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뜨라이야기 Dec 14. 2021

극단적 선택을 당하다

 이 이야기를 글로 적을까 말까를 한참 고민했다. 좋은 이야기도 아니고, 나에게는 충격적인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정규직으로 생활하다 겪은 일이며 우리 주변에 또다시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다. 다시는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글을 적어보기로 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주변 사람, 특히 가족의 역할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내가 속한 협력업체는 대기업의 물량을 받아 생산하는데, 전기 쪽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래서 전기가 전기설비를 다룰 줄 아는 직원도 우리 협력업체 직원으로 소속되어 있다. 그중에 나의 눈에 띄는 아저씨가 한분 있다. 바로 “봉희 형님”이다. 50살 중반이 넘었는데도 아직 결혼도 하지 못했다. 나와 같은 세대야 부모님의 도움을 받지 못하거나 직장이 좋지 못하면 결혼하기 힘들지만 봉희 형님 때의 세대는 달랐다. 본인만 열심히 일해서, 돈만 어느 정도 모으면 충분히 집도 마련할 수 있고 결혼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의아하게 생각했었다.


봉희 형님과 처음 만났을 때, 그가 내게 던진 첫 말이었다.


- 군대 어디 갔다 왔어?

- 보급대에서 창고병으로 군 복무했는데요. 그건 왜요?

- 그냥 물어봤다.

- 그러는 형님은 어디 나오셨어요? 무슨 특전사 출신이에요?

- 특전사? 그건 아무것도 아니지. 난 UDT 출신이다. 그것도 중사까지 달고 전역했어.

- 이야~


 나는 봉희 형님이 UDT 출신이라는 말에, 저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UDT는 대한민국 해군으로써 특수부대이며 훈련이 엄청 힘들다고 정평이 나 있었다. 그래서인지 봉희 형님은 골격이 좋아 외관상으로도 힘이 좋아 보였다. 봉희 형님은 본인이 UDT 출신인 것에 대해 항상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야. 나 지금도 생생해. 살아있다고. 지금이라도 총 한 자루 쥐어주면 북한 가서 수뇌부를 없애버릴 수 있어.

-에이~. 나이도 있으신데.

-어허? 이 놈 봐라. 나 UDT야. 지금이라도 내 나라, 조국을 위해서 이 목숨 바칠 수 있어. 나라를 위해서라면 내 한 목숨 아깝지 않다고. 믿기지 않냐? 너 이리 와봐.


 봉희 형님이 본인의 손아귀 힘을 보여주기 위해 나를 잡으려 했다. 하지만 나는 잡히지 않고 항상 도망쳤다. 달아나면서 봉희 형님의 허세를 조롱했다. 비록 장난하는 식으로 형님을 대했지만, UDT 출신으로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느껴져서 좋았다. 그리고 젊은 사람들에게 항상 밝고 에너지 넘치시는 모습을 보여주며 힘을 북돋아주었다.


 어느 회사든지 회식이 존재했고, 그 회식을 제대로 관리하기 위해 친목회가 존재했다. 내가 속해 있는 협력업체는 3~4개월에 한 번씩 회식을 했다. 월급날이 오면 매달 2만 원을 회비로 걷었다. 시간이 지나 어느 순간, 내가 친목회의 총무가 되었다. 친목회 회장은 다른 지그에 일하는 40대 형님이었다. 이제는 회사생활에 적응되어, 일도 열심히 하고 총무로써의 역할도 충실히 해내었다.

 내가 총무가 되니 많은 사람들이 내게 관심을 가졌고 호감을 보였다. 그 덕분에 전기 관련 작업자들과도 친분을 쌓을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속한 협력업체 회식 날, 나는 봉희 형님 옆에서 술 한잔 기울였다. 서로 살아온 이야기를 들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 형님은 힘도 세시고 남자다운데 왜 결혼을 안 하셨어요?

