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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뜨라이야기 Nov 04. 2021

비교가 낳은 참극


 대기업에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통근버스를 타고 퇴근을 했는데, 어머니가 통근버스가 정차하는 곳에 마중을 나와 있었다. 어머니와 나란히 걸으며 집으로 향했다.


- 대기업 출근하니 어때?

- 너무 좋아요. 이렇게 출∙퇴근복도 주고 통근버스로 집 근처로 데려다 주기도 하잖아요. 게다가 통근버스를 이용하는데도 불구하고 직원들 출∙퇴근을 위해 주유 티켓도 지급해주잖아요. 이게 다 어머니 덕분이에요.


 나는 상의로, 봄∙가을용 회사 잠바를 입고 있었다. 대기업 로고가 적힌 것이 왠지 뿌듯하다.


 어머니와 이렇게 나란히 길거리를 걸었던 적이 있었나? 별로 없었던 듯하다. 어머니는 우리 형제를 먹여 살리기 위해 아버지와 함께 밤 늦게까지 일하셨다. 그때도 시급제였기 때문에 공장에 오래 머물수록 더 많은 월급을 받았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자식들과 같이 있을 시간이 적은 것이다. 그래도 나의 기억 속, 흐릿하지만 어머니와 길거리를 걸었던 것이 떠올랐다.


 내가 고등학생일 때,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버스 정류장에서 내릴 때였다. 어머니가 버스 정류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당시 추운 겨울날이었기에 어머니가 걱정되었다. 힘든 노동으로 몸도 피곤할 텐데, 무거운 몸을 이끌고 나를 마중 나온 것이 못마땅했다.


- 어머니, 왜 여기 나왔어요? 날도 춥고 피곤할 텐데....... 다음부터 나 마중 나올 생각하지 마세요.

- 우리 아들이 걱정되어서 나왔어.


그냥 좋게 넘어가면 될 것을, 나는 다시 단호하게 말했다.


- 앞으로 절대 마중 나오지 마세요. 내가 한, 두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니고.


어머니는 내가 걱정되었고, 나는 어머니가 걱정되었다. 서로를 위한 마음은 같았는데, 나의 거칠고 단호한 말투 때문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 이 녀석이. 부모한테 고마운 줄 모르고.


집으로 들어갈 때까지 말다툼이 벌어졌다. 그 이후 어머니는 다시 마중 나오시지 않았다.


 내 기억 속, 어머니와 길거리를 같이 거닐 때를 떠올리라고 한다면 이 기억밖에 생각나질 않는다. 사이좋게 오순도순 이야기 나누며 거닐었다면 더 좋았을 것을. 하지만 내가 어머니께 단호하게 말한

 것은 어머니가 출근길에 겪은 일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이른 아침마다 통근버스를  타기 위해, 통근버스가 정차하는 곳으로 걸어갔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긴 끈이 달린 작은 가방을 한쪽 어깨에 걸치고 출근하는데, 오토바이 한 대가 어머니 뒤를 쫓아왔다. 오토바이에 탄 남자는 어머니의 어깨에 걸린 가방을 가로채려고 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본능적으로 양 손으로 가방을 꽉 잡았다.

- 이거 놔. 씨발 년아.

오토바이를 탄 남자는 쌍욕과 함께 우리 어머니를 발로 차버렸다. 어머니는 더 큰 불상사를 피하기 위해 가방에서 손을 떼고 넘어져버렸다.   


 다행히 어머니는 크게 다치시지 않았고 가방에는 2만 원 정도의 현금 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큰 피해를 입지 않으셨기에 경찰에 신고도 하지 않았다. 오토바이를 탄 날 강도는 어머니가 장사하는 사람인 줄 알았나 보다. 내가 사는 주택가에는 상가도 여러 곳 있었다. 그곳에서 밤 늦게까지 일하고 현금을 가방에 넣고 다니는 상가 사장쯤으로 여겼나 보다.


 어머니가 이런 일을 겪었기에, 나는 어머니가 걱정되어 그리 말한 것이다. 내가 왜 마중 나오지 말라고 했는지, 거기에 대해 부연 설명을 했다면 싸울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부연 설명이란 것이 귀찮았고 어머니를 걱정하는 나의 마음을 들키기 싫었기에 말하지 않은 것이다.


 옛 기억에서 벗어나,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이젠 내가 대기업에 다니고 어머니도 걱정이 없으시기에, 마음이 여유롭다. 그렇기에 대화가 즐겁다.


- 그러고 보니, 너랑 이렇게 걸어본 적이 없네. 돈 번다고 허구한 날 공장에서 처박혀서 살았으니.


어머니는 내가 고등학생일 때  나와 버스 정류장에서 우리 집까지 걸으며 말다툼을 한 것이 생각나지 않는 모양이다.


