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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뜨라이야기 Jun 09. 2021

노동의 익숙함.

노동의 익숙함.

 여느 때와 다름없이 회사에 출근한다. 출근 해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일을 시작한다. 나는 중공업에서 용접사로 일하고 있다. 용접사라고 해서 용접만 하는 것이 아니다. 설계도면을 보고 단품을 붙이는 취부도 하고, 그라인더 작업도 한다.
 

용접할 때는 고온의 순간적 열로 인해 불빛이 발생하고, 쇠를 녹일 때 나오는 “흄”이라는 연기도 나온다. 그라인더 작업을 할 때면 쇳가루가 공중으로 흩어지며, 그 냄새는 매캐한 것이 고약하다. 공장 안에 용접 불빛, 용접 흄, 밝은 날에 햇살이 비치면 허공에 떠다니는 쇳가루 그리고 달팽이관을 크게 자극하는 망치질 소리가 가득하다. 이런 환경 속에서 일하는 것이 내겐 일상이다.


 나의 일상인지라, 더럽거나 꺼림칙하지 않다. 마스크와 용접 장갑, 용접 재킷 등의 보호 장비를 착용하면 되는 것이고, 용접할 때 나오는 가스 조금 마시고, 쇳가루 조금 입에 들어간다고 해서 바로 죽거나 큰 병 생기는 것도 아니다.


 사회초년생이었을 때는 지금의 생각과 많이 달랐다. 그때는 왜 그리 기겁을 하고 싫어했을까? 용접이란 작업을 혐오했을까?

 군대 제대 후, 전문대를 졸업했다. 사회로 나오니 망망대해에 나 혼자 돛단배를 타고 있는 기분이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먹고살아야 할지, 가만히 있으면 뜨거운 햇볕에 말라죽을 것 같아 어디로든 노를 저어가야 할 것 같다.


 뭘 해서 먹고살지 막막할 때, 현장직을 고려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 원인을 내부적 요인과 외부적 요인으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내부적으로는, 전문대를 나왔고 학점도 높았기에, 단순노무나 힘든 작업은 하지 말아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사회를 나오니, 고졸이나 전문대 졸이나 별반 차이가 없었다. 그리고 전문대 전공분야 쪽으로 일을 하기도 힘들었다. 전공분야 쪽으로 일하려면 더 진학해야 했다. 인문계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4년제를 다니는 친구들이 많은 탓에 나의 눈높이가 높아져버린 것도 작용했다.


 외부적으로는 남의 시선이다. 직장이 명함인데, 친구들이나 지인을 만날 때 좀 더 나은 사무직에서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대부분의 사회 초년생들은 어딜 가나 비정규직으로 현장 일을 할 것이다. 현장직 비정규직이라고 하면 바라보는 시선이 좋지만은 않다. 친형의 친구가 자동차 정비업체 사장이다. 간혹 가다 부모님의 차 엔진오일을 갈기 위해, 그곳에 방문했다. 그럴 때마다 “형”이랍시고 충고나 인생살이 이야기를 하는데, 사람을 아주 비참하게 만든다.


- 넌 올바른 여자하고 결혼하기 힘들 거다. 요새 젊은 여자들 눈이 높아서 너 같은 남자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노래주점이나 다방 쪽에서 종사하는 아가씨들을 알아봐라. 잘하면 결혼할 수도 있다. 내가 아는 다방에 일하는 아가씨가 있는데, 괜찮다. 네가 원하면 소개해주겠다.


 고성을 지르고 난장판을 만들고 싶지만, 친구 동생을 생각해서 나온 말이라 여기고 참았다. 단순히 “그러려니”하며 넘어갔다. 관심이 없으면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을 것이다. 무관심보다는 차라리 이런 관심이 더 나을 것이라, 아주 긍정적으로 해석했다.


 특히나 내가 하고 있는 “용접”에 대해 비하하는 발언을 들은 경험도 있다. 용접사를 땜쟁이라고 하질 않나, 용접을 많이 하면 결혼해서 아이를 못 가진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용접을 하면 대우를 못 받기에, 호주에 갈 것을 추천하는 지인도 있었다.


 이런 내부적, 외부적 요인으로 전문대 졸업 후 현장 일에 제대로 적응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6개월이 지나가자, 스스로 자각이 되었다. 그나마 6개월 정도로 자각한 것도 부모님의 질타와 잔소리로 빨리 단축된 것이다.


 현재, 공장 내 현장에서 용접을 한다. 용접을 하고 난 후, 용접비드(용접 후 굳은 자국)를 보면 뿌듯하다. 용접이 잘 되어, 만든 제품이 튼튼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용접과 관련된 역사나 사업을 살펴보면 자랑스럽기까지 하다.


 우리나라는 한국전쟁 이후 먹고살기가 힘들었다. 시간이 흘러, 경공업에서 중공업으로 바뀌면서 경제가 크게 부흥했다. 수출이 급격이 늘어나고 국민소득이 높아졌다. 그 중심에 중공업의 역할이 컸고, 미시적으로는 용접사의 역할이 중요했다.
 지금도 용접은 건설, 제조 등의 다양한 분야에 쓰이고 있으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사회 초년생 느꼈던, 현장직에 대한 부끄러움은 더 이상 없다. 오히려 자랑스럽고 만족하고 있다. 남에게 피해나 상처 주지 않고, 공장에서 묵묵히 땀 흘리며 돈을 번다. 용접으로 인한 화상이나 흄은 보호 장비를 착용함으로써 피해를 최소화한다. 그라인더 작업으로 얼굴과 작업복에 달라붙은 쇳가루, 분진은 털어내고 씻으면 그만이다.


 뉴스에, 자본소득으로 근로소득보다 더 많은 수익을 낸다고 한다. 그런 것을 보면 힘이 빠지기는 하지만, 먹고사는데 지장 없고 주말에 놀러 갈 수 있으니 축복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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