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 대단한 삶을 살아온 게 아니다 보니 이 세상이 공평치 않다는 생각을 한 적은 별로 없다. 비교적 내가 품을 들인 만큼의 대가가 주어졌다. 간혹 기대 이하의 성과를 이루거나 남들이 미처 알아주지 않더라도 그를 통해 무언가는 얻을 수 있었다. 물론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들도 존재했지만.
지긋지긋한 셋째 딸이라는 이유로 두 살 터울 남동생과는 하늘과 땅차이의 양육 태도를 보였던 친정 엄마의 지난 모습은 수십 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한다. 몇 해전 한 고위 공직자 자녀의 의대 진학 관련 기사로 온 나라가 시끄러울 때는 고3 자녀를 둔 부모로서 능력 없는 내 모습에 자괴감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오십이 넘은 이 나이에 잠시 멈춰 서서 가만히 지난날들을 돌이켜보면 내 인생에 불공정한 일로 크게 손해 본 일은 없는 것 같다. 그런 일을 당하면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는 내 성격 탓도 있겠지만.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진 하루 24시간 역시 별 내세울 것 없는 나에겐 참으로 공평한 일이다. 아무리 잘나고 돈이 많다고 한들 아무리 대단한 부모를 가졌다 한들 그 이상의 시간은 결코 가질 수 없으니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약간의 상상력을 더해 만약 누군가의 기준에 의해 별 쓸모없다 여겨지는 사람들의 시간을 강제로 빼앗아 이 세상 빛과 소금이 될만한 소수의 이들에게 나눠주는 일이 가능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따지고 보면 이 세상 다수를 위한 일이 될 테지만 시간을 빼앗긴 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여간 섬뜩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당신은 지난 6개월간 지속적인 경고에도 불구하고 타인에게 모범적이지 못한 나태함으로 귀한 시간을 낭비하였기에 하루 23시간 이용 대상자로 선정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이의를 제기하시려면 관련 입증자료를 준비하시어 일주일 내로 본 사무국으로 이의 신청 바랍니다. 이의 신청이 없을 경우 다음 달 1일부터 3개월간 일일 사용 시간이 제한되며 차후 또다시 대상자로 선정될 경우 그 누적 횟수에 따라 사용 시간과 적용 기간이 달라짐을 알려드립니다. 자세한 사항은 아래 내용을 참조하시고 이번 일을 계기로 시간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시길 바랍니다'
이런 제길, 시간 사용 제한 대상자로 선정 돼버렸다. 당장 다음 달부터 남보다 1시간이 적은 하루를 보내야 한다. 그것도 3개월씩이나. 하루 1시간쯤이야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한번 선정되고 나면 다음부턴 더 엄격한 기준이 적용된다. 처음과 달리 어떤 경고성 문자도 없고 게다가 이의 신청조차 할 수 없다. A도 처음엔 별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지금은 하루 겨우 18시간만으로 2년째 살아가고 있다. 앞으로 몇 년은 더 그렇게 지내야 다시 24시간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누군가가 하는 소릴 들은 것 같다.
반면 지금 TV에 나와 본인의 책을 열심히 홍보하고 있는 저 연예인은 아무래도 누군가의 시간을 덤으로 받은 게 분명하다. 공공연히 말하지는 않지만 결코 하루 24시간으로 가능한 모습이 아니다. 전업주부인 나도 힘들데 아무리 도와주는 이모님이 있다지만 저렇게 완벽한 주부의 모습은 갖추긴 힘들다. 게다가 아이가 무려 세명이다. 간식은 집 뒤 텃밭에서 직접 수확한 것들로 그녀가 손수 만들어 먹인단다. 나이를 가름할 수 없는 저 광채 나는 피부와 몸매도 타고난 게 있다 하더라도 지속적으로 유지하려면 돈을 떠나서 적잖은 시간과 노력이 요구되는 것들이다. 그건 그렇다 치고 듣자 하니 요즘 영화와 드라마 그리고 쏟아지는 광고촬영에 심지어 대학 강의까지 하나 맡았단다. 도대체 언제 시간이 나서 벌써 세 번째 에세이까지 출간했는지.
남편은 이 마당에 TV가 눈에 들어오냐고 잔소리다. 심드렁하기는 내가 더하지만 줄어든 내 시간만큼 그가 신경 써야 할 일이 더 늘어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저 난리다. 일전에 그가 대상자로 선정되었을 때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실 그땐 짜증이 좀 나긴 했다. 23시간 안에 충분히 할 수 있는 것들도 이 핑계를 대가며 자꾸 나에게 미루는 일이 빈번했다. 대신 3개월이 지난 이후 정말 개과천선이란 말이 딱 맞을 정도로 하루 24시간을 누구보다 알차게 꾸려가고 있다. 내가 해당될지는 꿈에도 생각 못한 채 나름 좋은 제도라 여기고 있었다.
