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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원사 Sep 03. 2021

유배일기



가족 중 확진자가 나왔다. 나는 밀첩 접촉자로 분류되어 2주간 자가격리를 하게 되었다.

국가가 배정해준 내 유배지는 배산임수의 섬은 아니고 4평 남짓의 방이 되시겠다.

소위 애교없는 딸이었으나 시설에 간 부모님과 매일 전화를 하고 안부를 주고 받는다.

먹고 싶은 것을 적게 요리해 먹고, 깨끗이 치워놓고, 다시 방으로 들어온다.

불행하다면 불행한 상황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처음으로 기묘한 안정감을 느끼고 있다.



무력감에 사로잡히거나 모든 대화가 피상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하면 속세와 연을 끊고 어딘가로 훌쩍 가버리고 싶단 상상을 하곤 했다. 한 달 정도 다른 곳에서 나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 적당히 스쳐 지나가며 살면 어떨까. 얼굴에 힘을 빼고 하루종일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아도 되는 공간에서 지내고 싶다. 그런 생각들을 했는데 지금이 바로 그 상상의 체험판이다. 이런 사태를 원한 건 아니었는데, 과정이 어떻든 모로 가도 이뤄진다는 고대 그리스 신화의 잔인한 신탁처럼 이뤄졌다. 애들 앞에서 찬물도 함부로 못 마신다더니 신 앞에서 함부로 소망을 갖는 것도 안되겠다. 



왜 내가 나로 존재하는 것이 누군가에겐 상처가 되는 걸까?



타인의 마음을 얻으려면 부지런히 노력해야 된다는 것쯤은 살면서 자연스럽게 배운다.

그런데 가족 또한 혈연이란 이름으로 엮여있을 뿐,

결국 대화와 행동이 부재하면 멀어질 수 있는 타인이라는 사실을 사람들도 나도 자주 잊곤 한다. 



10대 시절엔 내게 생기는 모든 감정이 세상의 전부라는 듯 휘둘리기만 했다.

내가 왜 이렇게 혼자 예민한지, 왜 이렇게나 화가 많이 나는지 내게 묻는 그들만큼 나도 알고 싶었다.

세상에서 내가 가장 중요했다. 살려고 그랬다. 지금은 미숙했단 걸 안다. 그러나 다시 돌아가도 그랬을 것이다. 그때 그래봤기에 알게 된 것이다. 나를 견뎌준 사람들에게 감사한다. 내가 견뎠던 사람들에게도 별다른 생각이 들진 않는다. 해가 넘어갈수록 내게 상처를 주었던 이들 중 대부분은 악의가 없단 사실을 알게 된다. 악의는 커녕 아무런 의도도 없었다. 악당은 없었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대부분의 복수극은 허무로 끝난다. 증오하기 싫다. 성품이 착해서가 아니라 누군가를 증오하는 일은 체력이 든다. 기운이 쏙 빠진다. 좋아하는 일만 하며 살기에도 인생은 짧고 체력은 부족하다. 대부분은 오해와 불통이었다. 영원한 친구는 없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서로가 미숙했으리라 믿는다. 날 견뎌주던 사람들이 날 미워하기로 마음 먹었거나 용서하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지만. 미안합니다. 그래도 나는 자주적으로 살고 싶습니다. 날 미워하는 사람도 내가 미워했던 사람도 많이 웃고 살았으면 좋겠다. 찡그리고 살면 얼굴도 당기고 피곤하니까.



어떤 것들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어렴풋이 해답을 알게 된다.

나는 아마도 언젠가 나를 사랑할 의무가 있는 사람들과 떨어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안부 전화를 주고 받을 것이다. 보고 싶다는 말을 언제 한번 밥이나 먹잔 말처럼 가볍게 주고받을 것이다. 특별히 안 좋은 사건이나 특별히 좋은 사건이 일어나진 않을 것이다. 타인이 되어갈 것이다. 일정을 맞춰 함께 여행을 갈 지도 모르고 장례에 대한 이야기를 미리 나눌지도 모른다.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는 이제 완전히 타인이 되었단 사실을 언행에서 느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엄마를 사랑한다.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누군가에겐 못된 사람이 되어간다.

엄마에게 드리려고 사놨던 영양제는 해외배송이라 한발짝 늦게 내 유배지에 도착했다.

돌아오시면 전해드리고 미숫가루에 꿀이나 타서 노나먹을까 한다.

대화를 나누다 보면 반가움은 잦아들고 나는 금세 또 벽을 느낄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이제서야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 지 비로소 조금은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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