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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샤워실의바보 Jan 10. 2024

모든 것을 이해하고 떠난 사람

그 이별이 왜 그랬는지 아는 것

가장 사랑했던 사람이 곧 결혼을 한다.


예전에 내 브런치에 등장한, 저 세상 포용력을 가진 그 사람이다. 인생이 바닥칠 때 그를 만났다. 그는 내 가정사, 빚으로 벼랑 끝으로 가는 내 인생을 다 이해하고 묵묵히 버팀목이 되준 후 결국 이별을 고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다. “오빠는 아빠가 되고 싶지 않아. 중학생 때 부터 연애 해오면서 늘 누군가에게 아빠가 되어준 것 같거든. 오빠는 이제 삶이 덜 힘든 사람을 만나고 싶어“ 그는 이런 말도 했다. “오빠는 네가 결혼을 했으면 좋겠다. 늘 삶이 불안정했으니 가정을 꾸려서 안정을 찾았으면 좋겠어.”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었다. 면목이 없어서,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서, 더 이상 부담주고 싶지 않아서 붙잡지 못했다. 오빠는 만날 때 본인 이야기를 거의 한 적이 없었다. 내가 질문을 하면 제대로 대답하지 않았다. “오빠는 덜 힘든 사람에게 이야기 하고 싶어. 너 힘든 거 있으면 얼마든지 얘기해도 돼“ 라고 했다. 그가 편히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주지 못했다는 뜻이다. 삶이 비극 그 자체인 사람에게 어떻게 편하게 기대겠는가.


그와 헤어진 후에도 그를 여러번 만났다. 감정이 남아 있었던 탓이다. 스물 다섯살이 된 해였다. 대구에 사는 그는 퇴근 후 차로 3시간을 달려 내 직장 근처로 찾아왔다. 퇴근하고 같이 고기를 먹었다. 내일 되면 그가 대구로 떠나니까, 지금 이 시간을 계속 붙잡고 싶었다. 보고싶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보고싶지 않았냐고 묻고 싶었다. 술을 아무리 마셔도 그럴 용기는 나지 않았다. 그냥 자주 “오빠” 를 불러댔다. “오빠” “응” “오빠” “응”. 그를 계속 툭툭 치기도 했다. 아픈 새끼 강아지처럼 낑낑거렸다. 그런 내 마음을 모르는건지, 알면서 외면하고 싶은건지 그는 “얘가 오늘 왜 이러지” 라고 할 뿐이었다.


스물 일곱살, 충북에 있는 대학원을 다닐 때였다. 7월쯤 시내로 마사지 받으러 가는 길에 그에게서 안부를 묻는 연락이 왔다. 스쿠터를 타고 운전중이었음에도, 한 손으로 전화기를 귀에 가져다댔다. 두려웠지만 그렇게라도 받고 싶었다. 오빠가 위험하다고 하자 이어폰을 꼽고 통화중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나는 또 다른 거짓말을 했다. “나 일정이 있어서 조만간 대구로 내려갈 것 같아. 한 번 보자“. 내가 먼 대구에 일정이 있을리 없었지만, 그렇게라도 안 하면 영원히 못 볼것 같았다.


10월 20일이었다. 오빠보고 다음날 대구로 가도 되냐고 물었다. 오빠는 얼마든지 된다고 했다. 나는 만나는 사람이 있었음에도, 그를 만나러 기차타고 대구로 내려갔다. 그는 내가 온다고 야자 감독도 땡땡이 치고 나를 태우러왔다. 차에서 내려서 나를 맞이 하는 그의 환하고 따뜻한 표정, 머리를 쓰다듬는 그의 큰 손을 잊을 수가 없었다. 거대한 품에 안기고 싶은 마음을 계속 눌러야 했다. 그저 무표정으로 건조하게 “오랜만이네” 라고 할 뿐이었다. 그는 나를 족발집으로 데려갔다. 그는 족발과 술을 시켰다. 나는 그 앞에서 술을 마시지 못했다. 그는 내가 술을 안 좋아하고 못 먹는다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 앞에서만 취한척 하고 싶어서 마신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기하는 걸 뻔히 아는 사람 앞에서, 어떻게 취한 척을 하겠는가. 취한 척하며 지껄이는 진심들이, 그에게 감정적으로 부담을 준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 다음날 그는 점심을 사주고 드라이브를 시켜줬다. 스물 세살에 일했던 곳이 보였다. 내 인생에서 가장 지독했던 20대 초반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수백만원 짜리 인강비 갚고 월세와 생활비 벌어가면서, 연애 비용을 상당 부분 부담하면서 티내지 않고 살았던 날들. 나는 창밖을 보다가 나지막하게 “동네가 익숙하다” 라고 말했다. 시간이 오래 지났는데도 그는 바로 이해했다. ”너 일 여기서 했잖아“.