- 원래는 결혼하려던 아가씨가 있었어. 미스코리아를 준비하던 아가씨였는데 예선에서 탈락했어. 아무튼 그 여자하고 눈이 맞아서 집에 데려갔더니 아버지가 결사코 반대를 하는 거야. 내 인생. 내가 사는데 말이야. 결혼을 하고 싶어도 집에서 반대를 하니 어쩔 수 있나? 결국 여자는 떠났지. 그 후에 열이 받아서 술 먹고 집에 들어가 난리를 피웠지. 부모님한테 가서 큰 소리로 원망도 하고 고함도 질렀지. 그리고 다시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부모님 앞에서 다짐하며 못을 박았지. 그게 지금까지 온 거야. 자식 낳고 싶은 생각도 없어. 그냥 한 평생 재미나게 살다가 죽고 싶어.


 봉희 형님의 하는 행동을 보면 정말 한 없이 즐기다 인생을 마감할 것 같았다. 술을 마시면 항상 2차를 갔다. 그것도 도우미를 부를 수 있는 유흥업소를 찾아갔다. 그러니 돈이 모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이 50이 넘었는데도 아직도 전세에 살고 있는 것이다. 젊었을 때 열심히 돈을 모으고 은행에 대출을 했다면 그 당시에는 집을 살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회식 날 즐거운 술자리가 무르익어갈 무렵, 술이 거하게 취한 봉희 형님이 나를 찾았다.


- 총무, 저번에 ‘왜 결혼 안했냐?’고 물었지? 내가 결혼은 안 해도 누릴 건 다 누리고 산다.


호기심이 발동했다. 또 장난을 치고 싶어 졌다. 그래서 자극시켰다.


- 뭘 누리고 사는데요?

- 너 나이가 몇이야?

- 좀 있으면 서른인데요.

- 난 지금 20대 중반인 여자를 만나서 연애하고 있어. 20대 애가 내 애인이란 말이야. 알겠어? 나이 많고 결혼 못했다고 무시하면 안 돼. 난 일부러 결혼 안 한 거야.

- 네. 형님. 알겠어요. 20대 중반 여자 애를 꿈속에서 많이 만나세요.


형님이 술이 되어 현실과 상상을 구분 못하는 것 같았다. 20대 아가씨가 뭐가 아쉬워서 봉희 형님 같은 50대를 만난단 말인가? 설령 돈이 많아서 돈 때문에 만날 수 있어도 봉희 형님은 나와 같은 비정규직 소속으로 재력가도 아니었다. 그리고 아직도 전세에 살고 있으며 술을 마시면 항상 2차를 가는 버릇을 보니 모아놓은 돈도 없을 것이다. 그래도 막무가내였다.


- 형님, 과거에 있었던 일을 현실과 혼돈하시는 거 아니에요? 아니면 어제 꾼 꿈 하고 지금 현실을 구분 못하시는 거예요?

- 허~ 이 놈 봐라. 진짜 못 믿겠다는 눈치네.


봉희 형님이 본인의 스마트 폰을 잠바 안쪽 주머니에서 꺼내 들었다.


- 자! 봐라!


 폰으로 찍은 사진들을 보여주었다. 첫 사진에는 머리를 노란색으로 염색한 젊은 여성이 나체로 누워 있었다. 요 위에 누워 있었고 이불이 옆으로 치워진 것이 보였다. 배경은 어두웠는데, 추측컨대 여자가 자고 있을 때 몰래 사진을 찍은 것 같았다. 너무 놀란 나는 저절로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봉희 형님은 나의 팔을 거세게 잡았다. 손아귀에 힘이 얼마나 강한지, 팔에 고통이 느껴졌다.


- 봐라! 새끼야! 내가 젊은 년이랑 얼마나 재미나게 노는지를.


봉희 형님은 자랑하듯이 폰 속, 사진을 넘기며 다른 사진도 보여주었다. 여성의 신체부위를 부위별로 나누어 여러 컷 촬영했다. 무슨 유적지에 온 것 마냥 웃으며 손가락으로 V자를 그린 사진도 보였다.


- 형님 이런 짓 하다가 구속될 수 있어요. 큰일 나요. 이건 범죄예요.

