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좋은 화구를 자주 사는 편이 아니다.
있는 놈으로 해보고 안되면 사러가는 무식한 그림쟁이다. 내가 화구를 자주 사지 않는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내가 이 비싸고 좋은 화구로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을지 확신이 없어서이고
나머지 하나는 뭐 단순히 가격때문이다.
후자의 경우는 그냥 사면 되는 노릇이니 큰 장벽이 아니지만 전자의 이유로 화구 사는 일을 주저하는 것이 제일 큰 장벽이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지난 일요일에는
동네 알파에 가서 6700원짜리 크레파스를 샀는데 싼 게 비지떡이라고 가루가 엄청나게 떨어진다.
색도 배합이 잘 안되고 하나 그리고 나면 책상을 닦느라 물티슈를 대여섯장이나 쓴다.
그날 문방구에서
머릿속에는 비싼 스위스산 오일파스텔을 그리면서 싼 문교 크레파스를 들고 고민하고 있으니
박대리가 "아까 산다던 거랑 다른데 왜 들고있어?그거 사줄게, 가자" 한다.
그런데 가루가 떨어져서 속상한게 아니라 실력 때문에 재료 사기를 주저하는 것이 속상해서 고민한거다. 살 돈은 있다.
배달 떡볶이 몇 번 안먹으면 스위스산 크레파스 24색 정도는 고민없이 살 수 있다.
화방 가기를 포기하고 그냥 동네 문방구에서 6700원짜리 크레파스를 사서 나왔는데 박대리가 내내 "에이 화방 가자니까" 한다. 나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내가 그 좋은 놈 가지고 후진 그림 그릴까봐 고민했다는 사실까지는 말 할 수 없었다.
언젠가는 화구 앞에서 주저없이, 대차게
'나는 응당 이런 재료를 써도 되는 사람!' 하고
홱 계산대로 들고 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