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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원사 Jul 23. 2021

내 몸 뉘일 곳 하나 없네

부동산과 통장

바야흐로 자가격리의 시대다. 처음 사람들이 달고나 커피를 만든답시고 스스로의 팔을 고문하는 유행이 돌 땐 세상이 거대한 몰래카메라 같았다. 이경규 아저씨는 어디에 숨어있을까? 이거 트루먼쇼인가? 굿모닝, 굿애프터눈, 굿이브닝, 앤 굿나잇. 아니, 좀 갑갑하긴 해도 집에만 있는게 왜 미쳐 돌아갈만한 일이지? 오히려 재택근무라면 땡큐 아닌가? 태생이 집순이인데다 똑부러지긴커녕 머릿속에 작은 꽃밭 하나 가꿔둔 나였기에 물음표만 적립했으나 오만한 착각이었다. 세상은 그리 순탄하게 흘러가지 않는데...



집순이 개종 시대 ~고해합니다 저는 바깥이 좋습니다~




현재 나의 생활을 요약하자면 매일 원고를 그리거나 글을 쓰고 있다. 그러면서 경험으로 깨달은 것이다. 야... 이거 가족이랑 24시간 같이 붙어있는게 생각보다 할 짓이 못되는구나. 마음의 평화가 오지 않는구나. 누군가 불편함의 이유를 묻는다면 명쾌히 증거를 제시하긴 어렵다. 삶은 역전재판이 아니라 그렇다. 그냥 어느날 일어나서 양치를 하다말고 아, 난 이게 싫었던 거군. 알게 되었다. 혈육이라 해도 붙어있는 것만으로 증오하게 될 수도 있겠구나 싶어졌다. 사람을 미워하긴 싫다. 내가 선량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피곤하기 싫어서, 기가 빨려서 싫다. 아침에 눈을 뜨면 씻고 가방을 챙겨든 다음에 꾸역꾸역 밖으로 나왔다. 올해 가장 잘한 소비는 갤럭시탭을 마련한 것이다. 블루투스 키보드와 갤탭만 있으면 어디서든 일할 수 있어... 우와... 바깥에서 콘티를 짜고 선화를 땄다. 물론 카페라고 조용한 것은 아니다. 오늘 일만 해도 그렇다! 오늘따라 카페가 너무 시끄러워 디카페인 라떼를 쪽쪽 빨아먹고 1시간만에 도망쳐 나왔다. 집에 들어가긴 싫고 근처를 서성거리다 걸어서 갈만한 거리의 도서관으로 들어갔다. 5년 전에 왔었던 곳이다. 회원증 재발급 되나요? 직원 분에게 물어보고 신분증 조회를 했는데 전산 시스템이 바뀌어 기록이 몽땅 소멸되었으니 새로 가입해야 된단다. 그때 내 몰골로 말하자면 덥고, 계획했던 일을 못해서 짜증이 나있었고, 저녁 찬거리를 간단하게 장본지라 뜬금없이 콩물 페트병을 들고 있었다. 내일 콩국수 해먹으려고 샀어요. 맛있겠죠? 아무튼간에. 더위에 씩씩대며 콩물을 든 의문의 아가씨에게도 친절히 회원가입을 도와주신 직원분, 감사드립니다. 열람실에는 이미 사람들이 군데군데 앉아있었다. 연령대도 다양했다. 책을 읽는 분도 있었지만 다들 각자의 문제집과 공부거리를 들고 와있었다. 체육복을 입은 학생들도 있었다. 그러고보니 오늘따라 카페가 유독 시끄러웠던 이유도 학생들의 시험기간이라 그랬던듯 싶다. 이분들도 집중할 공간이 필요해서 왔겠구나. 참다 참다 안되겠어서 왔겠구나. 남들이 말하길 어딜 가도 결국 집만한 곳이 없다지만, 바로 그 집이 없어서 왔겠구나. 뭐 그런 생각을 하며 앉았다. 사회적 거리두기와 충실하게 쓰여진 마스크, 도서관이란 삼박자로 조용했다. 좋았다. 공공장소가 집보다 훨씬 좋았다. 조금 슬퍼졌다.