그 짧은 대화에는 사연이 있다. 당시 그는, 내가 그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았음에도 빨리 알아챘다. 특정 시간부터 연락이 안 될 뿐더러, 평범한 벌이로 하루에 10시간씩 도서관에 있으면서 저런 소비들이 가능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오빠가 알게 된 후에도 나는 출퇴근 보고를 하지 않았다. 오빠가 먼저 “오늘은 일 갔어?” 라고 물었고, 나에게서 답장이 몇 시간 동안 없으면 “일 갔구나” 라고 했다. 내가 오늘은 일 안 가고 공부하고 있다고 말하면, “출근 했다고 말해도 괜찮아“ 라는 답장이 돌아왔다. 내가 다음날아침이 아닌 오후 되서야 카카오톡 답장을 하면 “어제 일 갔구나. 좀 더 자“ 라고 했다. 오빠는 “오늘은 손님이 많아?“ ”오늘은 진상이 없기를 오빠가 기도해줄게” “일하는데 굳이 밖에 나와서 답장 안해도 괜찮아” 라는 메시지도 보냈다. 모든 걸 알고 하는 말이었지만, 나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 얘기 자체를 안하고 싶었다. 그의 일상에 대한 질문만 계속 던졌다. 답변을 회피하는 방법이었다.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도 거짓말을 하지도 못해 침묵하는 일상이 지속됐다. 연인 사이에 평범하지 않은, 익숙해지면 안 될 대화가 익숙해지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저 일하면서 겪는 일들을 한 마디도 하지 않으면 될거라고 생각했다. 서로 껄끄러워질 이야기만 하지 않으면, 주로 낮의 일상에 대해서 대화를 주고 받으면 괜찮을거라 생각했다. 다그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래서 심적인 부담이 없다는 이유로, 관계의 끝을 계속 유예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이 모든 것들을 방치했다. 언젠가부터는 오빠가 이 말을 했다. “오빠가 아무것도 묻지 말까?” 마음이 내려 앉는 것 같았다.


대학 졸업 후 스물 네살이 되던 해 큰 결심를 했다. 이력서를 들고 PC방 등 아르바이트 면접을 보러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다 한정식집에서 최저시급을 받고 파트타임으로 일하게 됐다. 오빠는 내심 반가워하는 듯 했지만 내 생계를 걱정했다. 원래 하던 일 하는 게 낫지 않냐고 물었다. ‘연인’으로서의 내가 아니라 그냥 한 ‘인간’으로서의 나를 위한 말이었다. 이별은 시간 문제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오빠가 그저 내 손을 놓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한정식집에서 딱 1주일 일하고 그만뒀다. 수십개의 그릇들을 한 번에 들었다 놨다 해야하니 근골격계 통증이 너무 심했고, 퇴근하고 저녁먹고 도서관에 앉으면 5시였다. 공부 시간도 많이 뺏기고, 너무 피로했으며, 바쁜 일상을 뒷받침해줄 비용을 감당하는건 불가능했다. 득 없는 고생을 할 뿐이었다. 1주일 일하니 15만원이 손에 떨어졌다. 바로 다시 원래 일하던 곳으로 돌아갔다. 1주일 동안 벌었던 돈을 하루만에 벌었다. 일하는 날과 시간이 줄어드니 공부시간이 많이 늘어났다. 숨을 쉴 수 있었다.


오빠에게 그만두고 다시 돌아갔다고 말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는 너무 빨리 눈치를 챘다. 티가 났다. 오랜만에 평범한 일을 하는 게 신기했는지 매일 일하면서 보고 듣는 것들을 말하다가, 어느 순간 출퇴근 했다는 사실만 얘기했다. 오빠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내가 겪지 않은 일을 지어낼 능력이 없다는 것을. 내가 아무말도 하지 않았는데도, 내 마음을 아는 듯 “오빠한테 미안해 하지 않아도 돼” 라고 했다.  

그 때 그 시간들이, 드라이브를 하면서 나눴던 짧은 대화 안에 녹아 있었다. 나는 오빠와 카페를 가서 차를 마신 후 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향했다.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로부터 약 두달 쯤 뒤에 나는 운 좋게 신문사에 취업을 했다. 그는 취업을 축하한다고 했고, 그 후로도 가끔 메시지를 주고 받았다. 지난해 7월 10일 회식 중간에 밖으로 나와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바로 받았고 30분 넘게 긴 통화를 했다.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하고 있음에도 회사에 잘 다니고 있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는 내가 살아온 날들을 알았기 때문에, 이제는 잘 정착하고 살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다. 헤어진 마당에 이미지 관리가 무슨 의미가 있겠냐만은, 좋은 모습만 보이고 싶었다. 헤어질 때 그가 남겼던 말을 계속 마음에 품고 살았던 탓이다. 그는 나보고 “목소리도 말하는 것도 뭔가 어른스럽게 변했다”고 했다. 그가 연애하면서 바라는 모습이었을터다. 그런 말도 했다. “오빠는 너만 보면 나의 아저씨에 나오는 이지안 같아” 그가 이별을 고한 이유는 그것이었을 것이다. “곧 방학이야. 주말에 보자. 오빠가 서울로 갈게“ 그는 말했다. 인스타그램으로 간간히 메시지를 주고 받다가, 언젠가부터는 그의 스토리에 결혼 준비 사진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는 그를 만나서는 안 되겠구나’ 조금은 슬펐다. 마음에도 없는 ‘좋아요’를 눌렀다.


이별하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언론사 입사를 할 무렵부터 나는 삶의 안정을 되찾았다. 모든게 과거형이 됐고, 내가 살아온 날들을 잊을만큼 새로운 환경에서 정신이 없었다. 입사하고 1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의, 취재원이 아닌 사람들이 나를 찾았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기대고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와의 이별이, 그가 헤어지면서 남기고 간 말이 준 아픈 선물일 것이다. 행복했으면 좋겠다. ‘아빠’가 아니라 ‘오빠’ 로 살고 있는 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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