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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루미 Sep 21. 2022

내 인생의 주체는 바로 나 자신이다

당당하게 살아도 괜찮아

“당신이 어떤 삶을 산다 해도 당신 자신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면 결코  인생의 어떤 달콤함도 맛보지 못할 것이다. 사람은 스스로를 이해하지  못할 때 최악이 된다.”

- 이소룡


 인생을 주체적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자신의 인생을 주인공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떠한 삶일까? 나는 이 질문에 내가 재미있게 보았던  영화 <세 얼간이>의 란초가 떠올랐다. <세 얼간이>는 발리우드의 불후의 걸작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이 영화는 인도 최고의 명문 대학 ICE을 다녔던 파르한과 라주가 대학 시절 삶의 진정한 의미를 깨워준 란초라는 친구를 찾아다니는 이야기이다.


 <세 얼간이>는 인도 영화지만 마치 우리나라를 보는 것 같았다. 인도의 사회적 관습은 “인생은 경주다.”, “ 빨리 달리지 않으면 짓밟힐 것이다.”라는 말로 경쟁 위주의 교육을 지향한다. 부모는 하나같이 자신의 자식들을 좋은 대학에 들어가게 하고 좋은 직장에 보내려고 애쓴다. 좋은  대학과 좋은 직장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부모라면 당연히 자신의 자녀가 더 좋은 것들을 보고 누리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정한 틀에 자신의 자식을 구겨 넣는다. 그들은 자신의 자식들이 원하는 관심사와 꿈에 대해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사진작가가 되고 싶지만 부모님이 정해준 삶을 사는 파르한, 가난한 집의 부담감을 짊어지고 사는 힌두교 신자 라주, 그리고 어쩐지 제멋대로인 괴짜형 천재 란초. 란초는 파르한과 라주와는 다르게 사회적 관습이나 경쟁 위주의 교육 자체에 대해 부정하며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는 인물이다.


 파르한은 야생동물 사진사를 꿈꾼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파르한이  태어나기 전부터 자신의 아들이 엔지니어가 되기를 원한다. 파르한은 결국 아버지의 뜻대로 원하는 사진을 멀리하고 좋아하지도 않는 공부를 하게 된다. 꿈의 동경을 버리지 못한 파르한은 자신의 가방에 존경하는 사진작가에게 보낼 편지를 매일 품고 다닌다. 그런 파르한의 소망을 알고 있는 란초는 파르한 몰래 편지를 사진작가에게 발송한다. 사진작가로부터 파르한에게 우호적인 답장이 왔지만 아버지가 반대할까 겁을 먹은 파르한. 그때 란초는 그에게 조언한다.


 가서 말씀드려, 너의 진심을.
한 번만 두려움을 떨쳐봐.
안 그러면 넌  앞으로 남은 평생 말하지 않은 걸 후회할 테니까
용기만 있으면 네 인생 을 바꿀 수 있어.


 라주는 세 친구들 중에서 가장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오래된 지병을 앓고 있으며 그런 상황에서 라주의 누나는 시집을 가야 한다. 성공해서 가정을 일으켜야 한다는 강한 집념에 사로잡혀 있는 라주는 온갖 부적을 소지하고 다니며 모든 손가락에는 반지를 끼고 다닌다.


 집안의 부담감과 자신의 노력을 믿지 못하여 신에게 의존하게 되었다는 라주에게 란초는 말한다.


 겁쟁이라서 그래. 미래가 두려운 거야.
미래가 그리 두려운데 현재를  어떻게 즐기겠어?


 란초는 자신에게 난처한 일이 닥칠 때마다 항상 가슴에 손을 얹고 외친다. ‘알이즈웰’이라고.

알이즈웰은 ‘All is well’로, 영어를 인도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모든 것이 잘된다는 의미를 가진다. 란초의 친구 파르한은  묻는다. 왜 그러한 말을 하느냐고. 그때 란초의 대답이 인상 깊다.


난 깨달았어. 사람의 마음은 쉽게 겁을 먹는다는 걸.
그래서 속여줄 필요가 있어.
큰 문제에 부딪치면 가슴에 손을 얹고 얘기하는 거야.
알이 즈웰, 알이즈웰(All is well)


 이 대사로만 감동을 얻는다면 단순한 낙관론자에 지나지 않는다.

