 내린 그녀는 압구정역 근처에 있는 회사 사무실에 들러 상담을 한번 받아볼 것을 요구했고, 나는 생각해 보고 연락을 드리겠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전화를 끊었다. 내 나름대로는 거부의 신호였는데 우리의 시그널은 어긋났고 나는 그녀에게서 1~2주 단위로 결혼 재촉 전화를 받아야 했다.


한번 전화를 시작하면 기본이 30분 이상이었다. 하지만 그녀와 나의 시간은 똑같이 귀중하므로 어긋났던 시그널을 바로 잡을 필요가 있었다. 나는 나름대로 비장의 열쇠를 꺼내 들었다. 


"사실 잘 되어가고 있는 남자가 있어서요." 


하지만 그녀라는 문에는 내 열쇠가 먹히지 않았다. "잘 되어가는 사람이 있을수록 밀당을 해야 한다"라는 그녀의 논리를 어떤 열쇠가 풀 수 있단 말인가... 사실 답은 그녀가 내게 이미 주었다. 나는 현재 되어 가고 있는 남자가 '수치적'으로 얼마나 뛰어난지, 모 대학에서 강의하는 전도유망한 남자로 연봉은 어느 정도 된다는 는 것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했다. 그때서야 그녀의 목소리가 한풀 꺾였지만 그녀는 끝까지 프로페셔널했다. 


"그 남성분이랑 잘 안 되면 연락 주세요."


알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지만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게는 모 대학에서 강의하는 전도유망한 썸남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30대 여자에게 결혼이란 무엇인지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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