사람에겐 공간이 필요하다. 먹고 자고 싸는데만 해도 주방, 식당, 침대, 화장실이 필요하다. 물론 이것만 달랑 던져준다고 바람직한 인간 사육 환경은 아니겠지. 까마득하게 어릴 때 고슴도치를 키워보았다. 학생이라 돈이 없었음에도 있는 돈 없는 돈 탈탈 털어 그 당시에 가장 좋다고 알려진 사육 환경으로 가꾸어주고 정을 많이 붙였다. 녀석은 8년을 장수하다 도치별로 이사갔다. 최근에 다시 알아보니 햄스터나 고슴도치의 권장 사육환경이 내가 알던 것과 제법 바뀌어있었다. 평수도 훨씬 넓어졌고 유행하는 바닥 소재도 바뀌어있었다. 갑자기 덜컥 자신이 없어졌다. 부모님은 부모님의 방법으로 나를 사랑하신다. 나도 내 고슴도치를 사랑했다. 그런데 나 혼자만 들떴던 거라면 어쩌나 싶어서. 




사실 나는 재작년까지만 해도 방이랄게 없었다. 대부분을 거실에서 지냈으며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곳은 다른 용도의 방으로 잠만 자곤 했으나 현재는 어찌저찌 내가 지내게 되었다. 그 전엔 문을 열면 퀸사이즈 침대와 장롱, 가족들의 옷과 잡동사니 짐만으로 방이 발 디딜 곳 없이 꽉 차있는데도 굳이 밥을 방까지 들고와 누워서 먹었다. 생각해보니 혼자 있는 공간이 절실했던 것 같다. 내 기억에 따르면 인테리어란 분야 자체엔 초등학생~중학생 때부터 흥미를 두었다. 예쁜 집이 보이면 스크랩도 하고 한때 그쪽으로 장래희망도 꿈꿨을 정도로 관심이 있었으니, 고개를 들면 현실과 환상의 괴리가 컸다. 유튜브만 틀면 예쁜 집이 쏟아져나왔다. 저 커튼 소재가 뭐지? 저 러그 예쁘다. 확실히 동선은 이렇게가 좋네. 독립을 하면 나도 저렇게 꾸며야지. 예쁜 침대와 원목 책상을 놓고, 카펫을 놓고... 그런 상상을 몇 년간 했는데 위장도 안 좋은 애가 늘 누워서 노트북으로 그림을 그리거나 밥을 먹자니 얹히기 일쑤였다. (제 ~2019년도 까지의 만화나 그림들은 놀랍게도 다 누워서 그렸습니다. 허리가 작살나는 소리가 들리는군요.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반성합니다...)  통장을 열어보니 100만원 정도 있었다. 이 정도면 침대는 내 돈으로 바꿀 수 있지 않나? 내가 앞으로 독립하기까지 몇 년이 걸릴지 모르는데, 계속 이렇게 누워서 지내? 내가 와식 동물이냐? 홧김에 퀸사이즈 침대를 버리겠다고 선언했다. 큰 공사였다. 우선 청소만 2주를 했는데 내 키만한 쓰레기 봉투가 네다섯개 정도 나왔다. 거미를 종종 잡긴 했는데 거미의 근거지를 발견했다... 침대를 분해해 내다버리니 방이 갑자기 커졌다. 내가 고른 침대 프레임과 매트리스, 침구가 왔다. 원목 책상과 의자도 왔다. (혹시 저처럼 컴퓨터 작업시간이 긴데 로망이 있으시다면 원목 의자는 사지 마세요. 전설의 8만원 로열 슬라임 방석으로 커버쳐보려 했으나 허리와 엉덩이의 시위로 포기하고 바꿨습니다.) 나만 좋아하는 패턴의 카펫도 왔다. 통장이 홀쭉해졌다. 방에 누워 내가 고른 이불을 덮고 내가 고른 스탠드를 켠채 누워있는데 갑자기 눈물이 찔끔 나왔다. 여긴 내 벙커. 내 취향이 있는 공간. 지금은 빌렸고 아마 n년 후에 독립을 하면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나겠지만, 지금은 아무도 못 뺏는 내 벙커.




여성이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돈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 / 버지니아 울프




유명한 구절에는 이유가 있다. 우리 모두는 돈과 방이 필요하다.

이제 고개를 들어 서울의 집값과 청년정책을 보자. 결혼할 생각이 없고 중소기업에 근무하지 않으며 프리랜서인 1인 가구 비혼 청년. 1라운드 탈락, 1라운드 탈락. 이거 완전 광탈감이죠. 

어쨌거나 두고봐라 이놈들아 네가 이기나 내가 해내지 심보의 n년 프로젝트로 독립자금을 모으고 있다. 이 이야기는 또 길어지니 나중에 풀어나가겠습니다 투 비 컨티뉴드.




추신: 각자의 공간을 잘 쟁취하고 계시길 바랍니다. 공간이 어지러워 엄두가 안 난다면 청소를 해보시는게 어떤지요. 오직 나만 쓸 바디워시나 샴푸를 식구들 몰래 사놓는 것도 괜찮습니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 물건으로 둘러싸여있는게 생각보다 큰 스트레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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