- 어차피 한번 살고 가는 인생, 내 꼴리는 대로 하고 살란다.


봉희 형님은 폰을 꺼, 다시 안주머니에 넣었다. 기가 차고 이해가 되질 않았다. 왜 저런 짓을 하지? 요즘 인터넷이나 TV를 보면, 몰래카메라 때문에 여성들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피해자들은 정신적 고통으로 병원을 찾기도 한다. 이런 사건을 발생시킨 가해자들을 보면 욕을 하곤 했는데 내 주변에 이런 사람이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나는 몰래카메라로 인한 피해사례를 들려주었다. 하지만 봉희 형님은 쓸데없는 설교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 걱정하지 마. 인마. 그냥 내가 간직하려는 거야. 이런 어린애가, 내가 좋아서 나랑 연애하겠어? 내가 술 사주고 돈 주니깐 오는 거지. 그리고 돈 떨어질 걸 알면 내 곁을 떠날 거 아니야. 그러니깐 이렇게라도 간직하고 싶은 거지. 이 사진을 이용해서 그 여자애를 괴롭힐 마음은 없어. 내가 양아치냐? 그냥 보관용이야. 옛 추억을 떠올리는 책갈피 같은 거라고.


핸드폰 사진 속의 여자가 어두운 곳에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봉희 형님이 플래시를 터뜨리며 열심히 촬영한 듯했다. 봉희 형님이 여자에게 술을 엄청 먹였는지, 술에 수면제를 탔는지. 그것은 알려주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그건 “범죄”라고 연신 이야기했다.


- 형님, 그거 빨리 지우세요. 형님을 위해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혹시나 타인의 손에 들어가면 형님이 피해를 볼 수 있어요.


내가 계속 지울 것을 주문하니 봉희 형님은 짜증을 심하게 내었고 급기야 쌍욕을 해댔다.


- 꺼져. 안 보여 주려고 했는데……. 네가 하도 나를 무시하니깐 보여준 거 아니야. 그리고 다른 데 가서 이상한 말 하지 마. 너 이 새끼. 혹시 부러워서 그러는 거야?


나는 할 말을 잊어버렸다.


- 형님, 저는 못 본 걸로 할게요. 다음부턴 그러지 마세요.


나는 다른 자리로 가, 술을 마시며 여러 생각을 했다. 하지만 내가 지켜본 바로는, 봉희 형님이 나체사진을 가지고 무슨 일을 벌일 사람은 아니었다. 잔업, 특근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였고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보지 못했다. 결혼도 하지 못하고 늙어가는 상황에 젊은 여성을 간직하고 싶은 욕구에 나체사진을 찍는 등의 이상한 짓을 하는 것이 아닐까? 라며 넘겼다. 그리고 내가 봉희 형님에게 이야기한 대로 못 본 척했고 나체사진 사건은 기억 속에 지워져 갔다. 비정규직으로 일하며 여러 달이 지나갔다.


 옛말에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젊은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말이 아니었다. 일을 끝낸 후 집에서 쉬고 있는데 내가 속한 업체의 친목회 회장 형으로부터 스마트폰 메신저가 왔다. 어떤 공고문을 찍은 사진이었는데, 보고 기겁을 했다.


여가부(여성가족부)에서 보낸 공고문이었는데 봉희 형님의 사진이 붙어있었다. 내용은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성범죄를 저지른 범죄인이 주변에 살고 있으니 조심하라는 경고였다. 사건 날짜가 기재되어 있었으며 지나가는 여고생의 몸을 더듬는 성추행을 하다 주변 사람의 저지로 잡혔다는 것이다. 여고생 성추행으로 입건되었고 집행유예를 받았다고 적혀있었다. 성범죄 경력은 없었으므로 초범이었다. 범죄인의 거주지도 적혀있었고 “자녀를 둔 가정은 조심하라”는 경고문구도 있었다.


