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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기하는 늑대 Oct 12. 2024

매일 열리는 열매

https://groro.co.kr/story/12122



 난 만滿으로 44살이다. 며칠 더 지나면 45살이다. 1년을 365일로 계산하면 16,425일에서 며칠 빠지는 삶을 살아왔다. 조금 살았다면 살았다고 할 수도 있고 아직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많다고 할 수도 있다. 인생의 반환점을 돌고 있다고 표현할 수도 있는데 그건 좀 아닌 거 같다. 이미 오래전에 백세百世시대에 접어들어 환갑還甲잔치가 유명무실有名無實해진 지금 나이 50도 아니고 45에서 며칠 빠지는 놈이 인생의 반을 살았습니다 하고 이야기하는 건 좀 우스운 거 같다. 아직 애기다, 애기.



 잠시 옆길로 새 보면 ‘서른 즈음에’라는 노래의 제목을 조금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노래가 1994년에 나왔다. 30년 전에 나온 노래다. 그때의 서른과 지금의 서른은 그 의미가 상당히 다르다. 그때 서른이면 취업을 해도 한참 전에 했으며 웬만하면 결혼도 다 해서 애가 한 둘은 있는 정도의 나이다. 지금과 달라도 너무 다른 서른이다. 그리고 그때는 환갑잔치를 당연히 하던 시절이기도 했다. 그러니 그때의 서른은 인생의 반환점을 도는 시점으로 이런저런 삶의 회한悔恨과 무게 등을 절감할 수 있고 그런 감성을 반영하듯 ‘서른 즈음에’라는 제목을 달고 대중가요가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의학 기술의 발달로 평균 수명은 점차 늘어 가고 환갑은 잔치를 하기엔 민망한 나이가 됐고 한창 성장기였던 90년대와 달리 정체기인 지금은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사회에 나가기 전에 이런저런 준비를 많이 하다 보니 서른 즈음에 사회에 발을 내디디면 다행인 시대가 됐다. 그런 서른에 인생의 회한과 무게를 느낀다는 건 뭐랄까 조금 초점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감정적인 사치라고 하기엔 뭐 하지만 여하튼 조금 안 맞는다. 이제 겨우 준비해서 막 달리려는 사람에게 회한과 무게를 느껴라? 달리려는 사람 주저앉히는 격이다.



 물론 서른 즈음에라는 노래의 잘못은 아니다. 그만큼 시대가 변했다는 소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성과 합리보단 감성과 감정에 기대기를 좋아하는 인간은 그렇지 않음에도 그런 제목을 보고 노래를 듣다 보면 괜히 그런 감정에 빠지게 된다. 괜한 애늙은이를 양성할 수 있다. 해서 가능하다면 ‘마흔 즈음에’로 바꾸는 게 어떨까 하고 간간히 생각해 본다. 앞에도 밝혔지만 내 나이가 마흔이 넘었는데 솔직히 아직 인생의 회한을 느끼기에는 뭔가 할 게 더 많은 거 같고 해야 되기도 해서 그럴 겨를이 없다. 그래서 개인적으론 마흔 즈음에도 조금 그렇고 ‘쉰 즈음에’가 적절하지 않나 생각해 본다. 개인적인 경험으로 앞으로 5년 정도 더 살고 그야말로 백세 시대의 반환점인 50을 넘어서 봐야 뭐가 좀 보이고 느껴질 거 같다.



 해서 옆길로 샌 이야기의 마지막을 꼰대력을 발휘해 마무리해 보자면 나이가 계란 한 판이니 뭐니 하면서 괜히 애늙은이가 되질 않길 여러 청춘들에게 바라본다. 자기도 얼마 먹지 않은 나이에 꼰대 짓 한다고 욕해도 상관없다. 틀린 말은 아니니까. 백번 지당한 옳은 말이라고는 할 순 없으나 나름 일리 있는 이야기를 꼰대 소리 듣기 싫어 안 하는 것보단 꼰대 소리 들어가며 하는 게 맞다 고 생각해 다시 한번 강조해 본다. 서른이면 아직 어리니까 겁먹지 말고 ㅆㅂ, 아무거나 하고 싶은 거 마음대로 해 봐!



