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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가족앓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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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글사랑 Mar 03. 2024

마음의 온기

정성 들여 거르지 않는다면 이 마음, 그곳에 가 닿지 않을까.

       

   사과를 반으로 쪼갠다. 빨간 껍질이 감싼 하얀 속살은 달콤한 향기로 코끝을 간지럼 핀다. 하얀 속살과 달리 검게 그을린 씨앗. 껍질 벗기고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씨앗이 검게 그을린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과수원 주인이 농약 덜 치고 온종일 정성 들인 그 마음을. 그에 보답하려 씨앗은 온몸으로 상처를 막아냈으리. 사과 상자를 여는 순간, 농장주인이 품은 사랑과 선물한 지인이 전하고자 한 마음이 향기로 전해졌다.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매일 똑같은 일상 무의미하게 살고 있을지 모른다.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 채. 가족이란 테두리 안에서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달콤한 사과 향기에 눈물 나는 건 검게 그을린 씨앗이 온몸으로 버텨준 남편 같았기 때문이다. 지키고 싶었으리라, 우리 가정을. 난 속마음을 숨길수록 날카롭게 말했고, 눈빛에 실린 감정은 거친 행동을 정당화시켰다. 가족은 하늘이 내려준 선물인데 말이다.


   하루하루 살얼음판을 걸었다. 평온한 분위기에 감사할 줄 모르고 내가 얻고자 하는 답만 들으려 했다. 머릿속 가득 찬 불편한 생각을 표현하지 못하고 기분대로 행동했다. 마음속 응어리는 기승전결로 정리되지 않았다. 왜 불편하고 화가 나는지 이유조차 몰랐다. 그렇게 기와 결로 괴롭혔고, 자신이 선택한 결과라는 듯 받아들인 남편은 나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행동으로, 마음으로.


   매일 아침저녁 안아주었다. 쓰레기가 차면 말없이 비웠고, 빨래가 쌓이면 정리했다. 집안청소를 하면 우리 문제가 사라지는 것처럼. 남편의 귀가시간은 앞당겨졌고 혼자만 즐기던 주말은 사라졌다. 말없이, 정성스레 노력하는 남편을 보고, 아들은 나에게 아빠의 이야기를 늘여놓았다. 아빠가 달라지고 있다고. 아들은 남편에게도 그랬으리라. 우리는 서로 안아주듯 곁을 지켰다.    


   가족의 따스한 온기 덕분일까. 뭉쳤던 응어리가 서서히 녹아내렸다. 허구로 소설을 쓰고, 억지 부리던 생각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이렇게 하면 안 되는데. 뒤늦은 후회가 눈물로 말 걸었다. 지금부터 다시 시작하면 된다고. 그제야 수척해진 남편의 뒷모습이 보였다. 잠 많은 남편이 먼 출퇴근길 다니느라 얼마나 힘들지, 새로운 사람들과 낯선 환경에서 지내는 건 어떤지. 검게 그을린 씨앗은 오십 고개를 바라보며 속내 감추려 새까맣게 탔을 남편 마음 같았다.


   퇴근한 남편을 안아주자 아들도 다가와 우리를 안았다. 퇴근하고 쓰러지듯 침대에 눕는 남편에게 예전 같으면 씻고 누우라 잔소리할 텐데, 이삼십 분 쉴 수 있게 기다렸다. 그렇게 쉬고 씻는 동안 시원한 맥주와 먹을 간식을 준비했다. 남편과 맥주 마시며 나누는 사소한 대화에 아들은 음료 들고 와 옆에 앉았다. 온 가족이 오순도순 보내는 이 시간이 행복인 줄 몰랐다, 그냥 당연하게 여겼다.


   감정을 다스리는 건 큰 바위를 옮기는 것만큼 힘들다. 남편과 단둘이 해결하려 했다면 쉽지 않았을 것이다. 탁구로 연을 맺은, 우리 부부를 아끼는, 선배 부부가 아니었다면 소중한 것을 보지 못하고 외면한 채 상처만 남겼을지도 모른다. 선배는 연륜이 있는 만큼 자식보다 부부가 제일이라 했다. 닮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되냐고 물으니, 갑자기 아들이 어떤 여자와 결혼했으면 좋겠냐는 질문을 했다. 엄마가 보여주는, 비슷한 여자를 아들이 만날 확률이 높다고. 등골이 오싹했다. 남편과 다퉈 무기력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손 놓아 버리는, 문제를 타협하기보다 내 주장을 강하게 요구하던 나.


   얼굴이 뜨거워졌다. 섬세하고 예민한 아들은 남편에게 이중적으로 대하는 말과 행동을  보고 있었으리. 매일 아침 방문을 열고나오며 집안 분위기를 살폈을 아들. 누구보다 아끼는 아들이 괴팍하고 고집불통인 아내를 맞이한다고 생각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대로 있을 수 없었다. 기분에 치여 응어리졌던 문제의 기승전결을 찾아야 했다. 우연히 듣게 된 당위적 사고란 단어가 귀에 들어왔다.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나도 모르게 그은 선, 어려서부터 자라온 환경에서 당연하다고 생각한 선이 나를 옭아매고 있었다.


   이른 새벽 꿀물에 마음의 온기를 담았다. 정성 들여 거르지 않는다면 이 마음, 그곳에 가 닿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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