이의 신청에 관해 몇 시간째 검색 중이다. 억울한 게 내가 원래 얼마나 부지런한 사람인지 이미 데이터화되어 있을 테고 또 지난 몇 달간 왜 그런 허송세월을 보냈는지조차 아마 다 파악되었을게다. 왜 그리 치열하게 사냐는 얘기까지 듣던사람이지만 이 놈의 갱년기라는 게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꾸만 몸과 마음을 쳐지게 한다. 아무런 의욕도 없고 그저 모든 게 다 부질없게만 다가온다. 이건 분명 내 모습이 아니다. 그렇다고 이런 자연스러운 일시적 증상까지 약물로 다스려가면서 스스로를 채찍질하긴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잔인한 일이다. 마침 비슷한 글이 하나가 눈에 띈다. 갱년기라고 달리 봐주는 것도 없으니 괜히 이의 신청하여 관계 당국에 찍히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란다.
그래도 한번 겪어봤다고 남편이 이것저것 많이 챙겨준다. 내 휴대폰을 빼앗아 알람과 타이머 설정에 문제가 있진 않은지 꼼꼼히 확인한 다음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슬그머니 내민다. 타이머다. 휴대폰에 이미 다 들어 있는 기능인데 굳이 왜 샀냐고 물으니 혹시 몰라서 그런단다. 모르긴 뭘 몰라. 자기 귀찮게 하지 말란 소리지. 줄어든 시간으로도 평소 하던 일들을 다 처리하려면 타이머를 이용해 최대한 효율적으로 몸뚱이를 움직여란 뜻이다. 본인이나 대상자로 선정되었을 때 진작 좀 그러시지.
마음이 싱숭생숭해서 그동안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잘 모르겠다.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일들은 미리 해둬야 하기에 대상자로 선정된 이후 바로 리스트로 뽑아두었다. 냉동실엔 바로 조리할 수 있게 손을 봐 소분해 둔 생선과 고기들로 꽉꽉 채워 놓았다. 아이가 좋아하는 쿠키도 한꺼번에 많이 구워 어떻게든 빈 틈을 만들어 냉동실에 쑤셔 넣었다. 금방 동이 나겠지만 김치와 장아찌 반찬들도 넉넉히 만들어 두고 이불 빨래를 비롯해 집안 구석구석 봄맞이 대청소도 한 달 앞당겨 미리 해두었다. 장기 투숙 중이던 갱년기 손님은 지금 너무 바빠 더 이상 받을 수 없어 다른 곳으로 쫓아내 버렸다.
드디어 30분 뒤면 하루 23시간의 낯선 세계가 펼쳐지게 된다. 나도 인지하지 못한 채 사라지는 시간들이라 일단 평소보다 잠을 한 시간씩 줄이기로 했다. 밥심보다 잠심으로 사는 나에겐 여간 버거운 일이 아니다. 일주일 전부터 몸을 길들이기 위해 한 시간 빠른 기상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익숙지 않다. 수시로 밀려오는 졸음과 피곤함을 쫓기 위해 커피만 계속 찾게 된다. 첫날부터 알람소리를 듣지 못하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게 휴대폰과 남편이 건네준 타이머를 다시 한번 확인한 후 이불속으로 들어간다. 편치 않은 맘이라 쉽사리 잠이 올리 없다. 그나저나 내 시간은 과연 누가 가져가게 될까.
시끄러운 알람 소리에 잠을 깬다. 벌떡 일어나 본능적으로 휴대폰을 찾아 알람을 껐지만 여전히 시끄럽다. 옆에 누워있는 딸아이의 휴대폰에서 나는 소리다. 다 큰 놈이 아직도 내 곁에 꼭 붙어잔다. 몇 번을 시끄럽게 더 울린 후에야 아이가 손을 뻗어 알람을 끈다. 3월이면 고 3이 되는 아이는 방학이라도 일찍 일어나 공부를 시작한다. 얼마나 기특한지. 한참 잠이 고픈 나이일 텐데 한편으론 안쓰럽기도 하다. 고요가 찾아오자 나도 모르게 이불을 머리 위로 끄집어 올린다. 잠시 후 또다시 들려오는 요란한 소리에 벌떡 일어나 앉아 휴대폰을 집어든다. 내 것이 아니라 이번에도 딸아이의 휴대폰이다. 아무런 미동도 없이 새근거리며 자는 아이를 팔꿈치로 툭 건드리니 그제야 손을 더듬어 휴대폰을 찾아 알람을 끈다.
눈도 제대로 못 뜬 채 그대로 앉아 조금 전 상황을 천천히 떠올려 본다. 분명 긴 꿈을 꾼 것 같은데 고작 5분도 채 지나지 않았다. 알람이 울리고 다음 알람이 울리는 그 짧은 동안 꾼 꿈이라 믿기지 않는다. 아이의 알람이 아니었음 아마 하루 23시간의 석 달을 모두 마무리 짓고 어떤 깨우침을 얻게 되었는지도 다 볼 수 있었을 텐데 살짝 아쉽다. 또다시 아이의 알람이 울린다. 도대체 알람을 몇 번이나 설정한 거야. 그냥 편히 좀 더 자고 꼭 일어나야 할 시간에 맞춰 알람을 설정하면 더 나을 텐데 참 피곤하게도 잔다. 이러다 아이도 짧아진 하루를 알람과 타이머와 사이에서 고군분투하는 꿈을 꾸게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