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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니 Sep 01. 2024

동기가 없으면...

살아오면서 지금껏 절실히 느끼고 있는 바이지만 모든 일에는 동기가 필요하다. 그 어떤 채찍보다 무섭게 날 움직이게 한다. 뚜렷한 동기 없이 시작한 일은 작심삼일 혹은 용두사미로 그칠 가능성이 크다. 때론 다소 불손한 동기라 하더라도 없는 것보다 있는 게 훨씬 낫다. 지금부터 내가 하고자 하는 이 이야기도 그리 건전한 마음에서 시작된 일은 아니었다. 그저 담임 선생님이 틀렸다는 걸 나에게 가식적인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을 뿐이지.



까마득한 옛날, 초등학교도 아닌 국민학교 시절이었다. 집집마다 아이들은 기본 3, 4명씩에 제대로 교육받은 부모들도 드물었다. 엄마 역시 국민학교만 겨우 졸업했고 아버지는 그나마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 눈치다. 엄마와 나이 터울이 꽤 많은 막내 이모는 혼자 어렵사리 등록금을 마련해 가며 의대를 나왔지만 흔치 않은 일이었다. 모두들 고만고만한 살림에 딸린 자식들이 여럿이다 보니 먹고살기에 급급했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아이들 학교 생활에 일일이 신경 쓸 여유가 없었지만 그럼에도 지금 못지않은 열혈 극성 부모들은 당시에도 존재했다. 촌지가 난무하고 치맛바람이 무섭게 휘몰아쳤다.



5학년때 담임 선생님은 촌지 좋아하고 특정 아이들만 유독 편애하는 사람이었다. 사실 촌지를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내 눈으로 직접 본 적은 없다. 그걸 아이들 앞에서 주거니 받거니 하진 않으니깐. 하지만 모든 정황상 반 아이들을 대하는 그녀의 차별적인 태도는 촌지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하는 게 꽤나 합리적이었다. 그땐 엄마들이 선생님을 찾아오면 으레 봉투를 들고 왔고 이쁨을 받는 아이들의 엄마는 죄다 학교에 얼굴을 내밀었으니.



당시 그녀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던 한 남자 애가 있었다. 그 녀석은 수시로 만만한 아이들을 찾아 괴롭혔는데 특히 자기 짝지인 내 친구가 그 주요 대상이었다. 나처럼 엄마가 단 한 번도 학교에 찾아오지 않는 그 친구는 속절없이 당하기만 했다. 물론 약아빠진 놈이라 선생님 앞에선 대놓고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기에 담임이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내 눈에 그 모든 게 너무 불공평해 보였다.



작정을 하고 일기장에 그놈의 비행을 일일이 다 까발렸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다른 친구들을 괴롭히는 그런 나쁜 아이를 선생님은 왜 이뻐해 주는지 모르겠다며 따지듯 적었다. 어차피 난 그녀의 관심대상이 아니었기에 그깟 일로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으니 별 무서울 것도 없었다. 무엇보다 그녀가 나 같이 별 볼 일 없는 아이의 일기를 일일이 읽을 거라 생각도 못했다. 하지만 다음날 일기장 검사 후 돌려받은 공책엔 어쩐 일로 선생님의 변명 같은 답변이 빨간색 볼펜으로 적혀 있었다. 그러나 그건 바라는 답이 아니었다.



친구를 괴롭히는 나쁜 행동에 대한 지적은 전혀 없이 그저 본인은 자기 의견을 확실히 표현하는 아이를 이뻐한다는 이해 못 할 소리만 적혀 있었다. 도대체 자기 의견을 확실히 표현한다는 게 과연 뭘까? 묘한 반발심이 생겼다. 이것저것 다 떠나 엄마가 학교에 찾아오지 않고 촌지도 줄 수 없는 나 같은 아이일망정 발표 많이 하고 공부 잘하면 이뻐해 줄 건지 그녀를 시험에 들게 하고 싶었다. 사실 그 녀석은 공부도 그저 그렇고 수업 시간에 발표도 많이 하는 편이 아니었기에 나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반감이 나에게 미친 영향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다.



그 후 학급 회의 때 줄기차게 손을 들어 자신의 의견을 발표하는 유일한 여자 아이가 돼버렸다. 처음이 좀 쑥스러워서 그렇지 한번 발표해 보니 그것도 은근 중독성이 있었다. 당시 담임은 산수를 중요시 여겨 항상 칠판 가득 문제를 적어 놓고는 아이들 사이에 은근히 경쟁을 부추겼다. 가장 먼저 풀어 선생님께 공책을 건네는 아이는 모두의 주목을 받곤 했는데 압도적으로 1등을 많이 한 아이가 바로 나였다. 다행히 두 명 정도 좋은 경쟁자가 있어 그들과 앞다퉈가며 문제를 풀어대다 보니 어느새 산수에 남다른 재능을 가진 아이가 돼버렸다. 그렇게 5학년을 보내고 6학년이 되자 어느 순간 난 학교 대표로 산수 경시 대회에 참가하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시내 한가운데 위치한 한 반에 60명 이상 각 학년에 13개 학급까지 있던 큰 규모의 국민학교였다. 대표로 뽑힌 이상 학교의 명예가 달린 일이었기에 곧 특별 관리에 들어갔다. 5학년때 담임처럼 아이들을 편애하진 않았지만 유난히 애살있고 극성스러운 담임 선생님을 만난 탓에 그때부터 나의 고난 시대가 시작되었다.



