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1독을 목표로 매일 영어성경 읽기 challenge를 하여 유튜브에 올린 지도 거의 반년이 다 되어갑니다. 성경읽기표에 6월 중순에 어디냐 하면 욥기, 성경책의 중턱에 헐떡고개라고 할 곳이 바로 욥기입니다. 물론 정확히는 6월 30일 정도가 완전 중간이지만, 그 중간을 이르기 전이 심리적으로는 가장 힘든 시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인생도 중년이 딱 그런 시기가 아닌가 싶고요. 요즘 100년 인생이라는데, 지금 제 나이 지천명(知天命)이라는 50을 1년 남긴 나이입니다. 하필이면 이런 때에 정말 마음이 무겁게 만드는 성경의 책이 바로 욥기 입니다. 영어로 JOB이죠.
JOB은 영어 일상생활에서 ‘일’이라고 하는 job과 스펠링도 같습니다. 일이란 무엇입니까? 하고싶을 때에도 하지만, 하기 싫을 때에도 해야 되죠. 그게 professionalism이고 work ethic인 거죠. 왜? 먹고 살아야 하니까. 자식새끼들 먹여 살리려고. 그러면, 이 욥기의 영어 발음도 일 할 때 “잡job”과 같은 발음이냐? 하면 그건 또 아니라는 겁니다. 차라리 그렇게 화끈하게 “잡!”하고 발음되는 거라면 마음이 힘들지는 않을 겁니다. “잡초같은 승부사” 이런 느낌이라도 가지게 말이죠. 헌데 그 발음은…
“죠-브”입니다. 죠웁. 듣기에도 답답하고 우울하죠?
왜 우울한 지 모르시는 분들은 욥기의 첫 장만이라도 좀 읽으시거나, 아래를 보시기 바랍니다.
옛날에 욥JOB이라는 아주 신실한 부자가 살았는데, 사탄이 하나님한테 다음과 같은 말을 하면서 도전했죠. “저 욥이라는 자가 당신을 찬양하고 신실하게 살아가는 것도 사실 당신이 쟤를 잘살게 해주니까 당연히 받은 만큼 감사하는 것뿐이지, 저거 다 뺏으면 당신을 원망하고 저주하며 다른 신이나 섬기러 갈 거다. 두고 봐라” 그랬더니, 하나님이 “그래? 그럼 한번 시험해 봐. 안 돌아설 걸? 대신, 쟤 목숨은 끊지 말고.”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랬더니 사탄이 그 저주를 시전하는데, 멀쩡하게 살아가던 처자식들이 하루아침에 온갖 사고와 전쟁과 자연재해로 다 죽습니다. 재산도 탈탈 털리고. 그래서 욥은 비통하니 머리를 삭발하고 탄식하면서 슬퍼하며 살아갑니다.
워낙 상상하기도 싫을 정도의 참혹한 일을 당한 사람의 얘기인 줄을 아는 만큼 마음이 무겁다 보니, 성경 읽기 1년 1독하는 데 “이거는 좀 건너뛰고 읽을 수 없을까?”하는 생각도 간절할 정도였어요. 헌데, 읽다 보니 욥기는 정말 여러가지를 느끼게 합니다.
우선, 욥기는 경제적인 축복 혹은 세상적인 안락함에 대한 대가로 하나님을 섬겨서는 안된다는 뜻 같습니다. “욥도 그렇게 경제적 인센티브 때문에 기복신앙적으로 하나님을 섬긴 것이 아니다”하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그저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무조건 감사하며 기도하라는 거겠죠. (이건 좌파 운동권 사람들이 신봉하던 유물론에 정면 배치되는 가르침입니다.)
그렇게 재난을 당하니 주변에 친구랍시고 있던 신실한 사람들이 와서 위로의 말을 하는데… 입이나 다물고 있지… 이게 위로가 아니라, 불 난 집에 부채질을 하는 말들을 시전합니다. 영어로는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adding salt to the injury) 격으로 전개가 됩니다. 초상집 가면 말 하기가 참 조심스럽죠. 슬픈 일을 당한 유가족들한테 무슨 얘기를 할 수 있겠냐구요. 그저 조용히 있어주면서 고개 끄덕여 주는 정도가 최선이 아닐까 싶습니다. 에혀….
