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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니 Nov 26. 2023

제망'오븐'가


간다는 말도 못다 이르고 그렇게 가버렸다. 어느 가을 찬 바람에 곧 떨어질 잎처럼 며칠 위태위태하다 싶더니 기어이 내 곁을 떠나버렸다. 조금만 더 버텨주길 간절히 바랐건만 어찌 그리 무심히 가버렸는지.




결혼 전 늘 꿈꿔오던 그림 같은 장면이 하나 있었다. 밖에서 안을 들여다본 듯한 시선을 가만히 따라가 보면 곧 아늑하고 평화로운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누군가의 지난 시절과는 사뭇 다른 이 참 부럽다. 동시에 너무 따뜻하다 못해 살짝 데어 시린 가슴에 작은 화상을 입은 것 같기도 하다.



요란한 차가운 바람이 휘몰아치는 바깥과는 달리 따뜻한 온기가 가득한 집안엔 온 식구들이 부엌에 옹기종기 모여있다. 한쪽엔 보기만 해도 가슴 설레는 이쁜 크리스마스트리가 장식되어 있고 바로 옆 테이블에선 모두들 움직임이 분주하다. 오븐에서 직접 구운 케이크와 쿠키를 장식하는 어린아이들의 재잘거림과 그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아직 젊디 젊은 부부의 미소로 온 집안은 따스함이 넘쳐나는 듯하다. 창 밖에서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나이 많은 성냥팔이 처녀는 이렇게 생각한다. 만약 결혼이란 걸 하게 된다면 꼭 저런 장면을 그려봐야지. 그리고 정말 결혼이란 걸 하게 되었을 때 그녀에겐 오븐은 따뜻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 반드시 있어야  것이었다.



일단 비싸고 좋은 걸로 샀다. 지금 같으면 엄두도 못 낼 일이지만 예비신랑도 당시엔 그녀에게 한없이 너그러워 가능했던 일이다. 그리고 예전에 그려둔 밑그림을 채색하기 위해 조금씩 준비를 해 나갔다. 퇴근 후 베이킹 수업도 다니고 그림에 없어서는 안 될 아이도 가졌다. 하지만 그림을 제대로 완성해보지도 못한 채 첫 오븐과는 작별을 고해야 했다. 가스 오븐이 빌트인으로 이미 설치된 새 아파트로 이사를 가게 되면서 그녀의 첫 오븐은 어느새 처치 곤란의 지경에 놓이게 되었다. 안타깝지만 살던 집을 매수한 분들에게 인심 좋은 척 그냥 드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두 번째 오븐은 첫 번째 것에 비해 그리 성능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래도 그림을 완성하기에 큰 부족함은 없었다. 그녀의 둘째인 딸아이와 동갑인 오븐은 그 후 오랜 시간 동안 충실한 조력자로서 그 역할을 다함에 조금의 게으름도 피우지 않았다. 케이크 시트지를 비롯하여 다양한 빵과 쿠키, 바비큐, 여러 구이요리 등등 아마 그 아파트에서 제일 많은 일을 한 오븐이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2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자 여기저기 이상이 감지되었고 그럼에도 요령껏 부려먹는 그녀의 손길을 결코 외면하지 않았다.




스콘 반죽을 만들어 냉장고에 휴지 시켜 놓고 오븐을 예열하기 위해 점화 손잡이를 돌리고 있는 중이었다. 여느 때처럼 점화를 알리는 '따따따따' 소리가 났고 오븐에 불이 붙은 걸 확인 후 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그런데 손을 뗌과 동시에 그대로 남아 있어야 할 점화구 불꽃이 사라졌다. 한 번씩 그럴 때도 있어 별생각 없이 다시 같은 동작을 되풀이했다. 하지만 아무리 반복해도 달라지는 게 없다. 순간 불안한 예감이 든다.



"밸브가 나갔네요. 그런데 이건 오래된 모델이라 부품을 더 이상 생산하지는 않아요. 혹시 남아 있는 게 있는지 확인을 해봐야겠네요. 아마 좀 힘들 것 같긴 한데"

A/S 기사님이 말 끝을 흐린다. 그리고 잠시뒤 설마설마했던 벽력 같은 소리가 내 귀에 들려온다.

"사모님, 죄송하지만 전국 센터에 다 알아봐도 부품이 하나도 없네요"

그렇게 난 아무런 소득도 없이 출장비에 기본 점검비를 합쳐 3만 원을 결재해야 했다.

  


꼭 필요한 거면 사면된다. 그리 싼 가격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못 살 만큼은 아니다. 하지만 선뜻 지갑을 열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2년 뒤 이사가 계획되어 있고 부엌만큼은 완전히 리모델링을 할 작정이다. 그리고 첫 오븐처럼 좋은 걸로 새로 구입할 생각이다. 남들은 전기 오븐을 권하지만 나에겐 가스 오븐이 제격이다. 그런데  이 빌트인 가전이란 게 한번 설치를 하게 되면 다시 들고 이사 가는 건 힘들다. 집을 매수하신 분들께 또 인심 좋은 척해야 한다. 하지만 그러기에 가격이 만만치 않다.



이대로 버티기엔 2년이란 시간이 너무 길다. 당장 다음 달에 크리스마스가 있고 내년 크리스마스 역시 같은 상황에 놓이게 된다. 사는 것보단 모양이 덜하지만 특별히 딸기를 듬뿍 넣어 만든 크리스마스 케이크는 12월을 손꼽아 기다리게 되는 이유 중 하나다. 게다가 기말고사가 끝나고 나면 딸아이는 친구들에게 아이싱 쿠키를 직접 만들어 선물할 생각에 들떠 있었다. 오븐 부고 소식에 아이가 제일 안타까워한다.




당근에서 2만 원을 주고 산 세 번째 오븐에 대해선 기대를 접기로 했다. 지금 이 상황에선 가스 대신 전기 오븐이 최선의 선택이라 20 리터 크기로 하나 장만했다. 미니 사이즈는 아니지만 예전 가스 오븐의 반밖에 안 되는 규격이라 아무리 들여다봐도 막막하다. 케이크틀을 제외하고는 집에 있는 다른 오븐 용기들이 아예 들어가지도 않는다. 2년 동안은 최대한 오븐 요리를 자제하며 지내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



알지 못하는 머나먼 곳으로 떠나버렸지만 빌트인 가전이라 육신만은 여전히 싱크대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반들반들 윤이 나는 오븐을 보면 지금이라도 점화 손잡이를 돌리기만 하면 불이 활활 피어오를 것만 같다. 아쉽기는 하지만 모든 미련은 뒤로 하고 이젠 그와의 이별을 담담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당장 뒷 베린다에 방치 중인 당근에서 구매한 전기 오븐부터 청소해야겠다. 마지막으로 우리 가족을 위해 오랜 시간 애써준 오븐을 기리기 위해 짧은 글로 내 마음을 전달해 본다.



오븐에게

그동안 참 고마웠소. 덕분에 바라던 그림은 잘은 아니지만 그런대로 흉내 낼 순 있었소. 오랜 시간 그대와 함께 한 추억이 많았기에 우리 아이들은 보다 특별한 기억을 간직할 수 있었던 것 같소. 조금만 더 우리 곁에 머물려 주었음 더없이 좋았을 테지만 그대의 지난 노고를 알기에 그저 미안하고 고마울 따름이요. 정말 수고 많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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