 나에게 이런 공고문을 보낸 친목회 회장 형은 결혼을 했으며 슬하에 7살 된 딸이 있었다. 어린 자녀가 있는 집이기에 여가부가 이런 공고문을 보내는 것이었다. 회장형의 가정에 우편으로 온 것을 보니 봉희 형님이 거주하고 있는 동네 안, 미성년자 자녀를 둔 가정에는 다 보내어졌을 것이다.


스마트폰 메신저로 회장 형이 물었다.


- 이거 어떡해야 하지?

- 형이 보내준 사진 보니깐 집행유예네요. 감옥에는 안 가도 본인이 창피해서 일을 그만둘 거예요. 좀 기다려보죠. 본인이 벌인 일이니 본인이 알아서 책임지겠죠.


나이가 들수록 고개를 숙이고 몸과 마음가짐을 더 단정히 해야 할 것인데, 봉희 형님은 나이가 들어도 ‘본인은 나이만 먹을 뿐 아직 청춘’이라고 착각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과거에 젊은 여성과 결혼하지 못한 것에 대한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이 상식 밖의 행동을 했다. 그리고 그럴수록 젊은 여성에게 더 집착하는 것 같았다. 저번 회식 때도 서빙하는 젊은 아가씨에게 농담을 하며 손을 잡았고 놀란 아가씨의 반응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비난의 시선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봉희 형님은 “장난”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것이 결국 이런 사태까지 발전한 것이다.


 다음날 회사에 출근하니 발 없는 소문이 쫙 퍼졌다. 특히 스마트폰의 위력으로여가부로부터 온 공고문이 사진으로 찍혀, 나돌아 다녔다. 현장에 일하던 사람들은 봉희 형님이 창피해서 회사에 못 나올 것이라고 했다. 또한 이 부끄러워 다니던 회사도 그만두고 시골이나 먼 외곽지역으로 이사 갈 것이라 예상 했다.


 봉희 형님도 소문을 들었는지 출근하지 않았다. 봉희 형님이 회사에 출근하지 않던 날, 그다음 날에 회사가 발칵 뒤집혔다. 봉희 형님 본인이 거주하는 곳에서 천장에 줄을 매달아 목을 매고 자살해 죽었다는 것이다. 어제 봉희 형님이 출근하지 않았고 주변의 지인들은 걱정을 했다. 봉희 형님과 친하게 지낸 직장동료들이 계속 연락을 했고 연락이 닿질 않자, 불안한 마음에 봉희 형님의 집에 방문한 것이다. 문은 잠겨있어 강제로 문을 따서 들어가니 그런 광경이 벌어진 것이다.


 발견된 유서는 없었고 주위에 빈 소주병만 뒹굴러 져 있었다. 그동안 같이 일하며 동료애가 남아 있는지, 회사 내 사람들 대부분이 장례식에 들러 조문했다. 봉희 형님의 “형”이라는 사람이 상주를 맡아하고 있었는데, 상주를 맡은 어르신은 가정을 이룬 듯했다. 성인이 된 아들과 딸이 보였기 때문이다. 절을 하고 회사 동료들과 앉아 밥을 먹고 있는데 많은 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


 봉희 형님의 형은 “배 다른 형제”라고 했다. 그리고 어릴 적 봉희 형님 가정에 불화가 많았다고 한다. 추측컨대 그 가정의 불화가 봉희 형님 비극의 씨앗이 된 것 같았다. 봉희 형님이 여고생을 성추행하고 경찰에 잡혔을 때, 여고생의 부모는 봉희 형님을 상대로 위자료 1억을 요구했다. 봉희 형님은 여고생 부모에게 사과를 하면서도 위자료에 대해서는 항의를 했다. 여고생에게 정신적 충격을 준 것은 맞지만 본인에게 1억이란 돈은 너무 큰돈이며 ‘너무 과하다.’고 강하게 피력했다. 하지만 여고생 부모는 1억이 아니면 합의해주지 않겠다고 버티었다. 판사인지 경찰인지 모르겠지만 법을 집행하는 곳에서는 합의를 얻어내지 못하면 봉희 형님의 사진이 기재되고 사건의 개요와 경고문이 언급된 공고문이 거주지 내, 청소년들이 살고 있는 각각의 가정으로 전달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봉희 형님은 돈이 없었다. 술을 너무 과하게 마셔 벌어진 첫 실수라며 설명했지만 헛수고였다.


