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전원합의체, 동성 동반자의 건강보험 피부양 자격 인정
동성 동반자는 단순 동거를 뛰어넘어 동거, 부양, 협조, 정조의 의무를 바탕으로 부부 공동생활에 준하는 경제적 생활공동체를 형성한다. 피고(건강보험공단)가 피부양자로 인정하는 사실혼 관계에 있는 사람과 차이가 없다.
이어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조희대 대법원장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듣다가 눈이 튀어나올 뻔했다. 나는 내가 거의 잘못 들은 것은 아닌가 싶었는데, 이어지는 '실체적 하자'에 대한 다수의견의 법리 설시는 '상고기각 판결'이라는 결말로 달려가고 있었다. 건강보험공단이 직장 가입자와 사실혼 관계에 있는 이성 배우자와 달리, 동성 동반자의 피부양자 지위를 인정하지 않고 지역가입자로 전환해 건강보험료를 부과한 것은 헌법이 정하고 있는 평등원칙에 어긋난다고 판단한 원심을 수긍하는 결론. 긴 연애 끝에 가족들과 친지들의 아낌 속에 결혼식을 올렸다는, 한 번도 직접 만나 본 적이 없는 부부를 떠올렸다.
할 수 있는 권리가 없다면 하지 않을 권리도 존재하지 않는다. 많은 일이 그렇듯, 아예 선택지 자체를 소거당하는 것과 선택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다른 문제다. 과거 꽤 오랫동안 결혼을 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던 것은 내가 이성애자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럴 마음을 먹고, 마음이 맞는 짝꿍을 만날 수 있는 운도 따라 준다면, 다른 누군가와 법적 결합을 해서 서로의 보호자가 되어 주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그럴 수 없는 사람이 아주 많이 있다. 벽장 속에 있든, 벽장을 부수고 나왔든. 이번 판결은 민법상 배우자의 의미를 확장하는 것과는 결이 다른 문제이고, 대법관 4인의 별개의견은 물론 9인의 다수의견도 이 점을 분명히 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오늘로써 동성 동반자 관계를 배제하는 제도의 차별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분기점이 마련됐다는 평가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땅에 발을 붙인 시간보다 공중에 뜬 시간이 더 많은 아들 둘과 좌충우돌하면서 "사랑하는 사람과 매일 부대끼며 사는 게 나는 기대했던 것보다 더 좋던데?"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내 지인과 같은 사람이 더 많아지면 좋겠다. 나처럼 스스로의 의지로 미지의 땅에 발을 들일 수 있는 사람이 좀 더 많아지면 좋겠다. 나는 아주 우연히 예비 배우자를 만나 교제하고 안정을 찾으면서, 오랜 고민 끝에 '저 사람과 가족이 되고 싶다'는 마음을 굳혔다. 평범한 사람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우려스러운 지점을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 모든 가능성을 감수하고라도 이인삼각 끈을 묶어서 늙어 죽을 때까지 어딘지 모를 목적지를 향해 천천히 함께 달리고 싶었다. 방향은 다르더라도, 그 길에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끈을 묶고 달릴 수 있다면 참 좋겠다.
집배신 포토데스크는 온통 무지갯빛이었다. 무지개색 우산을 들고 손을 꼭 붙든 채 내리꽂는 비 사이를 걷는 부부는 행복해 보였다. 흐뭇하게 웃으며 스크롤을 내리던 중, 배우자가 눈가가 빨개지도록 울먹이면서도 얼굴 가득 함박웃음을 짓는 사진에 오랫동안 눈길이 머물렀다. 돌연 목구멍이 따끔따끔해졌다. 건강이 상해 직장을 그만둬야 했던 배우자의 곁에서 버팀목이 되기로 결심한 그 마음의 크기는 얼마큼이었을까. 누군가 손가락질을, 혹은 거친 악담을 할 것을 알면서도 동성혼 법제화라는 집에 주춧돌 하나를 놓기 위해 긴 법정 싸움에 돌입했을 그 마음의 크기는 과연 얼마큼이었을까. 나는 잘 모르겠다. 그저 결혼을 앞둬서 눈물이 헤퍼졌나 보다, 이런 실없는 생각이나 했다.
축하합니다. 부디 오래오래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