옛날 유행가 중에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만 찍으면~” 하면서 간드러지는 노래가 있었죠. “남”이 된다는 겁니다. 그 비슷한 대조가 바로 영어에서 이걸 껍니다.
특히 욥기에 보면 “sword”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하더군요. “너가 당하는 재앙은 너나 가족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에 너가 불의해서 하나님이 칼로 치시는 거다”라는 욥 친구들의 악담이 끝도 없이 나열됩니다. 그러면서 욥의 변론 논쟁이 계속 나오더군요. 읽고 있자면 우선, “저것들이 친구 맞나?” 싶고. 거의 변호사와 검사의 법정 논쟁의 원형을 보는 것 같을 지경이에요.
누군가가 그렇게 이해할 수 없는 정도의 재난을 당하게 되면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왜 이런 일을 당했지?”라는 의문을 품게 됩니다. 무슨 일이든지 인과관계가 밝혀져야 납득이 가고 마음이 좀 그나마 진정(?)되는 것이 인간의 진화된 두뇌거든요. 사실 개도 뭔가 이해가 가지 않는 현상을 보면 고개를 좌우로 갸우뚱합니다만. 사람은 더하죠. 과학적인 사고력을 가진 두뇌의 숙명입니다. 본인 스스로도 그렇게 물어봅니다. “왜 저한테 이런 힘든 일을 주셨습니까?”하면서 “Why ME?”하는 질문을 절대자에게 던질 수밖에 없죠.
헌데, 유대인의 문화가 뭡니까? 일단 의문이 드는 모든 것은 말로 표출해야 직성이 풀리는 문화입니다. 신 앞에 만민은 평등하니, 사람들끼리도 상황을 불문하고 질문하고 답할 수 있어야죠. 그리고 극도의 슬픔을 당한 욥은 하나님한테도 질문을 퍼붓습니다.
“주여 왜 나한테 이러셨습니까? 제가 뭐 잘못한 게 있나요? 저와 저희 가정은 최대한 착하게 살았고, 하나님을 섬겼는데, 왜 이러셨나요? 물론 당신을 등질 것은 아니지만, 너무 힘듭니다. 왜 그러셨는지 설명 좀 해 줘 보세요!”하고 질문을 뿜습니다. 그랬더니 친구들이 하나씩 나서서 욥한테 진정시킨답시고 말을 하는데, “뭔가 너가 부지불식간에 잘못을 저지른 것이 있었겠지” “마음으로라도 하나라도 너가 잘못한 것이 있지 않고는 그렇게 재난이 너의 집안에 떨어졌을 리가 없어” “너는 인간적인 눈으로 보고 최선의 결정을 한답시고 했지만, 엉뚱하게 그게 돌고 돌아서 어떤 뜻하지 않은 상대방한테는 억울하게 나쁜 결과로 나타났을 수도 있지 않냐? 그래서 이지경으로 너가 당하는 거 아니겠니?” 등등 하면서 언쟁을 합니다. 그리고 특히 “불경하게 하나님을 의심하는 질문을 하다니!”하면서 나무랍니다.
우선, 제가 보니, Word라는 단어에 S 하나 더하면 sword 더군요. 옛날 뽕짝 노래에도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만 찍으면~ 남이 된다’는 것이 있었죠. 딱 그 모양입니다. 발음으로는 워드에 s 더할 경우 “쏘오오드”라고 하죠. “스워드” 아닙니다. 발음부터도 확 달라지죠? 유난히 욥기에는 sword라는 단어가 자주 출현하는데 눈에 거슬립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칼날을 맞는 존재들을 다 알고 보면 죄를 저지른 사람들이다.”라는 말들이 그 많은 친구들의 논쟁 속에서 이리저리 반복 출현하면서 이 단어가 나옵니다. 죽기 살기 육박전 나지 않은 게 다행이다 싶을 뿐입니다만, 정말 세치 혀가 칼보다 더하게 심장을 도려내고 파겠구나 싶습니다. 위로의 말이랍시고 해도 잘못하면 마음에 비수로 꽂히겠구나 싶고요. 우리말로도 '말'과 '칼'은 한끗 차이긴 하네요.
