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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뜨라이야기 Mar 04. 2022

정년 퇴직자의 편지 2(완결)

D-58

 오늘은 이 영감이 아무 말이 없다. 평소처럼 “퇴직이 얼마 남았네”하며 계산도 하지 않고 히죽거리며 웃지도 않으셨다.


 점심시간에 이 영감을 만났다. 나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어보았다.

- 무슨 일 있으세요? 표정이 어두우시네요.

- 어젯밤에 개꿈을 꾸어서 기분이 상했단다. 근데 그 개꿈이 어찌나 현실 같던지.......


그 개꿈의 내용은 이랬다. 이 영감이 출근을 하기 위해 통근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통근버스가 그냥 지나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힘들게 손 흔들고 고함쳐서 통근버스를 세우고 이제 타려고 하는데 통근 기사가 "타지 않아도 되다."며 승차를 거부하는 것이다. 어이가 없어서 "왜 그러냐?"라고 호통을 쳤다. 그러자 통근버스 기사는 투명스럽게 대답했다.

- 회사의 정책이 바뀌어서 돈은 12월 말까지 쳐주니 오늘부터 그냥 출근하지 마세요. 회사의 방침이에요.

그 말을 들은 이 영감은 "아직 일해야 한다."며 버스를 타기 위해 실랑이를 벌이다가 통근버스기사가 미는 바람에 버스 계단에서 떨어지면서 꿈이 깨었다는 내용이다.


 난 이 영감의 꿈 이야기를 듣고 한참 생각했다. 이 영감처럼 퇴직 날짜를 기다리는 사람에게 좋은 꿈이 아닌가? 퇴직 날짜가 앞당겨졌으니 말이다. 근데 이 영감은 왜 우울한 표정을 짓고 말도 없는 것일까?


 꿈은 현실의 스트레스를 반영한다고 tv에서 보았는데....... 도대체 이 영감의 속마음을 알 수가 없다.



D-41

 오늘은 반에서 회식하는 날이다. 반에서는 정년퇴직하는 이 영감의 노고에 대한 감사와 존경을 담아 꽃과 자그마한 선물을 준비했다.


 작업이 끝나고 회사 근처의 삼겹살집에서 조촐하게 반 회식이 진행되었다. 어찌하다 보니 나는 이 영감의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리고 회식 중에 꽃다발과 선물 증정식이 있었고 선물을 받은 이 영감은 얼큰하게 취하게 되었다.


 술 먹고 취한 건 좋은데 말소리도 높고 계속 옛날이야기를 한다. 말끝마다 87년도에 내가’라는 말이었다.

 - 87년도에 무슨 일이 있은 줄 아냐? 87년도에 내가 회사에서 만든 완성품 밑에 숨어 있다가 전경한테 차이고 말이야. 이렇게 일하기 좋은 환경이 누구 때문인 줄 아냐?


거듭 강조하며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그때가 그립단다. 그때는 서로 하나인 것처럼 친하게 지냈고 재미있었단다.


 이야기를 듣는 도중에 황당했다. 87년이면 88 서울 올림픽이 개최되기 일 년 전이다. 그럼 당연히 평화의 상징이며 서로의 화합을 기리는 올림픽 개최 전년도에 무슨 말도 되지 않게 전경한테 쫓기고 숨어 다니면서 힘들었단 말인가?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왜 하는 것일까? 과거보다는 앞으로의 발전을 위해 미래와 현재에 대해 생각하고 의논해야지 괜스레 과거 이야기만 하는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 이 영감, 사람은 참 좋은데 약간 한심한 것 같다.



D-38

 오늘은 주말이다. 주말이라 늦잠도 자고 tv도 보고 있는데 이 영감이 말한 87년이 계속 머리를 맴돈다. 그래서 스마트폰으로 87년도를 검색해보니 6월 항쟁이 가장 먼저 검색된다.


 6월 항쟁은 12.12 쿠데타로 권력을 차지한 전두환이 주민들이 원하는 직선제를 거부하고 권력연장을 위해 간선제를 유지하려 했고 그  때문에 우리나라는 반독재투쟁으로 뜨거웠던 그때를 이야기한다. 시간도 많고 급호기심이 생겨 우리 동네에 위치한 시립도서관을 찾아가 책을 뒤져보았다.


 책에서는 오랜 군사독재와 전두환 정권의 호헌 정치, 박종철의 죽음에 이어 이한열의 부상과 죽음으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결국 군사독재정권은 6.29 선언을 발표하며 국민에게 무릎을 꿇었다고 나와 있다. 근데 이것이 이 영감이 말한 일하기 좋은 환경과 무슨 관계일까? 다시 고개 숙여 책을 보니 마지막 부분에 노동자 이야기가 나온다.