몇 달 동안 수업 시간 내내 꼼짝없이 선생님 책상에 앉아 혼자 산수 문제만 풀어야 했다. 선생님은 한 남자아이에게 내가 푼 문제들을 채점하게 했는데 반에서 가장 점잖고 성실하다 그녀가 여기던 아이였다. 또래보다 키가 크고 코밑이 거묵거묵해지기 시작한 잘 생긴 아이였다. 그동안 한 번도 생각 않고 지낸 '이 병환'이란 이름이 40년도 지난 이 시점에서 갑자기 떠오르는 건 또 무슨 일인지. 내 문제집에 빨간 색연필로 그린 동그라미는 한눈에 봐도 보통 정성이 아니었다. 동그라미만 이쁘게 그릴 줄 아는 아이가 아니었다.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겨울 방학식날 불쑥 나에게 내민 카드엔 단정하고 깔끔한 글씨체로 내 맘을 살짝 설레게 만들기도 했다.



6개월가량 그 지겨운 시간 동안 유일한 즐거움은 그 아이와의 풋풋한 썸씽이 전부다. 끈질길게 학교에 얼굴을 내밀지 않는 엄마를 대신해서 선생님은 우리 집까지 직접 찾아왔다. 무슨 말이 오갔는지는 잘 모르지만 엄마를 붙들고 날 공부 시키라고 신신당부를 한 것은 분명했다. 엄마 말로는 빈 손으로 선생님을 돌려보내기가 뭐해서 봉투에 만원을 넣어 드렸다고 한다. 순간 내 귀를 의심하며 그걸 선생님이 받더냐고 놀라서 되묻었다. 엄마는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있냐는 듯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받지. 그걸 안 받아?"



뭔가 다를 줄 알았던 이 선생님도 결국 다 똑같았다. 게다가 어쩌다 보니 나 역시 촌지 건네는 집안의 아이가 돼버렸다. 모든 게 조금 충격적이긴 했지만 그리 비통하거나 죄책감에 빠지진 않았다. 세상이 원래 그런 건지 이미 알고 있었기에.



가을에 있을 경시 대회를 위해 선생님은 여름 방학 때도  혼자 학교에 나와 산수 문제집을 풀게 했다. 집을 방문해 보니 공부할 분위기는 아니라는 걸 이미 눈치챘나 보다. 정해진 시간만큼 공부를 하고 나면 학교 앞 문구점 공중전화로 선생님께 보고를 해야 했다. 그리고 그녀의 허락을 받아야 집에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선생님의 철저한 감독과 관심에도 불구하고 사실 열심히 공부할 의욕이 그다지 나지 않았다. 모두 날 너무 믿고 있었기에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구멍을 찾을 수 있었고 땡땡이치는 것쯤이야 아무 일도 아니었다. 방학 때도 학교에 나와 혼자 놀다 정해진 시간에 선생님에게 전화만 했을 뿐이다. 산수에 대한 뜨겁던 마음은 5학년이 지나자마자 이미 식어버렸고 동기를 잃어버린 난 계속 열심히 공부할 뚜렷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오히려 6개월 동안 꼼짝없이 혼자 산수만 풀어야 하는 건 그 나이의 아이에겐 너무 끔찍하고 지겨운 일이었다.



결국 선생님의 드높은 기대에도 불구하고 난 경시대회에서 입상을 하지 못했다. 다행히 학교 대표로 같이 참가했던 다른 반 남자아이가 입상하는 바람에 학교 체면은 그런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유난히 아쉬워하는 담임 선생님과 달리 난 전혀 아쉽거나 슬프지 않았다. 바라지도 않았던 그 모든 것이 드디어 끝났기에 홀가분하기만 했다. 게다가 더 이상 수업 시간에 선생님 책상에 앉아 혼자 산수 문제를 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오히려 너무 기뻤다. 드디어 내게도 평범한 6학년의 일상을 즐길 수 있는 시간이 찾아온 것이다.




요즘 학원가에서 초등 의대반이 개설되어 아직 어린아이들이 벌써 미적분을 공부한다는 기사를 읽었다. 그 꼬맹이들이 한 자리에 가만 앉아 몇 시간씩 고등 수학을 푼다고 생각하니 잊고 지냈던 지난날이 떠올랐다. 그래도 그땐 6개월 정도만 참고 기다리면 모든 게 끝이었지만 이 아이들은 적어도 6년 이상을 계속 아니 앞으로 속력을 더 올려 달려야 할 것이다. 자칫 과열과 연료 부족으로 주저앉을 수도 있을 텐데 좀 더 기초 체력을 다져 놓은 후 서서히 시작하는 게 낫지 않나 하는 아쉬옴이 든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동기나 뚜렷한 목표가 없이 시작한 일은 지속성을 얻기 힘들다. 어릴 땐 부모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따라 가지만 아이 스스로 동기를 찾지 못하면 이내 부모와 다른 길로 돌아서길 쉽다. 부모라는 막중한 책임감은 때때로 눈과 귀를 멀게 만든다. 부모 마음을 불안하게 만드는 학원가의 마케팅에 호구가 되지 않으려면 좀 더 객관적으로 내 새끼를 볼 필요도 있다. 대부분의 평범한 초등생들에겐 미적분은 너무 버거울 뿐이다. 아이가 의사가 되길 바란다면 초등 의대반에 등록시킬 게 아니라 의사란 직업에 대한 꿈과 동경을 갖도록 옆에서 동기 부여를 해주는 게 오히려 더 현명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What does the future hold?'

얼마 전 영어 공부를 하다 배운 한 문장을 참 요긴하게 많이 써먹고 있다. 변화무쌍한 삶 속에서 우리 아이들이 장차 어떻게 될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수시 원서 접수가 당장 코 앞인 고3 둘째를 봐도 20살이 넘은 큰 애를 봐도 앞으로 이들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지 단정 지어 말하긴 어렵다. 다만 꿈과 희망을 가지고 그렇게 되길 바라며 최선을 다 할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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