란초의 대답에 파르한은 다시 반문한다. “그러면 문제가 해결돼?” 이 말에  “아니, 하지만 맞서 싸울 용기를 얻지.”라고 말하는 란초의 대답을 통해 나는 인생을 주체적으로 산다는 것은 <세 얼간이>의 란초 같은 삶이구나를 느꼈다. 주인공 란초는 다른 사람들의 말이나 생각, 감정 같은 외적 동기에 의해 사는 삶이 아닌 자신이 원하는 내면의 신호에 집중하여 살아간다. 그는 누군가의 방해와 장애물에 굴복하지 않는 삶을 산다. 그는  불안과 맞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내는 삶을 산다.


 당신은 당신의 삶의 주인공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만약 당신이 누군가가 정해준 대로 사는 삶이라면 그 삶은 마리오네트와같다. 그렇다면 당신을 조종하던 줄이 끊어진다면? 그제서야 당신은 스스로가 뭘 좋아하는지 뭘 잘하는지에 대해 고민에 빠진다.

 하지만 그 질문에 답이 잘 나오지 않는다. 누군가에 의해 살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취향을 모른다. 자신이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내가 나 다운 게 뭔지 모른다. “나답게 사는 게 어떤 건가요?”라는 질문을 강신주 철학자에게 물었다. 그는 답한다.


 “나답게 살려면 용기가 필요해요. 나답게 못 산다는 건 남이 원하는대 로 사는 거죠. 남이 원하는 대로 왜 사냐면 그래야 편하거든. 그러다 죽 을때 안다고요. ‘어? 이거 헛살았다. 평생 나답게 한 번 못 살고 남이 원하는 대로만 살다 가는구나.’라고. 영화로 비유하면 남들이 감독인 거예요. 나는 배우에 불과하고.” 


 많은 사람들이 나답게 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남의 이야기에  이끌려가는 것일까?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 또한, 선택에는 결과가 따라온다. 본인이 내린 선택의 결과는 온전히 본인이 짊어져야 한다.


 하지만 그 선택을 남이 내려주었다면? 나쁜 결과가 나왔을 때 책임을  남에게 덜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남이 나의 선택에 참여하면 잘못된 결과에 후회, 죄책감, 아픔이 덜하다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러한 책임 회피가 반복될수록 좋지 않은 결과에 감정적으로 무뎌진다. 내 선택이 아니니까. 남의 말을 들은 거니까. 스스로를 합리화한다. 나는 당신에게 묻고 싶다. 당신이 원하는 삶이 진정 이러한 삶인가? 윤홍균의 『자존감 수업』에서 저자는 말한다.


 “스스로 결정하는 일이 거의 없거나 큰 의미 없는 결정이라면 자존감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자기 인생에서 자기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으니,  자존의 바탕이 사라지는 셈이다. 이런 사람이 자존감을 끌어올리려면,  스스로 결정하고 그 결정을 존중하는 법을 훈련해야 한다.”


 나는 당신이 당신의 삶의 주인공이 되길 바란다. 주인공이란 사건의  중심이 되는 인물을 말한다. 모든 이야기의 주인공은 수많은 사건을 겪으며 고통받고 울고 웃는다. 명작으로 유명한 작품일수록 주인공은 다사 다난한 사건을 겪는다. 지금 당장 불안하다고, 힘들다고 당신의 삶의 주도권을 타인에게 넘겨주지 말아라. 타인에 의해, 타인으로부터, 타인을 위한 삶을 살아가지 말아라.


 나답게 산다는 것이, 삶의 주인공이 된다는 것이 누군가를 이기거나  누군가를 진두지휘하라는 말이 아니다. 남의 간섭을 받지 않으며 당신 모습 그대로 살아가라는 것이다. 안젤로 파트리는 말한다. “자신의 몸과 마음이 다른 사람 혹은 다른 존재가 되기를 바라는 것보다 비참한 일은  없다.” 당신의 모습이 소심하면 소심한 대로, 내성적이면 내성적인 대로,  부끄러움쟁이면 부끄러움쟁이인 채로 당신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며 그 캐릭터로 당신의 삶을 쟁취하라.


 나는 당신이 좋아하는 것을 원하는 것을 하는 삶을 살기를 바란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주지 않고, 타인의 인생에 간섭하고 방해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당신이 원하는 모든 일을 해도 괜찮다. 기억하라. 자신의 삶에 주 도권이 스스로에게 없다면 그런 삶을 사는 것보다 더한 불행한 삶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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