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이 살아가는, 어쩌면 ‘처해진’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 같은 사회는 어딘가 무미건조한 삭막함이 느껴졌다. 빵집 주인은 빵을 굽는 일에 충실하며, 의사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딱 거기까지 의사로서의 본분을 수행하며 각자의 위치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 사이에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 굵은 선으로 철저히 나뉘어 있음을 선명히 느낄 수 있었다. 앤에게는 ‘특별한’ 케이크가, 빵집 주인에게는 그저 대가를 받는 노동의 결과이자, 언제든지 ‘시간과 돈만 낭비한’ 것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그저 최소한의 말들, 필요한 정보만 오갔을 뿐 즐거울 만한 것은 없었다.’는 대목에서도, 빵집 주인은 앤의 들뜬 마음을 공감하지도, 소통하려 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앤은 그것이 무례한 것은 아니며 그 이상의 교류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일종의 ‘현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스코티에게 초기 조치를 취할 수만 있었다면 죽음을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예외적인 일이기에 그러지 못한 것을 ‘당연한’ 일로 여기며 그저 부검 이야기만 할 뿐이었던 의사를 통해서도, 함께 살아가지만 너무나도 멀리 떨어져 있는 우리 사회를 그려내고 있었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점은 따로 있었다. 바로 작가는 이러한 현실을 과장 없이, 그리고 생략도 없이 아주 사실적으로 보여줄 뿐이었고, 어조는 아주 담담하고 절제되어 있었다. 마치 이것이 잘못된 ‘문젯거리’가 아니며 매우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어쩔 수 없는 인간 사회의 작동 방식임을 알려주는 듯했다. 이 사실은 내게 아주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손 닿으면 깨져버릴 것 같은 불안정하고 차가운 얼음판 위를 걷고 있는 앤은 자신의 상황에 입각해 빵집 주인을 뺑소니 범이라던가 하는 악마 같은 존재로 여겨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망가져가는 듯했지만, 그런 그녀를 진정시키고 고통을 잊게 한 것은, 다름 아닌 빵집 주인이 건네준 롤빵이었다.
앤의 사정을 알게 된 빵집 주인은 그저 솔직하고 투박한 진심 어린 사과와 함께 커피와 빵을 내어준다. 따뜻하고 달콤한 빵과 커피 한 잔이 바로, 가장 고통스러운 절망을 안고 있는 앤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위로가 아니었을까. 다소 거친 검은 빵이 ‘형광등 불빛 아래로 들어오는 햇살’처럼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사실 우리가 슬픔에 빠진 이들에게 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물며 가장 잘 안다는 나 자신의 고민에도 완벽한 해결책과 위로의 길을 찾지 못하는데 말이다. 이때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은 바로 ‘별것 아닌 것 같은’ 무언가였던 것이었다.
지금까지 나는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과, 거리의 냉랭함이 ‘문제’라고 생각해왔고, 그것을 해소해야 한다는 강박이 내 안의 허전함을 더욱 키웠다. 지친 나의 하루를 위로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요구하는 조건은 날로 커져만 갔고, 이런 내게 이 사회는 너무나도 차갑고 개인주의적인 곳이었다. 완벽히 행복만으로 찬 인생을 열기 위한 열쇠가 존재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열쇠를 찾지 못해 항상 괴로움이 따라왔던 것이다.
그러나 인생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인생에 슬픔이 없을 수 없다. 때로는 어떠한 말로도 위로되지 않는 슬픔과 절망이 찾아오기도 한다. 그러나 그 또한 소중한 내 인생의 일부이며, 내 인생을 더욱 빛나게 만들어 준다. 사실 그것을 완벽히 해소할 수도, 해소해야 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위로와 도움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슬픔과 절망 또한 그렇다. 따뜻한 빵집에서 새벽이 될 때까지 먹었던 빵과 빵집 주인의 시시콜콜한 이야기처럼 별것 아닌 것 같은 작은 것들이 나를 위로했고, 살아갈 힘이 되어주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나의 공허함은 ‘별것 아닌 것’을 ‘별 볼 일 없는 것’으로 치부해, 그 가치를 소중히 여기지 못하고, 거창하고 허황된 이상만을 갈망하는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인간 사회는 그냥 별것 아닌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 자체로 의미 있고 소중한 것이 아닐까. 그저 그 사이에 행복 또한 함께 스며들어있다면 그것도 괜찮은 삶일 것이다. 삶 가운데 행복이 있다면 행복한 삶일 수 있는 것이고, 절망은 이겨낼 필요 없이 그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담담히 묻어 두면 되는 것일 수도 있다. 이때 그저 작고, 일상적인, 특별할 것 없는 무언가로 채워가면 되는 것임을 깨달았다. 이것이 바로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이야기의 중간 즈음에서, 앤은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던 ‘프랭클린’을 기억하고, 간호사에게 그의 일을 물어본다. 처음의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안타까운 일인 한 사람의‘죽음’에 대해 만약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었다면 아예 모르고 지나쳤을 현실이, 그리고 ‘잘’ 아는 사이가 아니기에 소식을 듣고 한번 떠올려주는 것 밖에 할 수 없는 것이, 아니 어쩌면 하지 않는 현실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소설의 마지막 장을 넘기며 앤 부부와 함께 빵집에서 밤을 새웠던 나는, 이제 조금 다르게 바라보는 법을 배웠다. 인간 사회라는 것은 어쩌면 ‘별것 아닌 것’ 일지도 모른다. 앤이 그랬던 것처럼, 인연이 닿은 사람을 향한 최소한의 관심을 보이기 위해 때론 잠시 옆길로 한 발짝 내디뎠다가, 또 원래의 길로 돌아와 다시 걸어가는 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그 일시적인 관심은 ‘일시적’이기 때문에 진심이 아닌 것이 아니고, 그 관심 하나하나가 그 자체로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또한 인생은 결국 홀로 살아가는 것임을 깨달았다. 이는 인생은 혼자라는 뜻이 아니라, 운전대를 잡은 사람은 결국 나 한 명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내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어디든지 갈 수 있고, 길 위에서 수많은 존재와 조우하며 함께 달릴 수도 있는 것이다. 내 차 안에는 가끔 가까운 사람들이 탈 수 있지만, 내 좌석인 운전석은 나만이 앉을 수 있다. 그래도 함께 넓은 세계를 달리고 있지 않은가.
의사도, 빵집 주인도, 심지어 평생을 약속한 남편도 단 하나의 존재인 ‘나’를 잘 이해할 수도 없고, 서로가 자신의 일부로 진정 받아들이는 일은 애초에 불가능하지만, 그것을 인정하고 이해하면서, 별것 아닌 인연과 별것 아닌 행동을 통해 감정들을 공유하며 살아가는 것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이전까지의 나의 이상대로라면, 절망 속에서 취할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부부끼리 서로 붙잡는 것이었지만, 앤과 그의 남편은 그렇지 않았다. 남편이 ‘걱정하는 표정도 보이지 않고, 얼마간이라도 그저 혼자서 보내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앤은 받아들였다. 각자의 시간이 필요함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내내 함께 있으면서 도왔음에도 하워드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던’ 그녀였지만, 곤경 속에 함께 있다고 느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그녀는 ‘그의 아내라는 사실이 기뻤다’는 것이었다.
담담히 풀어내는 지극히 현실적인 감정들이 나에게 가르침을 주었다.
가끔 절망이 찾아올 때 버틸 수 있게 해 주고, 우리가 매일매일을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동력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아주 일상적이고 작은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꼭 ‘별것’이 있지 않아도, 누군가에게 달콤하고 따뜻한 빵을 건네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