중고생 때 귀에 못이 박히도록 외었던 문장이 “The pen is mightier than the sword”인데, “언론이 가진 여론 조성의 힘이 무력보다 중요하다”하는 식의 의미로 1839년 영국의 정치가 에드워드 불워 리튼(Edward Bulwer-Lytton)이 한 말입니다. “언론의 자유 만세” 그런 의미로 통했습니다. 우리 속담에는 말 한 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것이 있는데, 욥의 친구들의 말들을 보면 그 반대의 상황입니다. 초상집에 가서 까지 언쟁을 해야 속이 시원한 건지. 그리고 펜대를 맘대로 놀려서 남에 대해서 엄청 띄워주거나 사회적으로 매장시킬 수 있는 사람들은 스스로 대단한 능력자라고 자부하겠지만, 스스로 주변사람들에게 지독한 원수가 되고 있구나 하고 깨달아야 되겠더군요. 교수라는 직업도 좀 그렇지만, 특히 기자들.
그리고, 사탄의 시험으로 재앙을 겪어 욥이 하나님께 울부짖는 모습이 딱 중년에 자기 능력의 한계라는 벽에 부딪쳐서 우울함을 느끼게 되는 사람들의 필연적 인생주기(lifecycle)과도 겹쳐지는 것 같습니다. 중년의 위기 “Midlife crisis”랄까요? 물론 욥이 겪은 그 재앙의 스케일scale이야 감히 상상도 하기 싫은 거지만요.
https://www.donga.com/en/article/all/20201111/2238043/1/A-cartoon-strip-that-raised-up-Biden
사실 미국의 조 바이든 대통령의 가정사와 관련해서도 슬픈 얘기가 있죠. 첫 와이프와 딸과 아들을 사고로 잃어버린 다음에 엄청 마음고생을 했겠죠. 가족 중 한 명만 잃어버려도 수년간 우울증에 시달리는 게 사람입니다. 저도 6년 전에 어머님이 돌아가셨는데, 그 때 이후부터 지금까지도 울적한 마음이 들거든요. 사고로 자식들을 잃은 바이든은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미국의 만화가 Dik Browne의 명작 만화 하나를 보고 마음을 다잡고 일어섭니다. 그리고 아래의 그림은 조 바이든의 책상에 있어서 늘 힘을 준다고 합니다.
“왜 하필 저에게? 이런 고난을 주시나이까?” 하는 부르짖음에 하늘이 반문하죠.
“왜 안되는데?”
“엥?”
좀 뜻밖입니다만, 눈을 크게 뜨고 보면 나름 일리 있는 말이거든요. Why Me라고 하는 것은 나 중심적으로 나만 생각하는 조금은 나르시시스트적인 생각에 묶여 있는 자세라고도 할 수 있죠. 세상에 나는 특별하고 남들보다 낫다고 생각했는데, 왜 나한테 벌을 주시나이까 하는 생각. 하지만, 하나님이 이끄시는 그 넓은 우주와 자연과 세상에는 여러 생명체들과 사람들이 있고, 나도 그들 중 하나일 뿐인데, 뭐 그리 나만 잘못된 것인 양 하나님한테 화낼 것 있느냐는 겁니다. 받아들이기 힘들겠지만, 맞는 말이긴 하죠. 가혹하지만, “겸손하라”는 뜻 같기도 합니다.
