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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현 Apr 08. 2024

아, 정말 투표하기 싫다

복수에도, 현상유지에도 저는 일말의 관심이 없습니다

    만 19세가 되어 선거권이 생긴 뒤로 한 번도 투표를 거른 적이 없다. 선거일 당일에 투표소에 갈 수 없다면 부재자투표라도 했다. 사전투표제가 도입된 뒤로는 되도록 사전투표일에 투표를 하려고 했다. 역대 최악의 '비호감' 선거였다는 지난 20대 대선 당시에도 어쨌든 투표를 하긴 했는데, 이번 총선은 진심으로, 온 마음을 다해, 정말로, 너무 투표를 하기 싫다는 생각뿐이었다. 출근길 집 앞 지하철역에 눈이 아플 정도로 강렬한 원색의 점퍼를 맞춰 입고 도열한 선거운동원들을 볼 때마다 매번 울분이 치밀어 오른다.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도 모를 생면부지의 낙하산, 과장 좀 보태서 4년에 한 번씩 당적을 바꾼 철새 정치인, 당선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이는 전직 기초의원이라는 선택지밖에 없다 보니 그렇게 됐다. 누군가 "저는 ○○동에서 태어나 ◇◇구 소재 □□중, △△고를 졸업했으며 여태까지 한 번도 주민등록을 옮겨 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힘주어 주장한다면 그나마 또 모르겠는데, 누구도 '사대문이 코앞인데도 1980년대 후반의 풍광을 자랑하는 데다 청장년층보다는 노년층이 더 두터운' 괴상한 동네의 특징을 잘 알고 이해할 것 같지는 않다.


    아래는 구독 중인 모 언론사의 뉴스레터 하단에 실렸던 독자 의견이다. 독자 의견을 보낸 적이 없는데도 순간 '내가 저런 걸 보냈던가?'하고 착각할 정도로 내 마음을 꼭 대변하고 있었다.


제가 거주하는 지역구는 거대 양당이 모두 '전략공천'이라는 핑계로 지역과 전혀 관련 없는 후보들을 낙하산 출마시켰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전략'은 지역을 위한 것이 아니라, 본인들 '밥그릇 챙기기 전략'입니다.


    지역구민의 마음을 동하게 할 만큼 똘똘해 보이는 후보가 없는 것도 문제지만, 눈에 띄는 어젠다가 없는 것이 정말 큰 문제다. 고만고만한 개새끼들이 못난 점을 서로 들추면서 물어뜯고 자빠진 거대 양당 구도에 나만큼이나 불만이 많은 후배와 이번 선거 내내 백 번쯤 했던 이야기이다. 예를 들어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의제에는 차별금지법·생활동반자법 제정, 미프진 도입, 기후위기 대응 등이 있는데, 득표에 실질적인 도움이 안 된다는 이유로 이 모든 것들은 이번 선거에서 뒷전이 되어 버렸다.


    나는 정치적 복수에 조금도 관심이 없다. 현상유지는 퇴보라고도 생각한다. 조금이라도 더 나아간 세상을 만들겠다고 약속하고 계획표를 내보이는 사람만이 국회에 입성해 법을 만들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정치에 무관심하기 때문에 선거에 시큰둥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나 같은 사람은 거대 양당 중 한쪽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정치 무관심층 내지는 웃기지도 않는 부동층 취급을 받는다. 게다가 반대편 진영을 악마화하는 광신적 지지자들은, 나 같은 사람의 표는 자기들이 언제든 가져다 먹을 수 있다는 착각을 정말 꾸준히 한다.


    양심이 있다면 좀 때깔 좋은 미끼라도 가져다 놓고 유혹을 하는 것이 낚시꾼의 도리가 아닐까? 의제라는 것이 실종된 선거에서 뻔뻔하게 면상에 철판을 깔고 "나중에!"를 외치는 꼬락서니를 보고 있자니 그냥 다 한강에 떠밀어 버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결국 울며 겨자먹기의 심정으로 사전투표소에 다녀왔다. 이틀째 되는 날 오후에는 사람이 적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기표소가 설치된 투표 장소까지 가기 위해 한참 동안 엘리베이터를 기다려야 했다. 이번 총선의 사전투표율은 31.28%로, 사상 처음으로 30%대를 돌파해 역대 최고 투표율을 기록했다고 한다. 글쎄, 양극화된 의석 구성의 예고편에 불과한 것 같아 별로 고무적인 기분은 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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