 집에 막 다달았을 때, (우리 동네는 주택이 밀집되어 있다.) 우리 옆집에 엄청나게 많은 양의 책들이 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옆집에서 이사라도 가는 것인가? 궁금한 것을 어머니에게 물어보았다.


- 어머니, 옆집 현관문 앞에 책이 왜 저리도 많이 쌓여 있어요?


어머니는 옆집에 무수히 쌓인 책들을 바라보며 “아이고”를 연신 외치며 긴 한숨을 쉬었다.


- 아이고, 불쌍해라. 우야노! 옆집 주인 아들이 자살했대. 서울에 있는 대학교까지 졸업했는데도 취직을 못하고 있었어. 그래서 공무원 준비를 5년 전부터 했는데, 잘 안되었나 봐. 부모는 속이 썩어 들어가지. 그래서 잘 되라고 한소리 했나 봐. “내가 너 서울에 있는 대학교까지 졸업시켰으면, 이제 네 살길을 찾아야지. 다른 놈들은 대학교 가고 싶어도 돈이 없어서 못가. 내가 이 정도로 해줬으면 되잖아. 내 주변에 다른 아들들은 다 좋은데 취직하고 결혼해서 애 낳고 잘 살고 있어. 네가 뭐가 못 나서 지금 이 모양, 이 꼴이야?” 이게 다 자식 잘 되라고 한 소리인데, 자식이란 놈이 부모 깊은 속도 모르고. 죽으려고 약을 먹었다네. 으이구~ 못난 놈! 저리 되면 저 부모는 얼마나 상심이 클까? 저런 짓은 부모 가슴에 대못 박는 거야.


 나는 옆집 현관문으로 다가가, 책들을 살펴보았다. 공무원 시험과 관련된 책들과 여러 전문  서적들이 사람 키 높이만큼, 여러 군데 쌓여있었다.


 공무원 준비생은 왜 스스로 생을 마감했을까? 어머니 말씀처럼 가족들의 “비교” 때문이 아닐까? 순간 나의 고등학교 시절, 2명의 친구가 떠올랐다.


 한 명은 “정현”이라는 친구다. 정현이는 나와 같은 초등학교, 중학교를 거쳐 고등학교까지 같았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같은 동네에 살기도 했다. 주택이 밀집된 곳이었는데, 마을 한쪽 편에 철로가 설치되어 있어, 기차가 지나다녔다. 정현이 집은 기차가 다니는 철로와 가까워, 걸어서 간다면 10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였다.

 초등학교 시절에 정현이와 같은 동네였기에 자주 어울려 놀았다. 한 번은 정현이 집에 놀러 갔었다. 2층 주택이었는데, 꽤나 넓은 것이 좋아 보였다. 그 당시 우리 집은 전세로 2층 단독주택, 2층에 살고 있었다. 내가 뛰면 어김없이 주인집 아저씨가 점잖게 항의하러 왔다. 정현이가 있는 집은 자가로, 1층에서 생활했다. 그 당시 내 눈에 정현이는 모든 것을 다 가진 듯 보였다.


 정현이 집에서 놀다가 정현이가 새로운 것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 너 기찻길에 동전 올려놓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 동전이 단단하니, 당연히 튕겨나가겠지.

- 아니야. 막 완성된 달고나처럼 쭉 늘어져. 막 설탕을 녹여 만든 달고나를 바닥에 놓고 누르면 큰 원형이 되잖아. 동전도 그렇게 돼. 우리 가서 해볼까? 집에 십 원짜리 동전 많아.


 우리는 기차가 지나다니로에 갔다. 정현이는 엎드려 철로에 귀를 갖다 대었다.


- 이제 기차가 올 거야. 십 원짜리 동전 올려놓자. 철길 제일 중앙에 정확히 올려놓아야 돼.


나와 정현이는 십 원짜리 동전을 철길 제일 중앙에 위치시키고 멀찌감치 떨어졌다. 잠시 후 정현이 말대로 기차가 나타났다. 쏜살같이 기차가 지나갔다. 기차가 얼마나 빨랐는지, 뒤따라 바람이 강하게 불었다.


 기차가 지나가자, 우리는 재빨리 철로로 다가갔다. 동전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정말 정현이가 말한 대로 동전이 늘어난 엿가락처럼 쭉 늘어져 있었다. 모양이 재각각이었는데, 그중 정중앙에 제대로 놓인 동전 모양이 제일 깔끔했다. 십 원짜리 동전이 쭉 늘어져, 그 끝부분이 매우 날카롭다.


- 이거 칼 대신으로 사용할 수 있겠는데.