마지막에 하나님이 최후 결론을 지으시면서 이 친구들한테 나무라십니다. “너희들이 나에 대해 뭘 안다고 욥을 말로 괴롭히느냐!” 하면서요. 그래서 욥한테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라고 하시죠. 그 뜻으로 화목제를 지낼 동물들을 욥에게 주라고 하십니다. 그것을 욥이 태워서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게 합니다. 그리고, 그가 그 친구들을 위해서 기도하게 하십니다. 그에 따라 친구들을 용서하시죠.
재미있는 것은 38장~42장에 나오는 것인데, 하나님의 판결문같은 말씀이 쭉 나오면서 “너가 나에 대해 뭘 아는게 있다고 그렇게 원망하느냐?”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자연의 신비한 여러가지 현상들과 놀랍고 압도적인 자연의 힘과 원리를 너희가 아느냐고 쭉 나열하시죠. 무서운 존재 리바이어던(Leviathan)도 엄청 길게 묘사가 됩니다. 읽다가 보면 이게 엄청난 재난을 당한 선량한 주님의 백성을 욥을 위로하는 책인지, 아니면 인간의 자연과학적 혹은 신학적 논리의 욕구를 자극하면서 이를 법리논쟁처럼 풀어나가도록 시동을 걸어주는 책인지 헷갈릴 정도입니다. 결국 자연의 신비함을 탐구하다가 논리로써 설명이 되면 과학이고, 그렇지 못한 부분은 신학으로 남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중요한 것은 나심 탈렙(Nassim Taleb)의 “행운에 속지 말라 (Fooled by Randomness)”라는 책에서와 같이, 우리 인생의 많은 부분은 사실 스스로 컨트롤할 수 없는 운에 의해서 좌지우지 되는 것이며, 이를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시각으로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는 거지요. 이를 마치 자기 자신이 잘나고 의로와서 성공했다거나, 반대로 자신이 죄를 지어 재난을 당하거나 실패했다고 잘못 믿으면 안된다는 겁니다.
어렸을 때부터 수재라는 소리들 많이 듣고 성실하게 노력하여 승승장구 성공가도를 달려온 사람들조차도 자신의 능력의 한계에 부딪혀서 좌절하고 우울감을 겪는 것이 중년이죠. 러시아의 천재 음악가라는 쇼스타코비치의 왈츠 2번을 들어 보면 (https://www.youtube.com/watch?v=phBThlPTBEg) 슬라브 풍의 단조와 함께 그런 애수가 느껴집니다. 베토벤의 비창 소나타도 그런 느낌이고요. 그들이 이 음악을 작곡할 당시는 훨씬 젊었을 때라지만, 천재는 역시 이런 느낌도 일찍 받는지… 좌우간에.
청년기에는 순전히 자기가 잘나서 승승장구한 것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상당부분 자신이 운이 좋아서 능력을 잘 발현할 기회가 있었던 것이고, 얄궂게도 그 운이란 것이 이제는 그리 내 편에 있어 주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나 다른 조직, 다른 나라의 편에 가서 있거나 하며, 그것은 자신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그야말로 “천명”이라는 것을 깨닫는 거지요.
그래서 전처럼 마냥 행복하게만 살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닫고 슬퍼지겠죠. 그리고 그동안 자신이 오만한 눈으로 내려다 봤던 옛날의 “실패자”들을 생각해 보면 그들 역시 대단한 실력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운이 없어서 실패했을 뿐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들을 무시했던 자신의 모습에 대해 죄책감도 크고, 지금 당하는 고통이 내가 뿌려 놓은 오만함을 씨앗 때문에 그들의 원한에 대한 죗값을 치르는 것 같을 겁니다.
그것이 50을 지천명의 나이라고 한 뜻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중고생 때 국어시간에 암기하기를 “나이 50이 되면 하늘이 나에게 준 사명, 소명, 목적을 알게 되므로 지천명이라고 한다”외었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소명, 목적이라기보다는 자기자신을 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고, 거대한 대자연의 장구한 역사와 섭리 속에 잠시 왔다 가는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운명을 자각하는 거죠.
