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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영인 Aug 08. 2022

79억 5,395만 2,577여개의 이창

구병모-'이창'을 읽고 난 후의 미지근함

화자는 '신념'이 아주 강한 사람임을 내내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다소 과하기 까지 한 그녀만의 인생철학이랄까, 가치관과 행동력 때문에,

아파트 건너편 그림자만을 보고 아동학대를 상상하며 정황들을 끼워 맞추는 장황설을 늘어놓는 그녀를 보며,  저는 오히려 지지하기보다는 의심하는 쪽에 가까웠던 것 같습니다.


그녀가 자신의 인정 욕구를 채우기 위해 정의감에 불타올라 누군가를 편집증에 가까울 정도로 오해하고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곧 깨달았습니다.

저의 '당연하다는 듯이' 그녀를 의심하고 책망하는 눈초리, 그것이 바로  모두가 알고 있지만 변화시킬 수 없는 현대사회의 문제 그 자체이자 이유였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녀의 오지랖은 자신에게 반드시 밀려오게 될 수많은 난관들을 알면서도 '감당'해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감당해 낼 자신이 없기 때문에 크고 작은 일들을 외면하며, 안주하고, 방심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녀가 끊임없이 자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 '당신들'이라고 지칭하며 거칠게 꾸짖는 대목을 마주하면서도,  '과하다', '그녀가 합리화를 하고 있다'라고 생각했던 제가 바로 그 '당신들' 중 하나였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뜨끔했던 것이었습니다.



'합리화'는 합리적인 척, 이성적인 척하는 '당신들', 그리고 '나'의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무관심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으며, 오지랖퍼가 되기 싫은 마음으로는 관심을 행할 수없음을 항상 떠올리며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한 가지 더 함께 이야기 나누고 싶은 점이 있습니다.

 

그녀가, 소위 말하는 '당신들'보다 사회 정의 실현에 있어 더 나아간 존재라면,

확신에 찬 자의적인 판단을 한 후, 그에 따라 근거를 재배치하는 이러한 순의 접근법은 불가피한 것일까요?

 

남들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 의도되었기 때문에 정말 남들이 보지 못하고 있을 때, 그것을 파헤치려면, 소설 내내 그려진 그녀의 적극적임을 넘어서 다소 거칠었던 일련의 생각 과정들이 최선의 방식이었던 것인지 깊이 이야기해보고 싶습니다.

 


저마다 내부에 품고 있는 개인적인 '욕망'이 어떤 일이든 행하게 하는 동력이자, 큰 불로 번지게 할 수 있는 기름임을 알기에,

'욕망'이 더욱 커지면 객관성을 잃고 실수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의 접근방식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생각했을 때 '과한'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정말 실수일 수 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의 모든 사고와 행동에는 욕망이라는 동력을 제거할 수 없다고 생각하므로 역시 그것이 최선이며, 설령 개인적 욕망의 지배를 받게 되더라도, 타인을 외면하지 않고 행동을 취하는 바로 그 순간들이 현대사회의 문제를 변화시킬 수 있는 용기 있는 유일한 첫걸음인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무관심과 오지랖,

각자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는 긴 '합리화' 과정,

그 사이 어딘가의 지점에 멈추어 서서

정말 '합리적'으로 바라보는 것. 그것이 가능할까요?


아니 애초에 이 세상의 수많은 사고, 그리고 그 사고가 '사건'으로 넘어가는 지점을

인간은 정녕 '합리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인간은 세상의 사건을 어떻게 예방하고 인식하고  처리해야 하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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