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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현 Apr 24. 2024

불행을 먹는 자의 윤리

(1) 황색언론을 자처하는 일은 사절입니다

    사건사고를 다루는 부서에서는 사건이 기사화되어 언론을 통해 공개되기 전, 당사자들 사이에서 있었던 사건의 내밀한 내막을 원하든 원치 않든 아주 깊이 들여다볼 수 있다. 보호자들이 무슨 일로 집을 비운 사이에 불이 났는데, 집에 있던 어린이가 뜨거운 불길과 연기를 피해 화장실로 도망쳤다가 의식을 잃은 채로 발견된 사건이 있었다. 어린이가 들것에 실려 나올 때 뒤늦게 보호자가 현장에 도착했고, 보호자는 아마도 어린이의 것일 이름을 처절하게 부르며 들것을 쫓아 구급차로 뛰어들었다. 그 외에 남들 보는 곳에 적을 수 없는 안타까운 가정사가 한 숟갈 더해졌다. 한순간에 생때같은 자식을 잃은 사람의 심정에 비할 바야 못 되겠지만, 지금까지도 그 사건을 잊을 수가 없다. 그날 집에 가서 안방 침대에 앉아 엄마 앞에서 엉엉 울었다. 행복한 것만 보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어. 너무 힘들어, 엄마. 나는 다른 사람의 불행을 먹고 사는 사람인가 봐.


    그 뒤로 나는 커피 필터가 되기로 했다. 일상을 회복해야 하는 당사자와 주변인들이 불필요할 만큼 화려하게, 혹은 자극적으로 재현된 기사를 접하고 고통의 순간으로 다시 돌아가는 일이 없도록, 혹은 기사를 읽는 독자들이 당사자의 고통을 일없이 느끼는 일이 없도록 내 선에서 최대한 거르기로 한 것이다. 전반적인 정황을 이해하기 위해 꼭 필요한 사실관계가 아니라면 망설임 없이 다 잘라낸다. 특히 성폭력 사건을 다룰 때는 심혈을 기울인다. 취약한 상태에 놓였던 피해자에게 아주 오랜 기간 동안 저질러진 어떤 범행의 내막을 받아 들고 물리적으로 구역감을 느낀 적이 있었다. 피해자의 눈물이 어렸을 사건이 건조하게 정리된 문서가 되어 내 앞에 놓이기까지 꽤 많은 가지치기가 이루어졌을 것이 분명함에도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주제에 누군가의 고통을 감히 날것으로 들여다보고 있다는 자괴감에 한참 시달린 끝에, 해당 사건의 전말은 단 한 줄로 정리되었다. '모월 모일 모처에서 모종의 방식으로 범행을 저지른 혐의를 받는다.'


    수천, 수만 건의 기사가 포털 사이트를 통해 쏟아지는 상황에서 해당 기사는 별 주목을 받지 않고 흘러가는 듯했는데, 누군가 구체적인 혐의 내용을 제목에 노골적으로 장식한 타사 기사와 내 기사를 비교하며 '왜 이런 식으로 쓰지 않았냐'는 식으로 힐난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노랗고 노랗고 노랗게 기사를 쓰지 않았기 때문에 내 기사는 많이 읽히지 않았고, 그것은 큰 잘못이라는 취지다. 이런 흡혈곤충 같은 언사에 모멸감을 느끼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아마 몇 살만 더 어렸다면 크게 분노하며 들이받았을 것이다. 지금은 그냥 한숨이나 한 번 쉬고 그러려니 한다. 나는 내 방식대로 직업인으로서의 내 존엄을 지킬 뿐이다. 콧방귀 한 번 뀌고, 듣는 시늉도 하지 않고 내가 해 오던 대로 취재를 하고 기사를 쓸 것이다. 그게 남의 불행을 먹고 사는 사람의 윤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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