 87년도 전까지만 해도 노동현장은 두발이나 복장의 자율이 없으며 완전 쌍팔년도 군대식으로 노동자들이 규율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6월 항쟁이 일어나면서 7월에서 9월까지 전국에서 노동자들이 공장에서 파업을 하고 하나하나 노동조합을 만들어 갔으며, 노동자 대투쟁은 향후 노동자의 사회적 위상을 급격하게 드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책에서 말해주고 있다.


 역사책을 보면서 이 영감이 왜 87년을 되뇌며 이야기한 것을 이젠 이해할 수 있다. 어려운 시절 힘든 시기를 견디어 내며 힘든 싸움을 통해 지금의 노동자 신분을 향상 시킨 이 영감과 같은 노동자들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더 이 영감을 생각하게 되었다. 또한 이 영감을 한심하게 바라본 내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과거는 현재와 미래의 밑바탕이며 버팀목이라는 것을 난 왜 몰랐을까?


D-6

 며칠 있으면 이 영감은 현장을 떠난다. 그동안 정이 많이 쌓였고 비호감에서 호감으로 바뀌어서 그런지 보내기가 싫어진다.


 오늘은 공장에서 정년퇴직자들의 노고에 감사하며 건강하게 퇴직하는 것을 축하하는 의미로, 마칠 시간쯤에 다과를 준비했다. 꽃다발 증정식이 끝나고 정년퇴직자들의 퇴직에 대한 소감이 있었는데 모든 퇴직예정자들이 ‘회사가 승승장구하길 바라며 현장에서 일하시는 분들은 어찌하든 다치지 말고 일 잘하시라’고 덕담해 주었다. 그중엔 물론 이 영감도 있다.


 다 같이 다과를 즐기고 있는 가운데 난 이 영감이 곁으로 가 그동안 수고하셨다는 인사말과 함께 그이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정년퇴직자 행사가 끝나갈 무렵, 이 영감이 약속이 있다며 자리를 뜨려고 했다. 그래서 내가 무슨 약속이냐고 물어보니 저녁에 친한 후배들과 마지막으로 노래방에 간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장난기 많아 보이는 형님이 농담을 던졌다.


- 형님, 연식이 오래되어 가운데 다리도 시원치 않은데 재미나게 놀 수 있겠습니꺼?


그러자 이 영감이 큰소리도 대답했다.


- 정신 나간 놈아, 넌 노래방에서 노래를 가운데 다리로 부르냐?


우문현답하자, 그 일대는 웃음의 도가니가 되었다.


 아쉽게 이 영감의 87년 이야기를 다 들어보진 못했지만 책이나 여러 영상매체를 통해 그 긴박했던 상황과 그것을 이겨내고 이룬 쾌거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평소보다 더 지루하게 느껴지는 평일날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데 이 영감이 보이질 않는다. 또 노래방 가셨나? 아, 맞다 정년퇴직하셨구나!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 변화가 없는 것 같다. 보통처럼 잔업하고 지인이 상을 당하거나 병원에 입원하면 달려갔다. 좋은 일이 있으면 축하하고 평소와 다를 바 없는데, 나만 공허하며 상실감을 느끼는 것 같다. 이 영감 때문인 것 같다.


 이 영감 생각을 떨쳐내고 일하다 보니 어느새 잔업. 마무리 시간이다. 이제 이 영감의 관찰이 끝났으므로 심리상태나 속마음을 좋은 쪽으로 정리하려고 했는데, 계속 ‘이제 회사 수주는 나와 상관없다. 회사가 부도나든지 말든지’라는 무책임함이 섞인 말이 떠올라서 제대로 정리할 수가 없다.


 같이 지내보니 애사심도 느껴졌고 일에 대한 책임감도 대단한 사람인 것은 확실하다. 그러다 문득 이 영감이 내게 준 개인 공구함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 반 샵은 2층에 있었다. 그리고 반샵에는 나의 개인 캐비닛이 있고 치약, 칫솔이 있다. 그래서 밥을 먹고 양치질하기 위해서는 항상 2층을 오르락, 내리락해야만 했다. 그것을 보았는지 이 영감이 철제로 만들어진, 녹색 페인트로 정성스럽게 칠한 개인 공구함을 나에게 주었다. 본인은 이제 필요 없으니 "안에 있는 물건들을 정리하고 이름표를 붙여서 사용해라."며 주고 가셨다.


