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령 포고가 떨어졌던 지난 3일 밤, 생업 때문에 몸이 세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바빠서 연락도 제대로 안 되던 친구가 앞뒤 보지 않고 곧장 국회로 달려갔다가 된통 감기에 걸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곰곰이 생각해 봤다. 단약 이후 오랫동안 몸과 마음을 돌보느라 한껏 게으르게 살았지만, 이제는 좀 추스르고 일어나 할 일을 할 때가 됐다는 데 생각이 먼저 미쳤다. 그리고 출입처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충실히 하되, 여러 이유로 지면이나 리포트에서 빠지는 것들을 개인적으로라도 남겨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국회를 둘러싸서 머릿수를 채우는 일, 지역구 국회의원 사무실 앞에 진을 치고 앉아 압박하는 일, 윤석열 대통령 탄핵안 표결에 참여하지 않고 단체로 퇴장한 여당 의원들이 탄핵안 가결에 동참하도록 문자 메시지 폭탄을 선사하는 일 등은 다른 동료 시민들에게 맡기겠다. 기록해서 박제하는 일이 나의 본업이다.
가장 먼저 '2030' 또는 'MZ'라는 세대 구분으로 대충 뭉뚱그려지는 동료 시민들에 대해 이야기해야겠다. 현장 음성을 들어 보면 알겠지만,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는 참석자 중 다수가 젊은 여성이다. 국회의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 가결 이후 해제 선언이 몇 시간이고 늦어지자, 혹시라도 무도한 군홧발이 다시금 국회로 발길을 돌릴까 두려워 7곳이나 되는 국회 출입문 앞에서 은박지를 뒤집어쓰고 쪽잠을 청했던 시민들 중에도 젊은 여성들이 적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까지 모니터링한 바, 이러한 현상을 (우리 회사를 포함한) 국내 레거시 미디어에서 제대로 짚은 것을 보지 못했다. 넌더리가 날 정도로 익숙하다. 난생처음 내 발로 청계광장으로 나섰던 2008년 '촛불소녀'로 호명당한 뒤로 지금까지 쭉 그랬다. 정치적 주체가 아닌 객체 취급을 당하는 것. 큰 일을 남자들이 하는 동안, 그 옆에서 호명되지 못한 채 치어리더 행세를 하도록 강요당하는 것.
그러거나 말거나 여성 동료 시민들은 나서야 할 때가 찾아올 때마다 묵묵히 할 일을 했다. 늘 당당하게 자신만의 정치를 해 왔음에도 그들에게 돌아오는 것이라고는 "기특하다" "요즘 여자애들 같지 않다" 따위의 모멸적인 말들뿐이었지만, 2024년 12월에 와서는 애써 무시하려 해도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거대한 정치적 집단으로서 그 존재감을 뽐내고 있다. "머리가 비어서 아이돌 따위에나 목을 매고 정신을 못 차린다"는 헛소리에 굳이 대꾸하기보다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발광 응원봉을 챙겨 광장으로 향하고, 광장에서 성추행을 당했을 때의 대처 방법 따위를 공유하고, 광장 주변 공중화장실에 생리대를 산더미처럼 쌓아 두고, 오고 가는 동료 시민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요식업종 점포에 익명의 선결제를 걸어 두고, 국회 담벼락을 밤새 지키는 사람들을 자동차에 태워 화장실로 실어 나르고, 성차별을 지적하는 페미니스트 연사에게 보내는 야유를 더 큰 환호와 함성으로 묻어 버리는, 이 모든 일들을 동료 시민들이 하고 있다.
헌데 어제(8일) 전남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는 박구용이라는 자가 유튜브 채널 〈매불쇼〉 라이브에서 이런 말을 했다.
박구용: 그래서 마지막 관련해서 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20~30대 남성들한테 알려주려고요, 정보를. 많이 나온다, 여자분들이. (폭소 후) 얼마나 철학적이에요.
몰랐는데 박 씨가 현 야권 강성 지지층에서 꽤 무게감 있는 스피커 노릇을 오래 해 왔던 모양이다.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으로도 지명됐다가 고사했다고 한다. 〈나는 꼼수다〉 이후로 그런 종류의 팟캐스트, 유튜브 채널 등을 꾸준히 싫어하고 멀리했기 때문에 이번에 처음 알았다. 어쨌든 여러 가지 이유로 유시민 씨를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기회가 될 때마다 20~30대 남성 집단의 정치적 스탠스에 대해 돌려 말하지 않고 정면으로 비판했던 유시민 씨 쪽이 백 배는 더 현명하고 어른답다. 심지어 그는 개혁국민정당 창당 당시 당내에서 발생한 성폭력 사건의 처분을 두고 "해일이 밀려오는데 조개나 줍고 있다"며 빈정거렸던 데 대해 2년여 전에 구체적인 사과까지 했다. 젊은 남자들도 집회 좀 나오라는 소리를 비겁하게 눈치 살살 보느라 못 하고, 대신 무슨 헌팅포차 직원이나 클럽 MD가 그러듯이 "오늘 물 좋으니까 오세요" 수준의 헛소리를 뱉은 누군가와는 정말 비교되는 모습이다.