정현이는 늘어진 동전을 가지고 옆에 있던 나무의 잎사귀를 베었다. 빠른 속도로 베니, 정말 칼처럼 나뭇잎사귀가 손쉽게 베어졌다. 우리는 활짝 웃으며 신기해했다.


 기차가 정말 무겁고 무섭구나! 그때 우리는 기차의 무서움을 알게 되었다. 만약 사람이 십 원짜리 동전처럼 기차 밑에 깔린다면 어찌 될까? 상상도 하기 싫다. 그걸 잘 아는 녀석이 왜 그랬을까?


 정현이는 고3 수능시험을 앞두고 집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철로로 가, 기차가 오는 것을 보고 기찻길로 뛰어들었다.


 고3 때, 정현이가 죽기 전에 두 번쯤 만난 적이 있다. 서로 반이 다르고, 고3이라 바빠서 자주 만날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고등학교 교실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현관 입구에서 실내화로 갈아 신고 들어가야 했다. 그때 때마침 정현이를 보았다. 나는 반가움에 인사를 건넸다.


- 정현아, 요즘 어떻게 지내? 잘 지내냐?

- 어, 보통이야.


하지만 보통처럼 보이질 않았다. 정현이의 시선은 한 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무엇인가를 계속 찾는 듯이 고개를 두리번거렸고 눈알이 위빙 하듯이 움직였다. 불안한 눈빛, 걱정스러운 표정, 힘없이 축 처진 어깨. 그것이 정현이의 모습이었다.


 쉬는 시간에 학교 복도를 거닐다 정현이를 마주쳤다. 요번에도 인사를 건넸다.


- 좀 있으면 수능이네. 공부는 잘 돼가?


나의 물음에 정현이가 고개를 떨구고 뜬금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 아니, 성적이 오르지 않아.


정현이의 울먹거림에 나는 너무 놀랬고 정현이를 위로했다.


- 괜찮아. 너라면 잘할 거야.


위로는 이게 다 였다. 나는 정현이의 입장을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 부모님과 주변에서는 나의 성적에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학교에서 성적이 좋지 않았지만 우리 집 형제 중에서는 학업성적이 가장 좋았다.


 정현이가 죽고 난 후, 학교에서는 장례식에 갈 학생들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 친구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싶은 사람은 가고, 안 갈 사람은 안 가도 된다.


선생의 두리뭉실한 제의에 몇 명 학생이 지원했다.


 학교가 어수선했다. 수업시간에 선생들도 수업을 하기 싫은 지, 학생들에게 자율학습을 시키고 교실을 떠났다. 학생들이 쳐다보는 방향에 칠판이 있고 왼쪽에 조그마한 TV가 설치되어있다. 어느 겁 없는 녀석이 TV를 틀었다.


- 야! 선생님 오면 어쩌려고 그래?

- 지금 지방 뉴스 할 시간이야. 정현이 죽은 거 뉴스에 나오는지, 그것만 확인하자.


그 녀석 말대로 TV에서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정말 정현이의 이야기가 나왔다.


- 모 고등학교 학생이 지나가는 기차에 몸을 던져.......


뉴스에서는 상황만 설명할 뿐 이유나 동기 등,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나는 정현이의 장례식장에 가지 않았다. 자살은 비겁한 것이라 단정 지어버렸다. 그리고 장례식장에 가면 친구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준다는 말에 겁이 났다. 단단한 십 원짜리 동전이 철로 위에 올려놓자, 막 녹인 달고나처럼 늘어지는 모습이 떠올랐다.


 다음날 정현이의 장례식장에 다녀온 친구가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 어우, 씨발. 괜히 갔어. 친분이 좀 있고 옛정이 있어서 갔는데, 죽은 거 보여주더라. 진짜 토 쏟을뻔했어. 사람인지 정육점에서 갈기갈기 찢어놓은 고기인지 분간을 못하겠더라. 저게 정현이라고 하니깐 그런가 보다 했지. 머릿속에 계속 떠올라서 며칠 동안 밥 못 먹을 것 같아.


 떠들던 녀석은 장례식장에서 많은 정보를 얻었나 보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주었다.

- 카투사는 공부 잘하는 대학생이나 될 수 있잖아. 정현이 형이 카투사라네. 그런데 부모님이 형하고 정현이를 그렇게 비교를 했나 봐. “같은 피”인데, 넌 왜 성적이 그 모양이냐?라고 하면서 말이야. 정현이 짝꿍이 그러는데, 명절에는 친척들까지 와서 비교를 하고 열심히 공부해라고 했나 봐.


집도 잘 살고 성적도 그리 나쁘지 않았던 정현이는 얼마나 답답했을까? 성적이 좋다고 꼭 성공하는 것도 아니고 성적이 나쁘다고 해서 못 사는 것도 아니다. 성적이 다가 아닌데, 정현이 부모님과 친척들은 왜 그리 정현이를 몰아넣었을까?