 시간이 좀 남아서 이 영감의 개인 공구함을 정리하고 있는데 구석에 보자기로 뭔가를 정성스럽게 포장한 것이 보인다. 정년퇴직하면 회사에서 무슨 순금을 준다는 것을, 지나가다 얼핏 들은 것 같은데....... 긴장감을 가지고 열어보니 아니다. 엉뚱한 상상을 한  내가 부끄럽다. 찬찬히 보자기를 풀어보니 무수한 감사패와 상장, 기념패들이었다.


아....... 이젠 모든 것이 이해되면서 이 영감이 했던 실망적인 모습들이 반어적 표현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우선 애사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이런 상장들을 간직하고 있을 리도 없고 당연히 쓰레기통에 들어갔을 것이다. 그리고 무슨 보물 모시듯이 보자기에 포장 할리도 없다. 힘들 때마다 이런 감사패나 상장들을 보며 힘을 내는 이 영감의 모습이 안 봐도 비디오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 영감이 상장들을 두고 간 이유는 내가 본인에 말에 관심 가지고 호기심이 발동하는 것이 보이기에 두고 간 것이다.


 이런 상패들은 마치 ‘이 영감이 회사를 얼마나 사랑하며 내가 느꼈던 실망적인 모습들은 확실한 반어적 표현이다’라는 것을 나에게 말해주고 있다.


 근데 이영 감은 왜 굳이 철없는 어린애처럼 실망적인 모습을 나에게 보여주었을까? 그러고 보니 내가 이 글 첫 부분에 정년퇴직하는 이 영감의 마음을 직접적으로 물어보려다 이 영감의 다투는 모습과 한 성깔 한다는 소문에 포기했다고 했는데, 그때 이 영감이 다투던 이유가 생각났다.


 두명의 작업자가 조를  이루어 어떤 작업을 할 때였다. 이 영감이 이렇게 하자면서 좋은 쪽으로 의견을 내놓았는데자기 색깔 강한 후배 형님이 화를 내며 말했다.


- 며칠 안 남은 형님이 무슨 상관이요? 쥐 죽은 듯이 조용히 계시다가 몸 건강히 퇴직 하이소!


그 말에 이 영감이 발끈하면서 다툼이 일어났다. 물론 나의 추측이지만 색깔 강한 후배들의 무관심과 현장을 떠나야 한다는 아쉬움과 두려움이 이 영감을 어린애와 같은 행동을 하게 만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난 결과가 있기 전에 원인이 있다는 것을 왜 이제 생각해낸 것일까? 또한 소문과 한 사람의 단면적인 행동만 보고 훌륭한 사람을 이상한 사람으로 만든 것이 부끄럽기까지 하다.


 이제 이 영감과 같은 정년퇴직자들의 심리상태나 속마음을 올바르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퇴직 후 지나가다 회사 통근버스라도 눈에 띄는 날에는 심장이 꿍꽝거리면서 통근버스를 잡아타고 당장이라고 현장에 들어가 제 실력을 발휘하고 싶으나, 완벽하지 못한 인간이 만들어놓은 "정년"이라는 제도에 막혀 그러지 못해 답답하다. 하지만 남은 후배들이 잘해줄 것이라 믿고 미래에 대한 설렘으로 또 다른 사회에 첫발을 내밀 것이다. 또한 대기업 T 정년퇴직이란 수식어에 자부심을 느끼고 tv에서라도 회사가 소개되면 정말 좋은 회사라고 손가락을 추켜올릴 것이다. 이 영감은 항상 회사가 도약하길 바라며 약주 드실 때마다 현장의 향수를 떠올릴 것이다.



 글을 쓰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특히나 선배님이 주고 가신 개인 공구함에서 완성품 기념 메달을 보자 머릿속에서 글의 구도가 절로 떠올랐다.


 이 글을 쓰면서 개인적으로 많이 깨우치고 현장을 다시 한번 관찰하게 되었으며 노동자 대투쟁을 조사하면서 선배님들이 현장의 역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언컨대, 현장에 이런 멋진 노동자들이 많다는 것은 현장의 축복이다.


 그리고 어느 선배님이 나에게 글을 부탁한 것은 사실이며 나머지 부분들은 재미와 확실한 주제를 위해 상상하고 과장한 것이라는 것을 밝혀두고 싶다. 선배님이 나에게 글을 부탁한 것은 현장에 남은 사람들에게 편지처럼 메시지를 전해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제목은 ‘정년퇴직자의 편지’라고 정했다.

 마지막으로, 올해도 우리 공장에서 멋진 분이 정년으로 퇴직하신다. 선배님들께 그동안 수고하셨다는 말을 이 글로써 전해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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