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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삼삼팔 Nov 08. 2021

아날로그, 낭만, 성공적


아날로그여서 좋은 것들이 있다. 톡톡 치면 금방 끝나버리는 터치가 아니라 손에 힘을 주고 시간을 들여서 했기 때문에 좋은 것들이 있다.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혼인신고서 작성이 그랬다. 결혼한 지 벌써 1년이 됐다. 시간은 정말 금방 갔다. 이렇게 금방은 아기 생각이 없었지만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 아기 사진을 프로필로 올려두니 아기 욕심도 생겼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욕심부리면 될 것도 안 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아직까지는 아기도 없고, 그저 둘이 심심한 듯 재미지게 지내고 있다. 몇 번 다투기도 했지만 항상 져주는 남편 덕에, 짜증을 낸 것에 미안해하며 잘 풀 수 있었고 또 그대로 바쁘게 지내면서 살다 보니 1년이라는 시간이 갔다.


결혼하기 전 나는 혼인신고는 이벤트처럼 하고 싶다고 말다. 못내 맘에 들지 않는 눈치였지만 그래, 그렇게 하자고 남편은 날 존중해줬다. 그렇게 잡은 이벤트가 1년이 되는 결혼기념일이었다. 우리는 법적인 부부가 되기 위해서 소중한 연차를 썼다. 동사무소가 아니라 구청, 구청에 가야 했다. 동사무소는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는데 구청은 어디 있지 찾으니 다행 구청도 멀지 않았다. 좋았다.


혼인신고서를 작성할 때는 증인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증인이라는 말이 거창하게 느껴졌지만, 가장 가까이에 있는 엄마 아빠를 증인으로 세우면 되겠다 싶었다. 구청에 직접 가서 혼인신고서를 가져오자니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었는데 다행히 혼인신고서는 프린트를 할 수 있었다. 어휴 이거 뽑을 수 있는 거면 인터넷으로 작성해서 내면 쉬울 것을 프린트해서 펜으로 직접 써서 내야 된다고? 등록기준지는 또 뭐야? 본적도 써야 해? 처음엔 솔직히 이렇게까지 자세히 쓸 일인가 싶었다. 그리고 더 솔직히 말하면 나와 남편의 가족관계 증명서 한 부씩만 내도 담당 직원이 다 알 수 있을만한 것들이어서 더 그랬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등록기준지와 본적은 안 써가도 직원이 검색해준다고 한다.. 아무튼 그때는 그럼에도 정해진 룰이 있는 거니까, 다 찾아서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 우리에겐 크게 중요한 것 같지 않은 부모님들의 등록기준지 작성이 필수 칸으로 되어 있는 게 비효율적인 것 같았지만, 그래 이렇게 엄마아빠, 어머님아버님의 등록기준지를 알게 되다니 그 나름대로 재미있었다.


그렇게 둘이 머리를 맞대고 쓴 혼인신고서를 다짜고짜 엄마 아빠에게 들이밀며 증인 서명을 받아냄으로써 우리의 혼인신고서는 진짜 완성되었다. 직접 펜으로 한 자 한 자 쓴 신고서를 구청에 내고, 확인서 같은 걸 받았다. 완벽한 아날로그였다. 그런데, 그래서 낭만적이었다. 쉽고 빠르게 키보드로 적고, 한자는 복사해서 붙여 넣기 하고, 등록기준지도 복사해서 붙여 넣고, 증인의 서명은 전자 사인으로 처리한 후, 접수하기 버튼을 클릭해서 신고서를 냈다면 이런 감정은 느끼기 어려웠을 거다.


결혼을 하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준비해야 할 것도 많고 해야 할 것도 많고, 끝난 뒤에도 신경 쓸 것이 많다. 근데 그에 비해 혼인신고는 너무 금방이었다. 법적으로 하나가 되는 건 정말 쉬웠고 금방이었다. 그래서 이렇게나마 아날로그로 처리해서 함부로 쉽게, 너무 가볍게 접수하지 않도록 한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손글씨로 적었지만 한 두 줄이 전부인 엽서, 타자로 친 A4 한 장 분량의 편지. 받아 들었을 때 마음이 찡하니 따뜻해지는 건 엽서일 거다. 타자는 쉽다. 생각나는 대로 쓰고 지우고 또 쓰면 그만이다. 그런데 손글씨는 다르다. 생각나는 대로 썼다간 처음부터 몇 번을 다시 적어야 한다. 그래서 한 문장을 쓸 때도 충분히 생각하고 제대로 야 한다. 엽서에 화이트칠을 하는 건 또 보기 싫으니까. 나를 생각하며 고른 당신의 취향이 담긴 엽서와 나에게 하고 싶어 몇 번을 생각하고 꾹꾹 눌러쓴 글이 결코 가볍지 않게 느껴지는 것, 그렇게 오는 감정이 낭만이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도 옆집 사람 같아진 이 시대에, 오로지 아날로그만이 줄 수 있는 여유와 낭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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