여성 동료 시민들이 콩나물시루 같은 지하철 9호선에 몸을 싣고, 칼날 같은 여의도 강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길바닥에 앉아 목이 터져라 소리를 치는 것은, '대의를 위해' 원치 않는 성적 접촉을 참아내기 위해서가 결코 아니다. 거기에 여성 청년을 눈요깃거리 내지 미끼용 상품으로, 남성 청년을 하반신에 뇌가 달린 단세포 생물 정도로 한꺼번에 끌어내릴 수 있다니. 일타쌍피란 이런 것이다. 항의가 빗발치자 라이브 클립에서 문제의 발언 부분이 삭제됐고, 박 씨는 댓글을 남겼다.
오늘 방송에서 제가 한 발언에 대해서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2030 남성들이 집회 현장에 보이지 않은 점을 지적하며 깨어 있는 여성들을 쫓아서라도 시위 현장에 나타나길 바란단 내용의 사르카즘 던진 것이었는데 상처를 드렸습니다. 물의 빚은 부분에 대한 용서를 구하며 시위를 축제의 장으로 바꿔 주신 용기 있는 여성분들께 응원과 지지를 보냅니다.
댓글 목록을 한참 내리고서야 겨우 찾아낸 위 댓글을 읽고 처음 받은 인상은, '쫓는다'라는 어휘부터, 자신의 뒤처진 성 인식을 '사카즘'으로 애써 포장하는 태도에 이르기까지, 그냥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어 박 씨는 오늘 오전 〈뉴스공장〉 라이브에서도 다시 한번 사과를 했다. 이걸 사과라고 봐야 할지는 잘 모르겠다.
박구용: 어제 〈매불쇼〉에 나와서 실수를 한 것은, 우리 같이 있을 때 약간 실수한 게, 여성들이 많으니까 남자분 나와라, 이런 말 했거든요. 그 말이 굉장히 성인지감수성이 부족해서 제가 좀 실수를 했고.
김어준: 욕 좀 드셨구나.
박구용: 네, 사과를 드리려고. 다른 방송이지만.
김어준: 다른 방송 가서 하셔야지. (일동 폭소)
"무엇이 잘못인지 인지하고 사과했으니 됐다"며 감싸는 목소리도 작지 않긴 한데, 내 눈에는 마치 화장실에서 볼일을 본 뒤 손을 씻고 나온 사람에게 박수를 보내는 것처럼 몹시 희한하게 보인다. 과거 불의를 참아 넘겼던 잘못이 후대에 부당한 대우로 돌아온 것은 아닌지 자책하던 한 청취자의 반성이, 철학 교수라는 박 씨의 알맹이 없는 텅 빈 사과보다 훨씬 가치 있게 들린다.
2024년 12월 9일 오후 7시 27분 추가.
최욱: 오늘은 사과로 좀 시작해야 될 것 같습니다. 지금은 이제 작은 힘이라도 모아야 되는 엄중한 상황인데 〈매불쇼〉가 그 힘을 조금 분산시킨 것 같아 가지고 너무너무 개인적으로도 고통스럽고, 여러분께도 너무너무 죄송합니다. 어제 〈매불쇼〉 출연자의 발언으로 인해서 상처받으신 분들이 많이 계신 것 같은데, 그분들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앞으로는 더욱더 신중한 태도로 방송에 임하도록 하겠습니다. (중략)
최욱: 사실 어제 조금 부끄러운 얘기지만 좋지 않은 이런 분위기를 연출했는데…….
김갑수: 아, 그런 얘기 여러 매체에서 재미있자고 많이 했는데 매체 영향력이 크다 보니까…….
최욱: 아, 하지 마, 하지 마! 아니, 지금 언론도요, 솔직히 〈매불쇼〉를 계엄군보다 더 나쁘게 욕하고 있으니까 그만하세요. 에너지가 분산되면 안 돼!
비키니 입고 가슴 까서 영치품으로 넣으라고 무려 지지자들에게 요구하던 2012년에서 수준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이게 사과냐?