공자님이 이렇게 말했다는 것을 곱씹어 보면, 아무리 개인이나 국가가 융성기의 행운을 만난다고 해도 그 운이 50년을 넘기기 힘들다는 반증도 되겠죠.
“이 또한 지나가리라.”
자기가 아무리 수재라고 입신양명하며 잘나가고, 성군으로 나라를 잘 다스려도, 경제가 떠서 장기호황을 구가해도, … 50년 넘기지 못 하더라는 것 아닐까요. 그러니 공자 같은 대단한 분도 50이 되니 하늘이 그어준 자신의 한계를 자각한 거겠죠.
“나도 별수 없구나.”
살다 보면 언젠가는 “우리가 - 혹은 내가 - 이러지 않고 저랬더라면” 하는 후회를 자꾸 하게 되기 마련입니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해서 미련이 남는 게 사람 욕심이죠. 저도 가끔은 그런 생각에 휩싸여서 정신 없을 때도 있습니다. 특히 지금 걸어가는 길이 힘들고 지칠 때 혹은 우울감이 몰려올 때 그렇죠. 다 때려치우고 인생을 리셋Reset하고 싶은 생각도 불같이 들 때가 있죠.
그래서 중년이 힘든 또 한가지 이유는 본인이 지나온 삶의 갈림길들에서 했던 최선의 의사결정들에 비해서 가지 않은 길들이 더 화려해 보이고, 내가 선택했던 길들이 이상하게 전혀 외생적인 변수로 인해 혹은 내가 알지 못했던 변수로 인해 상대적으로 초라하게 느껴진다는 겁니다.
남의 밥에 콩이 굵어 보입니다.
그것도 정말 ㅈㄴ 굵어 보인다는 겁니다. 그리고, 더 화나는 것은 그 선택 때문에 나 자신만 힘들면 모르겠는데, 내 자식들까지 저쪽 길을 간 남의 자식들보다 상대적으로 불리하게 혹은 더 속박되어 살게 만든 것 같아서 한없이 미안하고 자신의 삶에 회의가 온다는 거죠. 그래서 우울하고 괴로운 겁니다.
여기서 잠시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을 한번 봅시다.
The Road Not Taken (Robert Frost)
TWO roads diverged in a yellow wood,
And sorry I could not travel both
And be one traveler, long I stood
And looked down one as far as I could
To where it bent in the undergrowth;
Then took the other, as just as fair,
And having perhaps the better claim,
Because it was grassy and wanted wear;
Though as for that the passing there
Had worn them really about the same,
And both that morning equally lay
In leaves no step had trodden black.
Oh, I kept the first for another day!
Yet knowing how way leads on to way,
I doubted if I should ever come back.
I shall be telling this with a sigh
Somewhere ages and ages hence:
Two roads diverged in a wood, and I—
I took the one less traveled by,
And tha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정현종 번역
단풍 든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더군요.
몸이 하나니 두 길을 다 가 볼 수는 없어
나는 서운한 마음으로 한참 서서
잣나무 숲 속으로 접어든 한쪽 길을
끝 간 데까지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다가 또 하나의 길을 택했습니다. 먼저 길과 똑같이 아름답고,
아마 더 나은 듯도 했지요.
풀이 더 무성하고 사람을 부르는 듯했으니까요.
사람이 밟은 흔적은
먼저 길과 비슷하기는 했지만,
서리 내린 낙엽 위에는 아무 발자국도 없고
두 길은 그날 아침 똑같이 놓여 있었습니다.
아, 먼저 길은 다른 날 걸어보리라! 생각했지요.
인생 길이 한번 가면 어떤지 알고 있으니
다시 보기 어려우리라 여기면서도.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
나는 한숨 지으며 이야기하겠지요.
