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현 Apr 18. 2024

내 생각은 어떻게 내 것이 되었나?

먼 곳으로 소풍을 떠난 나의 엄마 오리에게

    나는 지적 허영으로 작은 머리가 가득 차 대체로 또래들을 우습게 보는 재수 없는 청소년이었다. 수능이 끝난 기념으로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사 온 책들 중에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가 끼어 있던 것도 그런 까닭이었다. 또래보다 우월한 나의 지적 수준에는 어릴 적 아빠의 책꽂이에서 보았던 그 책, 언젠가 KBS 다큐멘터리에 나와 왠지 멋져 보이는 말들을 많이 하던 사람이 쓴 그 책이 꼭 어울린다고 믿었다. 그 책이 어떤 맥락과 배경 위에서 쓰였는지도 모르고 단지 '나는 이런 책도 읽었다'며 으스대기 위해 책을 펼쳤는데, 가치관을 통째로 뒤흔드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저자가 하는 말을 직접 듣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내가 대학에 입학하던 해는 아직 '진보'라는 개념이 크게 오염되지 않았던 때였고, 민주노동당이 왼쪽 날개의 깃털 정도 역할을 하며 더 성장해 나갈 수 있으리라는 사회적 기대도 조금이지만 남아 있었다. 그리고 내 모교의 학생 사회 역시 총학생회와 단과대 학생회의 주류가 서서히 '비권'으로 대체되기 직전에 있었기 때문에, 민중가요와 율동과 진보적 인사들의 다양한 특강을 접하기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학교에서, 시민단체 자원 활동을 하면서, 시위를 하러 나간 길거리에서, "내 생각은 어떻게 내 것이 되었나?"로 시작하는 홍세화 선생의 특강을 통틀어 대여섯 번쯤 들었다. 책에 사인을 받으며 "저 선생님 강의를 여러 번 들었어요!"라고 흥분해서 이야기하는 내게 "굳이 그럴 필요는 없는데……."라고 미묘한 얼굴로 답하던 모습이 생각난다.


    홍세화 선생은 나의 엄마 오리였다. 그의 책을 읽고 육성을 듣기 위해 종횡무진하던 과정에서 만난 사람들과 이야기 덕분에, 나는 잘난 척하기 좋아하는 철없는 어린애에 머물지 않고 세계를 차근차근 넓혀 나갈 수 있었다. 이랜드 농성장에서는 두꺼운 옷과 침낭으로 몸을 둘둘 감고 처음으로 노숙이라는 것을 해 봤다. 잘 타지도 못하는 자전거에 깃발을 꽂고 도로를 한참 달렸다. 노사 합의 후 마지막으로 열린 문화제에서는 "보현 동지!"라는 어색한 호칭에 머쓱해하다가 함께 눈물을 찍어냈다. 오직 신념에 따라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들을 처음으로 만났다. 정리해고에 맞서 까마득한 하늘 위에서 수백 일간 머물던 김진숙 지도위원을 멀리서나마 만나기 위해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희망버스를 타고 한참을 걸었다. 그리고 또, 그리고…….


    신념과 삶의 방향을 일치시키고 싶어 기자가 되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선거일에 기표소에서만 잠깐 시민권을 행사할 뿐인, 그저 그런 인간이다. 젊은이 특유의 치기를 흠뻑 뒤집어쓰고 늘 바쁘게 움직이던 나는 과거에 박제되어 있다. 그러는 사이 국회에서는 보라색이, 노란색이, 초록색이 지워졌다. 대선 토론회에서 늘 소중한 마무리 발언 시간을 사회적 소수자에게 할애하던 정치인도 정계 은퇴를 했다. 그리고 나의 엄마 오리도 오늘 저 먼 하늘로 훨훨 날아갔다. 총선 다음날 조간신문을 볼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것 같다.


    나의 엄마 오리는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이었다. 눈을 감는 날까지 신념과 삶의 방향을 나란히 하기 위해 애썼던 사람이었다. 고인의 영원한 안식과 명복을 빈다.

매거진의 이전글 철없는 20대는 모두 막말을 하는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