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서준이 오후 들어 기침을 자주 하고 미열이 있어요. 병원에 가보셔야 할 것 같아요.
하원하러 가는 길, 어린이집 담임 선생님께 알림장이 왔다.
오전에 아이 친구 엄마가 하원하고 저녁을 먹자고 연락이 왔다. 마침 오늘 저녁 메뉴를 고민하던 차라, 부지런히 하원하고 친구 집으로 가겠다고 했다. 오늘 저녁 육아는 좀 수월하겠구나 생각하며 즐겁게 퇴근하는 길에 변수가 생겨버렸다.
하원 시간은 오후 5시 50분.
병원부터 데려가야 하는데, 주변 소아과 3곳 똑닥은 모두 마감되었다. 아이는 놀이터에서 놀고 싶다고 울고 있고, 저녁 먹기로 한 친구는 집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얼른 연락해야 했다. 그래, 요즘 육아가 많이 쉬웠지 ^^; 오랜만에 매운맛이다.
우선 병원에 안 가겠다는 아이를 안아 업고 차에 태운 후, 친구에게 못 만날 것 같다고 연락을 남기고 주변 소아과에 유선으로 현장 접수가 가능한지 문의했다. 마지막에 전화한 곳에서 다행히도 가능하다고 해서 6시 15분까지 오라고 했다. 금요일 퇴근시간은 상습 정체라 곡예 운전을 하면서 병원 현장접수 마감 3분 전에 겨우 도착했다. 다행히도 아이는 출발하자마자 울음을 멈추고 본인의 하루 컨디션을 이야기해 주었다. "오전 연장반에서는 기침 안 했고, 정규반에서 점심 먹을 때도 기침 안 했어. 오후 연장반가서 기침했고, 열 5번 쟀는데 계속 초록색이었고, 마지막에 37.5도였어."
아슬아슬하게 도착한 병원에서 진료를 받았다. 감기 초기인데, 기침 소리도 나쁘지 않고 열도 많이 오르지 않아서 항생제 없이 지켜보자고 하셨다. 다행이었다. 그런데 오늘 저녁 약속이 있어서 저녁 메뉴를 생각해 놓지 않았다. 하물며 냉장고에 먹을 것도 없었다. 병원과 약국에 다녀오니 시간이 7시가 돼버렸다. 최근 들어 배달이 잦아져 배달음식은 지양 중인데, 저녁준비 미비로 어쩔 수 없이 배달음식을 시켰다.
따끈한 갈비탕을 배달시켜 먹은 뒤 다행히 에너지가 다시 충전된 아이. 마른기침을 하긴 하지만 매우 쌩쌩한 모습이다. 20시 30분쯤 되었을까? 온몸에 긴장이 풀리며 몸이 아프고 머리가 띵한 느낌이 들었다. 사실 별일 아니긴 한데, 육아에 변수가 없던 평온한 요즘에 갑자기 소아과 런, 똑딱 마감, 친구 약속 취소, 저녁 준비가 안 되어 있는 상황이 모두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다음날 점심에도 아이 친구 집에 초대받아 가기로 한 상황이라, 내일 아침 컨디션을 보고 연락해야겠다고 생각한 채 9시도 안 되어 아이와 함께 잠이 들었다.
다음날 오전 8시. 잠도 푹 잘 자고 열도 없고 기침도 거의 없으며, 코막힘만 살짝 있다. 그래도 본인이 감기에 걸렸으니 친구 집에는 안 가야겠다고 해서 (물론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초대해 준 친구 집에 연락했다. (그 친구도 살짝 기침이 있어서 병원에 가보려고 했다고 한다.)
11시에 마스크를 씌어 미술학원에 다녀오고, 나는 어젯밤부터 계속 나른한 상태가 되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오전 근무를 마치고 온 남편을 기다렸다가 시댁에 가서 점심을 먹었다. 감사하게도 어머님이 우리 밥만 차려주시고 일 보러 가셨다. 시댁에서도 계속 나른해서 꾸물거렸다. 계란프라이처럼 나른하게 퍼져있고만 싶었다. 그런데 집에 와서 난장판인 집을 보니 도저히 움직이지 않을 수가 없어졌다.
생각은 잠시 접어두고, 몸을 움직이기로 했다. 먼저 정리부터 시작했다. 아이 장난감이 널브러진 거실을 바라보며,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장난감을 제자리에 놓고, 먼지를 털어내며 조금씩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청소가 끝난 후, 빨래를 개고 정리하는 과정에서 나른함이 조금씩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정리에서 청소, 빨래, 정돈까지 원스톱으로 끝내버리는 나. 그렇게 한 가지씩 일을 해내며, 내 안의 불안감도 함께 정리되고 있었다. 반나절 만에 나른함에서 벗어나 스스로 기특함을 느꼈다. 정돈된 집을 보니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그동안 쌓였던 스트레스가 조금씩 해소되고, 다시 에너지가 충전되는 기분이었다. 어젯밤부터 오늘 오후까지의 이유 있는 나른함이었다. 그 나른함 속에서도 저녁에는 다시 힘을 낼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변수에 스트레스를 받는 나.
예상치 못한 상황들이 겹치며 마음속에 쌓인 불안감이 나를 짓누른다. 나른함이 찾아오면 하염없이 축 처진다. 하지만 할 일이 쌓이는 것을 지켜볼 의지는 없다. 그런 나를 깨우게 한 건 작은 결심이었다.
‘시작의 기술’이라는 책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생각이 아니라 행동이 나를 규정해” “그냥 첫발을 떼라, 그리고 다음 발, 또 다음발”
이제 이런 변화 덕분에 변수가 생길 때마다 나른함에서 벗어나는 시간이 짧아졌다. 변수는 나의 스트레스 원인이라는 것을 스스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변수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이고, 다음번 변수가 와도 나는 다시 나른함에 빠질 것이다. 하지만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다시 움직일 것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안다. 여러 번 반복하다 보면 나른함에서 벗어나는 시간이 더욱 짧아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