"두 갈래 길이 숲 속으로 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사람이 덜 밟은 길을 택했고,
그것이 내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라고
하지만, 그런 것을 돌이켜 후회할 수 있는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있는 것 자체가 사실은 우리가 여유가 있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는 반증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쟁 통에 있는 사람들 같아봐요. 후회고 뭐고 할 겨를도 없었겠죠. 그런 만큼 흔들리지 않고 소신껏 끝까지 한 평생 살아 나가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내 선택으로 인해 “가지 않은 길”이 부러워 보일 때에도 내 선택이 옳았음을 꿋꿋이 믿고 밀어붙이는 겁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욥기를 읽자면 거의 법정에서 변호사와 검사가 법리논쟁을 하는 원형 같다는 느낌마저 듭니다. 1개 장은 친구 하나가 쭉 변론을 늘어놓고, 다음 1개 장은 욥이 반론을 쭉 펼치고, 다음 1개 장은 또 다른 친구가 욥에게 반론을 늘어놓고…. 뭔가 각자 자기의 논리를 세워가며 주장을 하는데, 나름 다 일리가 있는 말들이거든요. 말의 칼싸움입니다.
말과 관련해서 중년에 괴로운 것 중 상당 부분은 단순히 논리적으로 강력한 것이 정의를 실현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불의를 정당화하는 데에도 교활하게 쓰이더라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대단한 지식을 구현하는 말들 (word)이 정의를 위한 칼sword이 되면 모르겠는데, 오히려 불의를 정당화하는 칼sword로 쓰이게 되는 상황들을 보게 되면서 지금까지 공들여 쌓아 온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 같은 좌절감을 겪습니다. 살다 보면 나의 모든 덕행이나 최선을 다한 의사결정도 정반대의 악행인 양 혹은 멍청하고 생각 없는 의사결정이었던 것인 양 말의 칼을 휘두르며 공격하고 괴롭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많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욥기는 그 모든 것들에 바보같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지 말라고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자기 자신의 모든 의사결정을 최선을 다해 변론하라는 겁니다. 욥이 친구들의 언어공격에 끝까지 변론을 하는 모습에서 그걸 배웁니다. 삶은 순간순간이 투쟁이므로 말의 칼싸움을 해야 된다는 겁니다. 자기 자신의 행동과 의사결정을 똑바로 정당화하고 나를 대적하려 드는 저 상대방에 대해서 끝까지 싸워 이겨야 한다는 겁니다.
참 쉽지 않은 주문입니다.
상대방을 악마화하고 투쟁만 일삼던 시대의 사람들은 이게 쉬운 지 모르겠는데. 괴물을 상대하다가 내 자신이 괴물이 되는 것을 경험할까 두렵습니다. 선배 세대들이 그렇게 위선의 괴물이 돼버린 것을 바라보는 대한민국 90년대 학번들로서는 정말 그런 식으로 말의 칼싸움 하기 싫습니다. 하지만, 주어진 삶을 성실히 살아내기 위해서는 저도 부지런히 죽기살기로 말의 칼싸움을 해야 된다는 거겠죠.
왜?
원래부터 삶은 그렇게 해서 한 땀 한 땀 (inch by inch) 투쟁으로 일구어내는 거니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은 저 멀리 남의 나라에 무임승차하라고 있는 게 아니라, 지금 바로 여기 내가 발 디디고 있는 이 땅에서 내가 피땀흘려 일구어 내는 거니까. 이 땅에서 내 삶과 내 가족들의 삶부터 보람되게 만들고 의미를 부여하게 하면서 이 땅을 일구며 복되게 바꾸도록 하면서 살아야 하니까.
신약성경의 바울에 나와 있듯이, 우리가 진정 의로와서 하나님이 도와주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그 누구도 의롭지 않거든요. 그저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 즉 의롭다 칭해 주신 것 뿐이죠. 그리고, 재난을 당한 사람들도 무슨 죄가 있어서 그렇게 비참하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 잘 나간다고 껄떡거리지 말고, 못나간다고 “내 인생 여기까지인가보다” 하며 좌절하지 말고 꾸준히 성실하게 한 걸음 한 걸음 살아내야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그 날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