 장례식장에서 말이 없는 몇 명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은 ‘잘 죽었다.’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다른 쪽에서는 공고문을 만들어 각 가정에 보낸 것은 초범인 봉희 형님에게 너무 ‘과하다.’ 혹은 ‘여가부(여성가족부)가 사람을 죽였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차라리 죽지 말고 먼 지역으로 이사 가서 살면 괜찮을 텐데.’라며 꺼진 목숨을 아쉬워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는 나라를 위해 목숨도 기꺼이 바칠 각오가 되어있는 애국자였는데, 그릇된 성의식으로 비극적 결말을 맞이했다. 나도 한 사람의 삶이 비극으로 끝난 것에 대하여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느꼈다. 내가 경험해본 바로는 아주 나쁜 사람은 아니었는데 말이다. 장례식장에서 가족과 가정의 화목이 개인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며 그것이 삶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다.


내가 봉희 형님의 잘못을 옹호할 생각은 전혀 없다. 봉희 형님은 일면식도 없는 여고생에게 엄청난 수치심과 모멸감을 안겨주었다. 어떤 변명을 해도 소용없다. 아주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이다. 그러니 끝까지 살아서 죄책감을 안은 채, 자신의 그릇된 잘못을 반성하고 살아야 했다. 내가 정말로 안타까운 것은 그의 자살이다. 스마트 폰의 위력으로 사진이 촬영되고 캡처되어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것은 일도 아니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한순간 돌변하여, 증오와 두려움이 담긴 눈동자로 쳐다보고 더러운 범죄자로 취급한다면 그 환경을 버티어내지 못할 것이다. 이런 일련의 환경들이 봉희 형님을 자살이라는 코너로 몰아넣었다. 초범임에도 주변에서는 봉희 형님을 가만두지 않았고, 용서받고 다시 갱생할 수 있는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되돌아보면 그는 자살을 당했다.  주변의 차가운 눈초리와 멸시를 상상했을 것이고 심리적으로 몹시 힘들었을 것이다. 소문에 의하면, 봉희 형님이 극단적 선택을 하기 하루 전날에 지인으로부터 “너에 관한 공고문이 스마트폰 메신저를 통해 떠돌아다닌다.”라는 말을 전해 들었다고 한다.


 머릿속에서 봉희 형님이 자살을 당하기 바로 직전의 모습이 그려졌다. 봉희 형님의 방안, 육체와 정신이 서로 다투고 있다. 육체는 살기를 간곡히 부탁했고 정신은 인생을 체념했다.


- 우리 살자. 죽으면 개죽음이다. 다른 방도가 있을 거야. 우리가 지른 일을 아무도 모르는, 먼 곳으로 가서 다시 시작하자.

- 다시 시작하기엔 너무 늦었다. 나이도 많고 모아놓은 돈도 없다.

- 살고 싶다. 아직 건강하잖아.

-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 여러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쳤다. 창피해서 얼굴을 들 수가 없다. 새롭게 시작하는 것, 엄두가 나질 않는다. 그냥 단념하자. 이 방법이 제일 깨끗하다. 우리만 없어지면 된다.


정신은 말을 듣지 않는 육체에게 강제로 술을 먹였다. 그리고는 방 천장에 줄을 매달도록 시켰다. 육체는 술기운에 정신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실천했다.


 봉희 형님이 나에게 젊은 여성의 나체사진을 보여준 것은 사건이 일어나기 6개월 전이었다. 장례식장을 나와,  봉희 형님이 여성 나체 사진을 보여주던 회식 때를 떠올렸다. 나는 과거로 돌아간다면 봉희 형님의 삶이 비극으로 끝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을까? 그리고 막을 수 있었다면 그 방법은 무엇일까? 소용없는 생각을 오랫동안 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20대, 엉덩이의 비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