 고등학교 학창 시절, 잘 나가는 사람과의 비교로 이상한 행동을 하는 녀석도 있었다. “대웅”란 녀석인데, 대웅이 형도 희한하게 카투사였다. 여기도 정현이처럼 부모나 친척, 주변에서 “같은 피”를 강조하며 형과 비교를 했다.


 이 녀석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았지만 엽기적인 행동을 했다. 집에 있는 프린터로 여자의 생식기를 화질로 인쇄해, 반 친구들 모두에게 나눠주었다. 포르노를 보고 화면을 캡처한 듯하다. 혈기왕성한 시기에 그것이 잘못된 행동인지 제대로 인지하지 못해 만류하지 않았다.


 대웅이는 비겁한 커닝도 했다. 힘 좋은 남자 선생이 교실에 있을 때는 하지 않고, 꼭 여선생이 교실로 들어오면 대놓고 커닝을 했다. 여선생은 대웅이를 처벌하지 않고 ‘부모님을 모셔와라.’고만 했다. 그렇게 대웅이 부모님이 학교를 찾아와도 대웅이의 커닝은 고쳐지지 않았다. 대웅이는 형과의 비교로 인해 발생한 스트레스를 엽기적인 행동으로 푸는 것이 아닐까? 또한 그런 행동이 자신의 부모님에게 복수하는 것이라 추측되었다.


 고등학교 친구들의 이야기로, 대웅이는 대학교를 진학하지 않고 옷가게 사장으로 잘 지낸다고 들었다. 대웅이 집은 잘 살았기에, 가능한 것이다.


 과거의 기억에서 깨어나, 내 방으로 들어왔다. 비교가 낳은 참극을 생각했다. 옆집 총각도 부모님께 비교를 당했다. 그렇다면 부모님 탓이 아닐까? 잘 나가는 남들과 비교를 하고 더욱 분발하라며 채찍질을 했다. 부모님도 잘못했지만 아들도 너무 성급했다.


 나도 군대 제대 후 마음에 드는 직장이 없어, 이직을 밥 먹듯이 했다. 그때 어머니는 내게 가혹할 만큼 남들과 비교를 하며 나의 정신상태를 꼬집었다. 현실은 냉랭했다. 일하러 온 사람들 소포품 취급하는 사장, 정규직과의 차별, 높은 물가와 상대적 박탈감으로 사회초년생일 당시에 한 곳에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난 운이 좋았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학창 시절, 나를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리시던 어머니와의 다툼으로 어머니에게 다양한 감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를 사랑하는 마음, 사회에서 남들보다 뒤처지기 싫어하는 마음, 아들이 더 잘 되었으면 하는 바람, 아들이 기대에 미치지 못해 생긴 답답함, 시간을 허투루 보내는 것 같아 생긴 초조함. 내가 힘들 때 어머니는 말로써 나를 채찍질했다. 하지만 그것이 답답함과 초조함에서 나온, 부연설명 없는 단호하고 거친 표현이란 것을 알았고 어머니의 진심은 사랑이란 것도 확신했다.


 내 방에 누워 힘들었던 시절을 떠올리고 있는데, 어머니가 내 방 문을 두드렸다. 어머니가 문틈으로 얼굴을 내밀며 내게 이야기했다.


- 아들 뭐해?

- 누워있는데요.

- 나랑 옆집에 쌓인 책 좀 옮길까? 어차피 버리는 책이잖아. 우리가 챙겨서 내다 팔면 재미 좀 볼 거 아니냐? 지금 가서 좀 옮겨놓자.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 아이 재수 없게. 남이 알면 욕해요. 그냥 TV나 보세요.


어머니는 겸연쩍하시더니 문을 조용히 닫았다.


 사회초년생으로 한참 이직을 했을 때, 어머니는 나를 정말 힘들고 지치게 했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아마 모를 것이다.


지금, 어머니와 나의 관계는 정말 좋다. 나도 부모가 되니, 옛 부모님의 행동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몇 달 후 옆집은 이사를 가버렸다. 그리고 올해 말, 정년퇴직하는 어느 선배님의 안타까운 소식이 들렸다. 공무원을 준비하는 자식이 약을 먹고 자살했다고 한다. 그 선배님은 충격으로, 회사와 노동조합이 주최하는 정년 퇴임식에 참가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각박하고 냉혹한 경쟁사회에서 잘 나가는 누구와의 비교가 그들을 죽음으로 내몬 것은 아닐까? 비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존중해주고, 힘든 것을 공감해주고 도움을 줄 수 있는 따뜻한 사회가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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