 다시 이 글의 본래 이야기로 돌아와서(아... 너무 샜어...) 16,400일 정도를 살아온 내 삶의 하루하루를 돌아보면 당장 생각나는 건 하나도 없다. 너무 당연한 하루가 늘 시작됐고 또 너무 당연하게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마무리된 16,400일 이기 때문이다. 물론 분명히 날마다 다른 일들이 일어났다. 좋았던 날, 즐거웠던 날, 재미있었던 날, 신났던 날, 의미 있었던 날, 진지했던 날, 뿌듯했던 날, 별로였던 날, 기억하기 싫었던 날, 화가 났던 날, 짜증이 났던 날, 한없이 민망했던 날, 한없이 고마웠던 날 등등등. 이루 말할 수 없는 날들이 이어져 왔다. 그렇게 쌓인 16,400여 일이다.


 특별하고 엄청나게 기억나는 날은 많지 않지만 분명한 건 다 소중한 날이다. 그 하루하루가 있었기 때문에 그 하루하루가 어떤 하루였건 간에 내가 존재하는 하나하나의 밀알이라고 생각하면 소중하지 않은 날은 없다. 다만 아쉬운 건 무가치하게 허무하게 허망하게 쓰레기처럼 버린 날도 많다는 점이 조금 걸릴 뿐이다. 겨우 백 년 남짓, 그러니까 36,500일 정도 사는 주제에 영원히 살 것처럼 하루 그까짓 거 아무것도 아닌 양 버린 날이 생각보다 너무 많아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스스로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하지만 이런 날들조차 나란 존재를 만들어 온 날이다. 그러니 이런 날들 역시 한편으로는 분명히 의미가 있다.


 사실 사람의 인생이라는 게 당장 내일을 알 수 없는 건데 우린 너무 아무렇지 않게 내일이, 내일의 태양이 뜰 거라고 너무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허투루 보내는 날이 많은 거 같다. 오늘 하루쯤 버려도 내일이 있으니까... 내일 하루마저 버려도 그다음 날의 태양은 또 뜰 거니까.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살려는지, 나라는 존재 자체에 그리고 이 땅에 나를 내놓아 주신 부모님에게 비수처럼 꽂히는 미안함을 어쩌려고 이러는지... 있다면 죽어 나태懶怠지옥에 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가끔 든다.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가끔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저는 특별한 계획이나 목표 혹은 목적 같은 게 없어요. 아, 물론 장기적인 관점에서 이렇게 살아야겠다 아니면 이런 일을 해야겠다 하는 생각은 분명히 있지요. 하지만 그것만 바라보고 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저 오늘 하루 최선을 다해 살뿐입니다... 처음엔 뭔 소린가 싶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누가 봐도 엄청난 성과를 낸 소위 성공한 사람이 원대한 목표나 계획을 바라보기 보다는 그저 오늘 하루를 열심히 산다고? 말이 되나 싶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들은 원대한 계획이나 목표가 없는 게 아니다. 분명 있는데 그런 걸 이루기 위해 지금 당장 내가 해야 될 게 무엇인지 명확하게 파악한 상황에서 오늘 하루, 해야 할 일의 정도를 계산하고 묵묵히 뒤나 옆을 보지 않고 앞으로 나간다는 의미다.


 조금 결이 다르지만 영화 ‘아저씨’에도 그런 대사가 나온다. 주인공이 이러저러한 이유로 극 중에서 소위 나쁜 놈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다. ‘니들은 내일만 보고 살지? 내일만 보고 사는 놈은 오늘만 사는 놈한테 죽는다. 난 오늘만 산다.’ 험악한 이야기지만 다른 거 생각하지 않고 오늘만 최선을 다해 살겠다는 절절하고 절박한 의지의 표현이다. 실제로 영화에서도 내일만 보고 사는 나쁜 놈들은 오늘만 나는 주인공에게 다 죽는다.


 그렇게 소중한 오늘 하루, 거의 백 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열려 왔고 열릴 열매. 잘 익은 날도 있고 달콤한 날도 있고 떫은 날도 있고 아주 시어서 눈을 뜰 수 없는 날도 있고 썩어 문드러져 땅에 떨어지는 날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괜찮다. 어떤 날이건 어떻게 열리는 열매건 어떤 색이건 어떤 맛이건 상관없다. 모두 소중하고 그 무엇보다도 나라는 나무를 만들어 가는 열매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어제 열렸던 열매가 어땠는지 연연하지 않고 내일 열릴 열매가 어떨지 저당 잡히지 않으며 오늘 당장 열린 열매를 어떻게 하면 맛있게 따 먹을 수 있을까만 고민하며 살기에도 충분한 인생이다.


 정말 고맙게도 매일 주어지는 인생의 아름다운 열매인 오늘을 살자. 오늘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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