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복싱의 황금기를 구가하던 80년대 말에 꽤 특이한 선수가 헤비급에서 등장했다.
'조지포먼'. 과거 무시무시한 주먹으로 세계챔피언도 획득했고, 알리와의 세기적인 대결로도
유명한 선수였다. 은퇴한 지, 10년이 넘어 전도사업에 돈이 필요해서 다시 복귀했다는
그의 외형은 사실 우스꽝스럽기도 했다. 배가 볼록 나오고, 대머리에 천진난만한 표정.
나이는 이제 거의 마흔 살이 다 되었다. 지금이야 40대를 젊은 층으로 여기지만, 80년대는
곧 늙을 예정인 노년층에 가까운 나이로 봤다. 그러니, 배 나온 마흔 살 먹은 복서에게
기대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싶었지만, 여전한 강펀치로 다시 헤비급 주류로 돌아온 것이다.
내 눈에는 조지포먼의 볼록 나온 배가 꽤 인상적이었고, 그게 그 선수에 대한 기대감을 접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었다. 얼핏 보기에는 상대가 봐주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조지포먼은 배를 볼록
드러내고, 느릿느릿 편안하면서도 여유 있게 스트레이트성이 아닌 툭툭 던지듯 잽을 던지는데,
그걸 맞은 젊은 선수들은 쩔쩔매다가 KO당하기 일쑤였다.
어쨌든 조지포먼은 45살에 다시 세계챔피언에 오르고, 거의 50살 가까이 선수 생활을 했다.
그가 이룬 업적은 대단했지만, 볼록 나온 배는 여전히 복싱선수로서 자격이 의심스럽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한 나는 90년대에 들어서니 80년대의 프로복싱 황금기가 지나가고 저런 배 나온
할배 복서가 다 등장하는구나 하며 그 어린 나이에 씁쓸해했다.
최근에 유튜브를 통해 조지포먼의 과거 영상을 다시 봤다.
내 기억 속에는 배가 볼록하고, 뒤뚱뒤뚱 거리는 할아버지 복서이미지가 강하게 남아 있었는데,
이번에 다시 보니, 190이 넘는 장신에 어마어마한 팔뚝 근육이 인상적이었다. 물론, 배가 좀 나온
것은 사실이지만, 다시 보니 그렇게 많이 나온 배도 아니었다. 경기는 다이내믹하고 조지포먼의
주먹은 묵직함 그 자체였다. 느리게 보였던 그의 모션도 사실, 자신의 노하우와 기술을 차분하게
발휘했던 것이었다. 게다가 조지포먼의 한 방에 상대의 마우스 피스가 날아가며, 그로기에 빠지자
포먼은 그 절체절명의 찬스의 순간에도 공격을 멈추고 상대가 마우스피스를 다시 끼우기를
기다리는 너그러움을 보였다.
예전에 분명히 봤던 영상인데, 왜 이렇게 다른 느낌일까 하는 마음에 여러 경기를 다시 보니,
젊었을 때 보다 차분하면서 테크닉은 농익은 데다가, 펀치와 맷집은 여전하면서 경기운영 능력도
젊은 시절보다 좋아져서 무리하지 않고 경기를 운영하니 그 많은 나이에도 다시 챔피언에
오를 수 있었던 거다.
예전에 조지포먼을 볼 때는 맨 먼저 그의 볼록 나온 배를 먼저 봤다.(앞서 말했지만, 사실 복싱선수치 고는
좀 나온 편이지만, 그렇게 많이 나온 것도 아니다.) 그 배를 보면서 선수자격을 의심한 나는 조지포먼이
형편없는 선수라고 머릿속에 단정을 하고 경기를 본 것이다. 그러니, 그가 하는 모든 행동에 단점만
눈에 들어왔다. 그 단점도 사실,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니 느리고, 뒤뚱거린다는 생각을 한 것이지,
실상은 경기운영 능력이 노련했던 것이다. 항간에는 40살이 넘은 조지포먼이 다시 1974년의 알리와
다시 붙어도 누가 이길지 모른다고 할 정도로 조지포먼은 나이가 들었음에도 훌륭한 복서였다.
결국, 난 볼록 나온 배만 보고 위대한 복서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30여 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모든 기억이 희미해져 편견도 사라졌을 때, 조지포먼의 진정한
본모습을 본 것이다.
편견이란 게 이렇게 무서운 걸까?
편견에 빠진다는 것은 생각의 함정에 스스로를 빠뜨려 매트릭스(영화)에 갇히고 마는 것이다.
그런 이에게는 현실을 볼 수 있는 빨간약을 먹을 의지도 기회도 없고, 결국 그 편견 속에 갇혀
자신이 편견 속에서 살다 갔는지 모르고 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40대에 훌륭한 전적을 남긴 위대한 복서라고 누군가 말하면,
"아.. 그 배 나온 할배 복서?"
이게 얼마나 한심한 말인지 모르고 아무 생각없이 지껄이고 마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